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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문화의 모태 -사마르칸트

동서 교류와 문화 융합의 상징이었던 실크로드.


그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


중앙아시아 최고(最古)의 도시를 만나보자.


글·사진 | 박하선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실크로드 상의 무역센터 역할
유라시아 중심부에 위치한 곳을 우리는 '중앙아시아'라고 부른다. 또 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이야말로 서역사의 주요 무대로써 인접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의 문물 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8000m급의 파미르고원과 대 사막이 펼쳐지는 동양적 신비가 흐르는 땅이다. 우즈베키스탄 남부를 흐르는 제라프샨 강 유역에 자리한 푸른 도시 '사마르칸트.' 일찍이 유라시아 문화의 모태로서 문화의 용광로가 있었던 이곳 사마르칸트는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이 지나간 중앙아시아의 심장이라고 불리기까지 다른 오아시스와 마찬가지로 사막의 고도와 같았지만,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지혜로 번영하게 되어 실크로드 상의 무역센터 역할을 해 오면서도 잦은 외세의 침입으로 파란만장한 흥망성쇠의 길을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잘 말해 주는 곳이다.

"그대 푸른빛 돔은 힘센 기둥과 같다"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아직도 수많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가운데 250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불같은 태양이 사마르칸트의 아침을 열면서 드넓게 자리한 시가지의 한편에 쏠려있는 구시가의 이곳저곳에서, 초록과 푸른빛의 타일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모스크, 메드레세, 묘지 등이 지난날의 영화를 짐작케 한다. 또 '추비체이카'라는 사각모자에 '차반'이라는 민속의상을 몸에 두르고 그 사이를 누비고 있는 노인네들의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별다르게 달라진 게 없어 시공을 초월하여 저 먼 곳에 와 있음을 느끼게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 또한 사마르칸트이다.

주변의 침략에도 문화 지켜내
사마르칸트가 지금의 황량하고 잡초만 무성한 아프라샤프 언덕에 터전을 잡았던 것은 약 250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이 일대의 소그디아나 주민은 소그트인이라 불렸는데 이 부근을 흐르는 풍요로운 제라프샨 강의 혜택을 입어 물자가 풍성하고 문화수준도 높아서 관계 설비와 방위 기능을 항상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멀리 마케도니아에서 기원전 4세기경에 내습하여 대략 12만 명의 소그트인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가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제국의 분열로 인해 사마르칸트는 5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제후국으로 독립하여 문화가 융성하고 생활이 윤택해졌으나 7세기에 접어들면서 아랍족이 침략해와 그들의 지배하에 이슬람교로의 강제적 개종을 요구 당한다. 당시 소그트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항한 사람들은 잔혹한 방법으로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는 그 압제를 피해 도망쳐 뿔뿔이 흩어지다 보니 어느 틈엔가 소그트의 모든 것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아랍인의 나라 '사라센 제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유라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라센 문화가 이곳에서 피어나지만 영원할 수는 없었다. 9~1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랍세력이 약해져 가자 아프라샤프 언덕에 거의 완벽할 정도의 도읍을 축조하면서 사마르칸트는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4개의 견고한 성문이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하즈라트휘즐 모스크가 있는 '케슈문', 비행장으로 가는 북쪽 끝의 '나우베르문', 시오브강 연안 동북부의 '부하라문', 동남부의 '중국문'이 바로 그것이다. 낙타 등에 수많은 상품을 가득 실은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인도, 중국의 상인들로 법석되는 교역의 십자로가 열려 실크로드의 모든 것이 이 문들을 통해 연결되고 유입되었던 것이다.

티무르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
그러나 이러한 번영도 오래 계속 되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1220년 칭기즈칸이 인솔하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성읍 전체가 파괴되어 다시는 복구되지 못하는 비운을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무성한 잡초 속에서 역사의 한 쪽만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이 몽골군들의 침입 당시 얼마나 처절한 죽음이 있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으면서 통한의 슬픔을 삭이고 있다. 14세기 칭기즈칸의 사망과 함께 몽골제국의 내부가 붕괴되는 계기로 사마르칸트에 영광의 시대가 열린다. 파키스탄, 이란에서 흑해 연안까지의 대제국을 펼친 '티무르'가 출현하게 되어 오늘날의 사마르칸트로 소생되어 전성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칭기즈칸에 이어 유라시아 전역을 휩쓸어 대제국을 이룬 티무르. 결국 평생을 원정의 세월로 보냈던 티무르는 서쪽으로 소아시아, 북으로는 러시아의 남쪽, 동으로는 중국의 국경지방, 그리고 남으로는 북인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거의 전역에 해당하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영토 확장의 끝없는 원정으로 30여 년의 그의 통치 기간 중 수도인 이곳 사마르칸트에 그가 머물렀던 기간은 고작 2~3년밖에 안되지만, 전쟁의 승리 때마다 노획한 금은보화와 유능한 인재와 수공업자들을 대거 포로로 끌고 와 세계 최고의 위엄 있는 사마르칸트를 건설하도록 했다. 흔히 "칭기즈칸은 파괴하고 티무르는 건설했다"고 말하듯이 티무르는 군인인 동시에 우수한 정치가였고, 파괴자인 동시에 뛰어난 건설가였다. 그 때의 사마르칸트의 인구는 40만 명에 가까운 대도시였고, 지금도 그 때의 영화를 얘기해 주는 건축물들이 장엄하게 서역 하늘을 빛내고 있다.

학문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수행
실크로드의 중심지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자신에 의해 훌륭하게 재건됐지만,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영화는 계속되어 명실공히 유라시아의 심장 역할을 잃지 않았다. 티무르가 몽골족의 원수이며, 이슬람교도의 적국인 동방의 대국 명나라를 치기 위해 눈보라 속의 대원정을 나서다가 1405년 74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일시적인 혼란은 있었지만 그의 네 번째 아들 '샤루흐'에 의해 제국은 더욱 평화와 안정을 회복시켜 문화면에 있어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비록 제국의 수도를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로 옮기긴 했지만, 사마르칸트의 지배를 맡아온 큰아들 '울르그백'은 군주라기보다는 학자라고 표현해야 더 어울릴 정도로 스스로 교편을 잡아 학문을 고양시키는 일에 노력을 기울려 천문대와 메드레세(이슬람 학당) 등을 건립하였다. 당시 알현식이나 열병, 모임 등이 행해지곤 했던 '레기스탄(모래의 광장)'에는 3개의 메드레세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울르그백 메드레세'다.

오늘날 사마르칸트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이 레기스탄에서 밤에 펼쳐지는 '빛과 소리의 제전'을 보면서 과거의 영광을 꿈꾸어 보지만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마르칸트의 삶의 모습을 새교육 6월호에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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