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 간의 만남
사람들은 서로 간의 만남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관계를 통한 영향력이란 단시간 내에 그 결과를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결실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을 전제로 한 교육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다. 흔히 인용되듯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그런 지난한 인내와 계획의 여정 끝에 개인과 한 세대의 성숙된 인격이 형성되어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아이들을 위해 내일은 어떨지 몰라도 오늘 당장은 그 결과를 가늠하기 힘든 수많은 선택을 결정해 나가야하는 막막함이요, 그런 이유로 막연한 내일보다는 오늘의 가시적인 성과와 결실을 요구하는 학생, 학부형 그리고 그 압력과 유혹에 흔들리는 교사가 있을 수 있는 교육 현실이다. 2차 대전 직후의 프랑스의 어느 싸구려 기숙학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 <코러스>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문제아들의 '이름'을 깨달은 충격
아직 생생한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기숙학원의 아이들은 척박한 삶의 환경만큼이나 거칠고 제멋대로다. 이런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학교 측의 제1 지침은 이른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에 따라 말썽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사고와 처벌의 악순환이 만성화되어가는 학교에 새로 부임하게 된 교사 마티유(제라르 쥐노)는 쇠락한 학교,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교사들, 천방지축인 아이들의 모습이 곧 실패한 음악가인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전쟁과 같은 첫 날 수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마티유는 거의 기대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적어보게 했던 미래의 꿈에 관한 글들에서 작은 충격을 경험한다. 겉으로 보면 커다란 문제 덩어리처럼 보였던 아이들이 실은 나름대로 꿈과 소망을 간직한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관한 낯선 깨달음이었다.
이후 마티유는 어떻게든 아이들의 개성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학교 측과 다른 '반작용'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칠판에 자신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린 학생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려 공개적으로 망신을 줌으로서 놀림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한다든가, 야단맞은 보복으로 수위 아저씨를 다치게 한 학생으로 하여금 간호를 하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소모적인 처벌보다는 스스로의 행동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식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의 단초는 아이들이 대머리인 자신을 약 올리기 위해 지어 부르던 장난스런 노래를 접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교장 선생님이었다면 가혹한 처벌을 면하기 힘들었을 모욕적인 장난 속에서도 그는 가사를 지어내고 곡조를 붙이는 아이들의 창의성과 개성 있는 각각의 목소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내 합창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이후의 전개과정은 관객들이 이미 예측하고 있는 바와 같다. 우여곡절 끝에 훌륭한 합창단을 완성하고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난생 처음 인생에서 뭔가 멋지게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다시 깨달은 스승의 관심과 배려
이 지점에서 어떤 이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교육에 관련된 영화는 천편일률적으로 전형적인 패턴, 즉 문제아이들, 탁월한 교사의 출현, 아이들의 변화, 성공적인 교육의 완성이라는 수순을 밟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별 문제없는 아이들을 평범한 교사가 가르쳐 적당한 진학률에 이른다는, 또는 문제아들이 무관심한 학교에서 방치되어 자포자기에 이른다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화를 비롯한 예술의 판타지는 현실의 문제나 한계를 고민하는 교사를 비롯한 의식 있는 관객들에게 영화라는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을 통해 현실에서 상상하거나 시도해 보지 못한 다양한 가능성을 구체화해 봄으로써,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를 향한 매우 실질적인 자극과 통찰력, 지혜를 제공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런 자극은 겉으로 전형적으로 보이는 영화적 맥락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관점과 적용방식에 따라 다양한 삶의 모습처럼 다채로운 변화의 차별점으로 관객에게 다가서기 마련이다.
시작과 더불어 전형적인 교육영화의 맥락을 밟는 듯 보이던 영화 <코러스>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교사 마티유를 비롯한 아이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하여 차별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여느 영화에서의 선생님들과 달리 마티유는 자신의 교육 방식에 대해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때로 교장 선생님의 위압적인 태도를 어색하게 흉내내기도 하고, 처벌과 용납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감행하기도 하며, 문제아로 전학 온 몽당과 같은 거친 아이 앞에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언뜻 보기에 일관성이 결여된 듯 보이는 마티유의 모습은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몸부림으로 인해 도리어 영화 속 가공의 인물이 아닌 생생한 현실감을 지닌 사실적 인물로 공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 <코러스>의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기숙학원 학생이었으나 위대한 지휘자가 된 모항주(자크 페렝)가 정작 자신에게 그렇게 큰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마티유 선생의 이름조차 기억하고 있지 못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을 찾아 온 옛 친구가 전해준 스승의 손때 묻은 일기장을 읽어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인생에 있어 마티유 선생이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를 깨닫는다. 그렇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성장하여 성공한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스승인 누군가를 칭송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기억'보다는 '망각' 쪽에 가깝다. 종종 실패는 타인의 책임으로 전가되지만 성공의 결실은 제 스스로의 것인 양 착각하기 쉽다. 더구나 어린 시절 헌신적이었던 스승의 관심과 배려의 기억은 너무나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삶의 가치
하지만 영화 <코러스>는 이런 현실을 질타하기 보다는 오히려 담담히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교사의 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중요한 것은 훗날의 기억과 칭송이 아니라 무명의 단역배우일지언정 아이들의 인생의 무대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마티유 선생이 충실히 감당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아이들은 물론 교사 본인도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코러스>는 유럽에서의 엄청난 흥행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멋진 합창단을 만들었음에도 시샘어린 교장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파면된 마티유 선생이 결국 학교를 떠난다는 비극적 설정이 헐리우드식 행복한 결말에 익숙해 있는 국내 관객들에게 맞지 않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영화 <코러스>의 매력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손쉬운 행복한 결말을 택하기 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노력과 몸부림 때문에 도리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결말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소신 있는 삶의 가치로움을 역설한 점에 있다. 겉으로 실패한 듯 보이나 진정 성공한, 이름 없는 교사로서 학교를 떠나는 마티유의 머리 위로, 쏟아지듯 날아드는 아이들의 종이비행기 편지에 담긴 참된 감사와 축복의 소리 없는 외침이 빛나는 영화, <코러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