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로마의 멸망 이후 본격적으로 중세 시대가 시작된다. 유럽의 중세 시대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행정조직'이라는 정치적인 유산과 정신적으로 가톨릭교회의 통일적 보편성이 작용하고 있었으며, 고대의 문화적 전통이 단절되지 않았다. 이상 세 가지의 요소에 마지막으로 게르만이라는 인적요소가 첨가되어 고유의 특징을 갖게 된다. 한편, 마호메트는 '알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이슬람교를 창시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다.
비잔틴제국 탄생의 주역 프랑크족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멸망 또한 하루 저녁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모순점을 안고 있었던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더니 동로마제국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흡수한 비잔틴제국 문명권과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침입자 게르만족의 여러 나라에 의해서 독특한 라틴·게르만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프랑크족은 일찌감치 로마제국의 보편교회(가톨릭)로 개종했기 때문에 서로마제국의 주민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유럽의 재편을 주도할 수 있었다. 훈족이 유럽으로 침입했을 때 원래 프랑크족은 라인 강 유역에 살고 있었으며 크게 살리아파와 리푸아리아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5세기 초에 갈리아 북부로 진출한 살리아파의 클로비스는 계속 남진하여 갈리아의 중앙과 남부를 점령하는 군사적 대성공을 거두었고 서기 493년 그리스도교의 신도인 부르군드의 왕녀 클로틸다와 결혼하고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종교로 개종하였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유럽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대사건이었다. 그의 개종은 점령지 주민의 가톨릭 사상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가를 쉽게 통치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게르만 민족의 개종이 촉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군주권과 교황권의 끊임없는 제휴와 분쟁이라고 하는 중세사의 특징을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가톨릭은 역사적으로는 게르만 민족에게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전해주고 종교사적으로는 프랑크족 이외의 다른 게르만 민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크 왕 클로비스가 사망하고 그의 계승자인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창업자의 정복사업을 계승하였지만 6세기 후반부터 메로빙 왕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실권이 궁내대신(Majordomus)의 수중으로 넘어 갔기 때문이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상업 활동이 감소되고 소규모 자작농이 증가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점차 인수·합병 등을 통해서 대토지를 소유하는 대지주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유럽은 장원체제의 중세 봉건사회로 넘어가는데, 특히 8세기에 궁재 샤를 마르텔이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북상하는 이슬람 군을 격퇴시킴으로써 프랑크 왕국의 통일적 세력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들 피핀은 자신의 통치력을 더욱 강화하고 색슨족 등을 정복하는 한편, 명목상의 군주인 메로빙 왕조의 왕을 폐위시키고 카롤링 왕조(751~888)를 창업하였다. 당시 교황 자카리아스는 눈치를 보고 있는 피핀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목상의 왕보다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왕이 아닌가요?" 피핀은 창업 과정에서 자신의 손을 들어준 교황에게 로마에서 라벤나에 이르는 지역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빼앗아 기증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황령의 기원이며 나중에 독립국가로서의 바티칸이 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전통 계승 이번에는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이 서로마를 계승하는 이야기이다. 샤를 마르텔의 손자이며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가 왕위를 계승하였다(768년). 샤를마뉴는 프랑스식 이름이고 라틴어명으로는 'Carolus Magnus', 독일식으로는 '카를 대제(Karl der Grosse)'이다(프랑크 왕국 자체가 프랑스 냄새가 많이 나므로 그리 하였는데, 독일어에서는 프랑스를 그대로 '프랑크라이히(Frankreich)', 즉 프랑크 왕국이라고 한다). 그는 부왕 피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교황에게 적극 협조하였다. 즉 정치가 정신적 지주인 교황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니 제국의 발전에 가속이 붙었던 것이다. 이때가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였는데, 교황의 요청으로 롬바르드족을 정복하고 색슨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 후에도 카를 대제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마침내 이베리아반도·브리타니아·시칠리아·덴마크 및 교황령을 제외한 서 유럽의 대부분을 복속시키니, 서로마제국이 망한지 300여 년 만에 유럽은 다시 정치적 구심점을 가지게 되었다. 전체 서유럽인들이 프랑크 제국의 통치 질서 속에 성당을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서기 800년 카를 대제가 이탈리아를 방문하였는데, 당시의 교황 레오 3세가 그에게 서로마제국의 황제관을 수여하였다. "이제부터 주상은 로마인의 황제이니 천하를 잘 이끌어주시길 바라오." 카를 대제에게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주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단절된 로마의 전통을 계승시킴으로써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이 나중에 10세기 말(962년) 오토 1세 부터 시작되는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동서양 역대 군주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창업자와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비록 어린 나이지만 손자까지는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동안 고생한 이야기며 창업정신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건국이념이 퇴색해 버린다. 왕자병에 사로잡혀 호의호식만 하다가 왕위(제위)에 등극하면 너무 세상물정을 몰라 권신(측근)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나라를 살피지 않기 마련이다. 군주제의 최대 단점이다. 무력했던 메로빙 왕조를 대신하여 유럽세계를 장악했던 프랑크 제국도 오래가지 못했다. 814년 카를 대제의 사망 이후, 내적으로는 중앙집권의 정치기반 붕괴와 외적으로는 노르만족의 침입이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더니 루이 1세가 프랑크 왕가의 상속법에 의해서 그의 아들들에게 국토를 분배하면서부터 치열한 유산싸움이 벌여졌다.
