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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심'이라는 유산 대물림 -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가문

임청각으로 대표되는 고성 이씨 석주 가문에서 500여 년이 넘게 벼슬에 나선 사람은 병조정랑을 지낸 이후영 한 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주 가문은 명문가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유는 교육을 중시하는 가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주의 큰아들 이준형은 독립운동의 와중에도 며느리에게 직접 공부를 시켰다. 이러한 가풍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자존심을 계승한 고성 이씨 가문은 오늘날의 후손들도 교육계에 종사하는 등 가문의 자긍심을 이어가고 있다.


*임청각 전경*

최효찬 | 경향신문 기자


"내 자식을 왜놈 종이 되게 할 수 없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다보면 사람의 욕심이 끝없음에 절망한다. 땅을 원하는 대로 차지할 수 있다는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하지만 욕심으로 인해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명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재산인가 자긍심인가. 과연 명가의 자존심은 수천억대의 재산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일까. 명가에서 가장 위대한 유산은 다름 아닌 자긍심이다. 아마도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버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만금을 상속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1858~1932) 가문은 서슬 퍼런 일제치하에서 일부 명문가 자녀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명가의 전통을 잇고자 할 때도 척박하고 살벌한 간도에서 민족의 고난을 함께 해왔다.

석주는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52세에 전 가족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 맹자는 시렁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었고, 나라를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석주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에 앞서 의성 김씨 가문으로 석주의 처남 김대락이 만삭 임부인 손녀손부를 포함해 가신들을 이끌고 1910년 12월 24일 고향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넜다. 의성 김씨는 일송 김동삼과 김대락의 아들 월송 김형식 등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명문가이다. 또 12월 30일 우당 이회영 6형제들도 전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이야말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명문가들이다. 석주는 1911년 1월 27일에 신의주에 도착하여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비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지었다.

旣奪我田宅(기탈아전택)
이미 내 논밭과 집 빼앗아 가고
復謀我妻努(복모아처노)
다시 내 아내와 자식을 해치려 하네
此頭寧可斫(차두녕가작)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此膝不可奴(차슬불가노)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

"내 아내와 자식을 왜놈 종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석주의 이 시 한 구절에서 올곧은 선비정신, 그 가족 사랑이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내 아내와 자식은 비단 석주의 처자만 뜻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민족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조를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후손들은 행복하지 않겠는가. 석주는 1910년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서간도 망명을 결심하고 사당에 나아가 이를 고하였다. 그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로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또 망명에 앞서 집안의 노비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고 방면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노비방면은 안동의 양반가에서는 흔치 않는 일이었다. 흔히 유림이라고 하면 보수주의자, 전통고수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석주와 같은 일부 혁신 유림세력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독립운동이나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으로 역할을 했다. 석주는 고성 이씨 17대 종손이며 임청각(1519년 건립된 것으로 보물 182호. 안동시 법흥리 20번지)의 소유주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주는 경제적 풍요와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실천적 지성이었다. 오히려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석주는 1932년에 미처 조국독립을 보지 못한 채 간도에서 사망하고 그 아들인 이준형 마저 1942년에 자결로 일제에 저항했다.

