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 | 경향신문 기자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한 자녀교육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것, 동양적인 것에 대한 서구의 시각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시각에 대해 서구인들이 반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서구가 일부 동양의 문화를 빌려가 그들의 문화로 삼았으면서도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한 것에 대해 뒤늦게 그 뿌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징기스칸을 '근대의 기획자'로 보는 서구 학자도 있다. 서구에서 징기스칸은 야만인(원래 야만인 'barbarian'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한 말), 피에 굶주린 미개인, 무자비한 정복자의 전형 정도로 폄훼(貶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서구에서 오히려 징기스칸을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로 통합한 '근대의 기획자'로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잭 웨더포드가 쓴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서는 징기스칸을 서구인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징기스칸을 '근대의 기획자'로 끌어올린다. 즉 월러스틴은 15, 16세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체제가 형성됐다고 말했지만, 저자는 이보다 200년 앞서 징기스칸이 근대세계체계를 형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주장한다. 징기스칸은 기동성 있는 전문적인 전쟁기술, '비단길'을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하는 등 세계화된 교역을 했고 국제적 세속법을 통한 통치라는 면에서 철저하게 근대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낡은 사고패턴을 깨고 패러다임을 전환해 징기스칸을 보면 야만인에서 근대의 기획자로 승격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우리의 전통적인 덕목을 바라보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토마스 쿤이 처음 사용한 말인데 패러다임의 현재적 의미는 모델, 관념, 지각, 시각, 준거틀 등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한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깨야 한다. 바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몸속에 체화돼 있는 서구중심주의, 전통에 대한 열등의식 등을 깨고 들여다보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것이 소중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우리의 선조들과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나 자녀교육방식을 들여다보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과거사나 과거의 인물들이 온통 보수적인 틀에 묶여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중에서 징기스칸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근대의 기획자'로도 볼 수 있는 인물도 많을 것이다. 함재봉 연세대 교수는 유교는 분명히 많은 차원에서 흔히 말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진보성도 아울러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유교의 위민사상 또는 민본주의는 진보사상의 민중주의와 매우 흡사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위민사상이 근대적 의미의 민중사상과 만날 경우 유교사상은 매우 진보적 색체를 띤다"고 지적하고 있다.
함재봉의 지적처럼 유교가 대부분 도덕주의로 흐르고 또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아울러 진보적 색채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가를 전통 명문가 문화의 산 체험장으로 개방한 의성 김씨 지촌 종가인 '지례예술촌'은 현대에 전통 종가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음미해볼 수 있는 곳이다. 지례예술촌은 오늘날에 와서 다시금 삶의 방식으로 추구되고 있는 '느림의 미학' 혹은 '한적의 미학'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한국판 '아티스트 콜로니'를 세우다
지촌종가가 한국판 아티스트 콜로니(Artists Colony), 즉 '문화예술인촌'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바로 종가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의성 김씨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의 13대 종손인 김원길 시인이 종가를 예술인촌으로 개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종가가 전통고수의 '엄숙주의'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종가로서의 역할이 끝났다는 절박한 인식에서다. 종가가 더 이상 지역사회를 위해 도덕적인 책무를 다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종가를 보존, 유지하는 것이 종가의 존재이유일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예전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고답적인 기능에 머물며 종가를 보존하느냐,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기능을 종가에 부여하느냐는 순전히 종가가 결정해야 할 몫이다. 이때 소설가 김용익이 1983년 우연히 종가에 들렀다가 이렇게 태고연한 마을이 다 있느냐며 탄복을 했다. 김용익은 "나중에 퇴직한 후 이곳에 와서 자서전을 쓰고 싶다"면서 아티스트 콜로니로 꾸미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예술가들이 일정 기간 살면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아티스트 콜로니가 15개 이상 있다고 했다. 김 씨는 이때 뭔가 얻어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소설가 제니 런던의 〈7일간의 파라다이스〉에는 한 아티스트 콜로니에 대한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집은 영혼의 친구였고, 사랑의 힘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완벽한 남자를 찾는 것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19세기에 지어진 농가를 예술가들을 위한 스튜디오와 은신처로 개조했다. 처음에는 2층짜리 건물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규칙하게 지어진 건물 2개가 더 늘어났다. 집에서 연결된 산책로는 강으로 이어졌다. 나무들 사이로 지붕이 보이는 다양한 미디어 스튜디오들을 포함한 외부 건물이 산책로를 따라 줄이어 서서 목가적인 고립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13장에서)
지례예술촌은 바로 '7일간의 파라다이스'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고립된 분위기 속에서도 목가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런 곳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다름 아닌 전통종가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새로운 변신을 가능하게 했다.
자녀교육의 새 장을 연 종가의 변신
김원길 시인은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종가(안동시 임동면 지례리)를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산이라도 많았으면 좀 더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이전을 할 수 있겠지만 당시 그의 형편으로는 400여년 된 고(古)가옥을 이전할 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지례예술촌을 만들고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동기로 작용했다. 고가옥들은 1664년 조선 숙종 때 지어진 종택과 제청, 서당 등 모두 10여 동 125칸, 17개 방이다. 그는 다른 방도가 없어 1986년부터 89년까지 200여 미터 떨어진 산기슭으로 건물들을 옮기기 시작해 89년에 모두 다 옮겼다. 그리고 김용익의 제안대로 예술촌으로 문을 열었다.