루이 1세의 사망 후에 황제 로타르 1세는 동생인 샤를 2세, 루이 2세와 싸웠으나 패전하여 베르덩 조약(843)으로 제국의 영토는 완전히 삼분(三分)되었다. 로타르 1세(795~855)는 황제 칭호와 함께 제국의 중간지대와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루드비히 2세(독일왕 804~876)는 동 프랑크를, 샤를 2세(대머리왕, 827~877)는 서 프랑크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통일 카롤링 왕조의 프랑크 제국은 분열되었다. 이후 제국의 쇠퇴는 노르만의 침공을 불러들였으며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에서 봉건화가 이루어지면서 870년에 샤를 2세와 루드비히 2세가 메르센 조약에서 국경을 확정하였고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성립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911년 동 프랑크의 루드비히 4세가 사망하자 독일지역에서는 카롤링 왕가가 단절되어 양국의 분리는 완전히 이루어졌다.
당시의 유럽은 분권적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국왕보다는 제후들의 힘이 강했고 진정한 단일국가로서의 통합은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에는 황제 선출에 제후들의 입김이 강하여 19세기 프로이센이 통일할 때까지 분립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다만 10세기에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로마황제의 대관을 받음으로써 독일은 '신성로마제국(Das Heilige Ro‥mische Reich Deutscher Nation)'이라 일컬어졌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제국'의 개념과는 다르다.
참고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흔히 '제3제국'이라고 하는데, 제1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이며 제2제국은 프로이센제국(독일제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당시의 유럽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행정조직'이라는 정치적인 유산과 정신적으로 가톨릭교회의 통일적 보편성이 작용하고 있었으며, 고대의 문화적 전통이 단절되지 않았다. 이상 세 가지의 요소에 마지막으로 게르만이라는 인적요소가 첨가되어 라틴·게르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세유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신으로의 절대적 귀의, 이슬람교 게르만족의 개종으로 서유럽과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그리고 서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그리스도교 문명권이 형성되었으나, 거대한 세력의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이슬람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7세기 전반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 마호메트가 나타나 반도를 통일하고 후계자인 역대 칼리프들은 정교일치의 거대한 사라센 제국을 탄생시켜 유럽세계는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이란의 사산 조(朝) 페르시아와 오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6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비단길'과 '바다길'이 거의 막혀버려 아시아에서 오는 상품은 아라비아 반도로 집중되었다. 자연히 그 중심지인 메카가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크게 번영하였고 이 지역에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를 창시하여 급속한 속도로 세계종교로 발전시킴으로써 현재는 33%의 크리스트교에 이어서 교세 랭킹 2위(17%)를 자랑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개조(開祖) 마호메트는 571년경, 한때 메카를 지배한 바가 있는 크라이슈 족의 하심가(家)에서 태어났다. 그가 12살 되는 해에 시리아의 대상에 끼어 상업으로 출세하려고 결심하였다. 성실했던 그는 호상(豪商)의 미망인 하디자(Khadijah)의 신임을 받아 대상무역(隊商貿易)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595년에는 15세나 연상인 하디자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마호메트가 40세가 되는 서기 610년,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슬람교이다. '이슬람'이란 아라비아말로 '신으로의 절대적 귀의'를 의미하는데, 당시 부와 권력이 대상인(大商人)에게 편중된 것이었기 때문에 마호메트의 '알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사회변혁을 통한 일종의 계급투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호메트의 일신교는 당시 특권계급이 믿고 있던 다신교를 부정했기 때문에 메카에서 메디나(현재의 야슬리브)로 추방을 당하였다. 서기 622년 7월 16일의 이 사건을 '헤지라'라고 하며 이것이 이슬람력(태음력)의 기원이 되었다. 마호메트는 탁월한 전술가였다. 메디나에서 통행세를 물지 않고 통과하려는 적의 대상을 습격하여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켜 추방된 지 8년 만에 메카에 무혈입성 하여 우상들을 끌어내려 파괴하였다. 마호메트는 이렇게 전 아라비아 반도에 세력을 확장하더니 631년에는 아랍인에 의한 최초의 반도통일을 이룸으로써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마호메트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종교인이었으며 동시에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을 '최후의 예언자'라 칭하면서, 사막에서의 전투를 지휘했다. 참고로 코란에는 27명의 예언자가 기록되어있다. 그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로는 아담과 에와의 아담, 노아의 방주의 노아, 유대교의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스도교의 예수의 이름이 올라 있다. 즉, 마호메트는 타종교의 모세, 예수도 자신 앞에 온 예언자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은 마지막으로 신의 가장 확실한 메시지를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존재임을 확신시켰다. 또한, 마호메트에게 알라의 존재를 계시한 천사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다. 이 천사는 유대교에도 등장하며,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렸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었던 신흥종교였다.
마호메트가 죽자, 마호메트의 후계자이며 신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칼리프가 선출되고 그들의 지도 아래 대 정복사업을 계속하였는데 이를 지하드[聖戰]라 한다. 21세기 현재, 지하드는 강경파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다. 물론 원초적 책임은 서방세계에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