독립투쟁의 불씨당긴 '호모 노마드'
50대의 망명객 석주 이상룡은 근대 최초의 '노마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대로 삶의 터전인 안동 임청각을 홀연히 떠나 서간도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는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불안정한 삶을 선택해 망명객을 자초한 것이다. 망명지인 서간도에서조차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런 석주의 삶은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는 21세기 인간형으로 꼽히는 '호모 노마드'를 100년 앞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망명생활을 통해 보수적인 유림의 낡은 틀을 깨고 나와 혁신 유림으로 재탄생하면서 국난극복기에 변혁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지만,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인 '노마디즘'으로 개념화했다. 자크 아탈리도 그의 저서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오늘날 세계는 5억 명 이상이 이민자, 망명객, 이주노동자 등으로 노마디즘이 주류로 부상했다고 주장한다. 자크 아탈리는 "노마드는 인류 역사와 문화 전체를 역동적으로 창조한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석주 이상룡은 의병운동을 주도하면서 노마드적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전통 유림세력들이 자신의 고향에 안주하면서 정주민적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 때에 일제에 맞서 실천하는 지식인, 실천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진실은 앎의 차원이 아니라 바로 실천의 차원인 것이다. 앎 그 자체로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공론(空論) 혹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앓을 실천으로 바꿀 때 진실은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며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체구는 작았지만 호연지기 기상이 넘쳤던 석주는 한때 합천 가야산에서 의병활동을 했는데, 오합지졸과 다름없는 의병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독립운동 및 독립군기지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행한다. 이어 석주는 유교적 전통사상에서 깨어난 안동의 혁신유림들과 함께 근대적 민중계몽교육을 전개한다. 신교육을 주장하며 안동지방에서는 처음으로 현대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한다.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에는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건립하여 국내와 그 곳의 유능한 청년을 모아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무관교육과 민족운동의 전위가 된 인재의 양성인 것이었다. 석주가 서간도에서 독립운동과 함께 동포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교육계몽운동도 펴나갔던 것은 석주 선대로부터 대물림되어 내려 온 문필중시의 가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공부 시켜
임청각 사람들에게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공통적인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가 학문과 교육에 앞장서는 학풍이다. 석주가(家)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앞장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위기 때 호연지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다름 아닌 자녀교육의 전통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녀교육에 소홀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500여 년 동안 대대로 서첩과 문집을 내는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석주 가문은 안동에 정착한지 500여 년, 20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아간 이는 병조정랑을 지낸 이후영 단 한명에 불과했다. 이는 엄청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임청각은 안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명가에 속하지만,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른 이가 500년 동안 단 한명에 불과하고 관직도 높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중시하는 호연지기 가풍
석주가에는 아직도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가정교육 에피소드가 있다. 석주의 큰아들 이준형은 간도에서 독립운동의 와중에도 며느리에게 직접 공부를 시켰다. 출산 후 몸조리를 할 때를 이용해 며느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논어>와 <맹자> 등에서 뽑아 한문공부를 시켰다. 시부모가 며느리를 직접 교육하는 것은 집안의 오랜 가풍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 이준형의 아들 이병화는 한국전쟁 당시 충남 아산에 피신 중에도 스무 살 전후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글을 가르쳤다. 현재 중앙중학교 교장인 이범증은 이병화의 여섯 째 아들로 그때 부친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이범증 교장은 중학교를 마치고 진학을 못해 1년 동안 농사를 지을 때 모친에게 맹자를 배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임청각 종손들에게 교육은 첫 번째로 중요한 덕목이었다. 학문에 힘써온 전통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에 항거하면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문제가 집안의 제일 큰 과제였다.

이병화의 부친 이준형은 일제에 항거해 자결을 하면서 종손이 될 손자의 교육문제를 유언으로 남겼다. "종손의 학업은 비록 전답을 줄이고 재물을 쏟아 부을지라도 중도에 그만두지 말아라." 일제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며 온갖 압력을 행사해 종손이 중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막았다고 한다. 이병화의 장남 이도증은 안동에서 공부를 못해 결국 만주로 가 하얼빈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명문가의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산은 3대에 걸쳐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다고 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다음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문가를 만들고 유지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석주 이상룡과 그 자손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게을리하지 않은 게 바로 학문과 교육이었다.

