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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정씨 다산 정약용 가문

-실천적인 삶의 지침으로 위기 극복-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는 '가문주식회사' 경영에 실패하여 3대째에는 가문이 사라지게 된다. 반면에 형의 죽음과 본인의 유배로 폐족의 위기에 몰린 가문의 다산 정약용은 공격적인 위기관리를 통해 가문을 지켜낸다. 다산은 18년간의 유배생활동안 편지를 통해 두 아들에게 끊임없이 삶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두 아들이 당대의 유명한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준다. 때론 세속적이기도 했던 그의 실천적인 교육은 오늘날 더 유용한 가르침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효찬 | 자녀교육 컨설턴트,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저자


가정에도 필요한 위기관리 시스템
기업경영에서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때 세계적인 기업으로 위세를 떨친 기업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하는데, 위기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위기관리는 이제 하나의 제도로서 정착하고 있다. 담당부서도 핵심부서로 대우받는다. 이른바 위기관리전문가인 'CRO(Chief Risk Officer)'를 두고 있는 대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CRO는 기업이 직면하거나 직면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들을 파악해서 대처방안을 수립하는 업무를 담당하는데, 기업 안팎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어떤 변화나 결정이 미치는 영향을 파악해 위험 회피방안을 제시해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전위역할을 하는 것이다.

위기는 인간 개인의 육체적·정신적인 면에서부터 기업체나 사회, 국가에서도 발생한다. 특히 현대 사회는 급격한 변화가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 어느 시대보다 위기관리가 중요하지고 있다.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상이고 뜻밖에 위기에 봉착하더라도 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위기관리는 회사나 국가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정들도 위기를 맞았을 때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가정과 그 가정의 구성원들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흔히 자녀교육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적인 대문호인 괴테(1749~1832)가 회자된다. 다방면의 체계화된 과외로 세계적 대문호에 올랐는가 하면 당대에 귀족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괴테 가문은 할아버지가 여관업으로 재산을 많이 모았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프랑크푸르트 시(市)의 고문관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괴테만큼은 큰 인물, 큰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부친의 적극적인 교육에 힘입어 소년시절 괴테는 당대의 명문가들이 그랬듯이 최고의 가정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괴테는 문학과 예술, 종교, 외국어 등 다방면에 걸쳐 가정교사에게 배웠다. 부친의 자녀교육에 힘입어 괴테는 전방위적인 천재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괴테가 대문호가 되기까지는 자녀를 꼭 성공시켜야겠다는 목표의식을 가진 괴테 아버지의 적극적인 자녀교육에 힘입은 바 컸다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부모의 욕심이 자녀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시각으로 강요하다보면 아이는 부모의 욕망에 짓눌려 신음할 수도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괴테는 정작 자신의 아들 교육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괴테는 외아들 아우구스트에 대해 그의 부친이 했던 것처럼 과외를 시켰다. 하지만 아우구스트에게 아버지 괴테의 그늘은 너무나 짙었다. 아버지의 비서역할을 하며 수족처럼 지내며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려 했지만, 아버지를 뛰어넘을 만큼 문학적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41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자녀교육으로 가문의 위기 극복해
괴테의 원칙 없는 자녀교육으로 과잉보호가 꼽힌다. 괴테는 아들의 학습, 대학 진학, 취직, 여행, 군 입대 문제까지 직접 챙겼다. 심지어 전쟁 중에는 청탁을 통해 아들을 전투에서 빼돌리고 대신 후방에서 군수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도록 손을 썼다. 괴테 역시 이기적인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제대로 된 명문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지배계급의 도덕적 의무)'와는 거리가 멀다. 결국 괴테 가문은 손자 발터 볼프강으로 이어졌지만 더 이상 괴테의 유업을 잇지 못하고 모든 유산을 그를 후원했던 바이마르의 작센공국에 맡기는 것으로 가문을 닫아야 했다. 괴테는 가문의 영광을 잇기 위해 '괴테주식회사'의 CEO로 나섰지만 과잉보호와 함께 원칙 없는 자녀교육으로 실패한 CEO에 머물고 말았다. 괴테가는 세계적인 대문호를 탄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위기관리 측면에서 실패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괴테는 가문의 최고경영자로서 체계적으로 가문을 경영하지 못했고 후손들이 본받을만한 가풍을 대물림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자녀교육이 단지 눈앞의 출세 등 양지만을 추구해서는 누대의 명문가로 이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최고의 권력 실세들이 모두 명문가로 존립해오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누대의 명문가는 권력 그 이상의 가풍이 뒷받침 될 때에 가능함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가문주식회사 CEO의 지침, 즉 가훈이나 가풍 등이 추상같이 후손들에 의해 지켜질 때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괴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대문호로서의 업적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다. 다만 한 아버지로서 자녀교육을 어떻게 했고 또 가문을 어떻게 관리했느냐는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괴테가 가문주식회사의 위기관리를 제대로 못해 결국 3대째 문을 닫았다면, 괴테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가문의 CEO로서 위기관리에 성공한 케이스로 꼽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자신뿐만 아니라 둘째형(정약전)이 함께 유배를 당했다. 천주교도인 셋째형(정약종)은 그의 아들 하상과 매부인 이승훈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로 인해 다산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당시 19살, 16살이었던 다산의 아들 역시 이를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유배와 함께 대역죄인으로 몰려 참수당한 큰아버지의 죽음도 슬픈 일인데, 이제 과거시험까지 볼 수 없는 처지가 됐으니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대역죄인 집안의 자손은 국법에 따라 과거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산은 실학자답게 유배중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편지를 통한 서신교육에 나서면서 가문의 CEO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반드시 서울 10리 안에서 살아라
그렇다면 가문이 풍비박산당하는 위기상황에서 다산은 어떻게 자녀교육에 임했을까? 다산은 자녀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인 39살에서 57살까지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보내 아버지로서 자녀교육을 하지 못했다. 특히 다산은 자신의 선대에서 무려 8대째 홍문관 벼슬을 역임한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들이 줄줄이 천주교박해 사건에 휘말려 그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자녀들에게 편지로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면서 자녀교육에서 탁월한 아버지의 상(像)을 보여주었다. 유배된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그래서 다산이 활용한 것은 편지를 통한 자녀교육이었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위기를 극복하는 힘을 주면서 구체적으로 살아갈 방도를 편지를 통해 가르쳤다. 편지는 직접 대면하지 않아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게 되어 이전에 즐겨 쓰던 자녀교육법이다. 퇴계 이황이나 서애 류성룡도 아들과 손자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보내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다산은 먼저 자신의 귀양으로 위기에 처한 자녀들에게 '한양입성'이라는 특명을 내린다. 다산은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문명세계를 떠나지 말라'고 편지를 썼다. 박석무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와 그가 옮긴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에 따르면 다산은 48세 때인 1810년 유배지에서 쓴 편지에서 두 아들에게 '서울입성'을 당부한다. 다산은 "만약 벼슬길이 끊어져 버리면 빨리 서울에 붙어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산은 자신의 유배와 형들의 불행한 일로 인해 집안이 위기에 처하자 자녀들에게 '서울사수'라는 응급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서울을 떠나 산다는 것은 벼슬길이 막힌 상황에서는 가문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육환경이나 정보습득에서 시골보다 월등한 서울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은 재기의 기회조차 잃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서울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서울입성'을 주문한 것이다. 이는 가문의 CEO로서 다산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다산은 아버지로 인해 벼슬길이 막혀버린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단계적으로 서울살이의 방도를 들려준다.