지례예술촌은 시인의 열정의 산물이다. 당시 안동대 교수였던 시인은 보장된 교수직도 과감하게 내던졌다. 교수직을 유지하면서도 예술촌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몸에 베인 '도덕주의'가 그 자산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수업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면서 "학생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미련을 두지 않고 교수직을 포기했다"고 회고했다. 예술촌으로의 변신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종가를 이용해 돈을 벌려느냐", "그게 말이 예술촌이지 여관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등의 비난이 문중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종가가 변신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엄숙주의를 털어내지 않으면 종가의 앞날은 없다"면서 설득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종가의 변신이어서인지 문을 열자마자 언론 등으로부터 호응이 대단했다. 예술인들도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면서 찾기 시작했고 외국인들도 한국전통문화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며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어령, 조병화, 홍신자, 유안진, 한수산, 김용옥 등 학계, 예술계 인사들이 다녀갔다. 처음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의 산실로만 염두에 두었지만, 일반인에게도 양반문화체험장으로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교수에서 '촌장'으로의 변신은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가능했다. 그가 기존의 종손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직도 종택은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고 문중인사들만 찾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머물고 있을 것이다. 폐쇄적인 종가의 분위기는 400여 년 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종가가 지역사회에 할 수 있는 역할도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종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지촌종가는 이렇게 종손의 열정과 확신, 그에 따른 순발력 있는 결정에 힘입어 새로운 종가문화를 창출하고 곳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17대 할아버지는 바로 의성 김씨를 당대에 명문가의 반석에 올려놓은 청계(淸溪) 김진(金進)이다. 지촌은 김진의 고손으로 1689년(숙종15년) 사간이 되었으나, 이해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서 왕의 과오를 막지 못한 자책감에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대사성, 대사간을 지냈고 지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친 인물이다.
'영수옥쇄 불의와전'의 가르침 전해
시인은 어릴 때 조부로부터 17대조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퇴계와 동시대를 살았던 청계는 다섯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인물로 다섯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조선시대에 다섯 아들이 급제하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고 불렀다. 또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합격하면 국가가 해마다 쌀을 주고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주는 등 많은 혜택을 주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약봉 김극일, 구암 김수일, 운암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이 바로 그들이다. 학봉은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서 영남학파의 양대 학맥을 이었다. 새로운 종가를 이룬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학봉종가는 퇴계종가와 함께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꼽히고 있다.
청계가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청계가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사자암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떤 관상가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살아서 참판이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贈判書)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이 말을 듣고 즉각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증판서는 다름 아닌 다섯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사후에 내리는 벼슬을 말함이다.
청계가 자녀교육에서 늘 강조한 것은 '영수옥쇄(寧須玉碎) 불의와전(不宜瓦全)'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가르침으로 의성 김씨 대종회에 따르면 이 문중에서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은 사람만 모두 68명에 이른다. 청계는 또 후손들에게 "벼슬은 정2품 이상을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을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가정교육의 요람으로 탈바꿈해야
21세기에는 오히려 한발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특히 속도의 시대에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와 대인관계 등으로 인해 더욱 느림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곳을 삶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여유를 주는 느림의 미학, 한적의 미학을 체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미 시인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 아닐까. 지례예술촌은 자녀들과 함께 찾으면 느림의 경쟁력, 한적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임어당은 '한적의 미학'을 동양의 가치로 꼽았다. 한적의 미학이란 바로 동양적 가치인 '귀전원거(歸田圓鋸)의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대자연 속에서 수신을 행함과 함께 제자를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정신이라 하겠다.
이 정신은 도연명과 퇴계 이황, 에머슨, 소로 등 동서양에 걸쳐 위대한 현인들의 삶에서 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예술촌으로 변신한지 17년이 되는 요즘, 아직도 예술촌으로 가는 길은 마치 조선시대 5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구불구불 산길을 넘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한적한 곳이다. 그런 외진 지례예술촌에는 연간 3500여명 정도 찾는다. 주로 자녀들과 함께 찾는 가족들이 많다. 아이들은 핸드폰도 안 터지고 TV도 볼 수 없는 이곳에 와 별똥별을 보면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 그야말로 '명가의 초석'을 쌓을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된다. 밤새 아버지는 자식들과 그동안 단절된 대화를 다시 잇고 미래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대화하고 가슴을 열고 목표를 정하고 그런 연후에 열정을 갖고 살아가면 그게 명가의 초석이 되는 게 아닐까. 지례예술촌은 21세기 종가가 가야할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전통 종가가 해왔던 자녀교육의 산실로 종가를 부활하는 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명문 종가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면서 가정교육의 요람이 되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시대를 거치고 시대적 상황이 급변하면서 종가의 위상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가의 고택과 함께 종가문화, 나아가 명문종가의 문화는 시대상황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녀교육의 산실로서의 문화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