둘째, 가문보다 국가를 위해 떨쳐 일어나는 호연지기 가풍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개인이나 가문의 안위보다 국가의 안위가 먼저였다. 임청각은 임란이 일어나기 73년 전인 1519년에 지어졌는데, 정유재란 때는 이곳에 주둔한 명군에게 군량미를 지원했고(선조는 공조참의 벼슬을 내림) 의병장으로 3부자가 전사한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의 부인이 바로 임청각의 딸이었다(고경명은 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임청각을 다녀가면서 이곳에 '제임청각(題臨淸閣)'이라는 시현판을 남겼다). 임란이후 수백 년을 지난 후에는 3대에 걸쳐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다. 석주는 서간도로 가기 전에 해인사 등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런 임청각의 기운을 말살하기 위해 훼손에 앞장섰다. 임청각의 일부 집을 허물어 중앙선 철길을 내 현재는 67칸만 남아 있다.

셋째, 재물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가풍이다. 임청각의 유품을 보면 서책이 유난히 많다. 또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유품들 가운데 벼루와 거문고 등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후손들은 이를 개인이 소장하지 않고 국가 등에 기증했다. 고려대 중앙도서관 '석주문고'에 기증되어있는 임청각의 서적들은 모두 395종 1309책에 이른다. 1973년에 기증할 당시 고려대 김상협 총장이 4천만 원을 보상하겠다고 하자 후손인 이범증은 등은 "조상의 정신적인 유산을 팔아먹을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당시에도 이범증은 단칸방에서 사는 등 어려운 형편이었다.

오늘날 다시 부활하는 석주의 집안
안 씨(顔氏) 가훈에서 말하듯이 후손에게 재물을 남기면 십년의 재산이 되는 반면에 지혜를 가르치면 백년의 재산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임청각 후손들은 선대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고난 속에서 현대사를 살아왔다. 직계 후손들은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이범증 형제 등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나 북한 등지에서 귀국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대들이 뿌려놓은 발자취는 결코 이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진 게 아니다. 후손들은 선대들의 고귀한 희생을 바탕으로 다시 우뚝 설 날이 오지 않을까.

소설 <토지>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은 자긍심을 먹고 사는 게 얼마나 인간적인 긍지를 지니는 삶인지를 역설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조찬하)의 의식 속에는 조 씨 가문을 묻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형, 그 인간성에 대한 증오감은 혈통에 대한 증오감으로, 나라를 강탈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 씨 가문의 치욕스러움은 혈통에 대한 열등감으로, 찬하는 가문을 묻어버리고 말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는 집안을 매장하고 만 것이다."

임청각의 교훈은 역설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아 해방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한 다른 어느 명문가보다 더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많이 물려준 것은 아닐까. 고성 이씨 대종가를 이끈 석주의 리더십은 한국적인 '유교적 리더십'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군사부일체의 전통적 덕목에 따라 석주는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가문의 보존을 뒤로한 채 오직 조국을 위해 리더십을 행사했다. 석주의 리더십은 단순히 전통지향적인 리더십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강제적이고 독단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지만, 가족의 구성원들은 그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석주를 이어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신산한 길을 걸은 데서 이를 증명한다. 독립운동 서훈자만 3대 9명에 이른다. 이렇게 볼 때 석주의 리더십은 또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가족 구성원에게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이라는 비전공유를 통해 동기부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몰입도를 높여 결과적으로 3대에 걸친 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다.명문가의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옛글을 인용하면서 3대에 걸친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다고 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다음 세대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문가를 만들고 유지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석주 이상룡과 그 자손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게을리하지 않은 게 바로 학문과 교육이었다.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배운 바를 실천하는 학행(學行)의 전통이 있었다.

임청각은 현재 전통문화체험장으로 개방돼 있다.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개설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 집안의 정기를 끊으려 마당에 철길을 냈다. 기차소리가 임청각을 뒤흔들지만 자녀들과 함께 하루쯤 묵으면서 자녀교육과 함께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임청각을 다녀간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방명록에 "이상룡 선생님의 애국정신을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또 종민이네 가족은 "먼 훗날 힘들고 어려울 때 지금의 이 시간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라며"라고 썼다.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훌륭한 자녀교육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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