그는 먼저 결코 서울 주변(수도권)을 떠나서는 안 되며, 가능하면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만,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십리 안에만 가히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당시 한양은 외국문물과 정보접근 등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시대에 뒤지지 않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울에 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자녀교육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안분지족이 아닌 공격적인 가문 경영
유배당한 처지에 있던 다산으로서는 '서울사수'라는 지침은 공격적인 가문 경영에 해당할 것이다. 자신의 유배를 비관하거나 혹은 '자손보호'를 명목으로 정치적으로 화를 당하지 않게 고향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 것을 권고했을 수도 있었지만 다산은 그렇지 않았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과거길이 막힌 폐족(廢族)의 신분이지만 학문마저 게을리 하면 더 비천한 가문으로 전락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과거를 볼 수 없더라도 학문을 통해 성인이나 문장가는 될 수 있다고 독려하는 편지를 보내고, '서울입성'을 당부했던 것이다. 요즘도 자녀들이 공부를 안 하면 흔히 "좋은 대학에 못가면 예쁜 신부나 돈 많은 신랑을 만날 수 없다"고 '협박'한다.

좋은 대학에 가면 반드시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이 같은 다소 '세속적'인 비유를 동원하면서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좋은 여자를 만난 수 없다"면서 그래서 더욱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더욱이 다산이 든 비유는 비약적이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혼인길이 막혀 비천한 집안과 결혼해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이 난다. 이래도 학문을 게을리 할 작정이냐." 다산은 아들이 벼슬길이 막힌 것을 비관해 행여나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자포자기할까 염려해 아들의 공부를 독촉했다.

유배된 처지에 있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직설적인 말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로 툭 터놓고 진솔하게 이야기할 때 더 설득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결국 다산은 아버지로서의 속내를 아들에게 다 털어놓고 만다. "과거에 응할 수 없게 됐다고 해서 스스로 꺾이지 말고 경전 읽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 글 읽는 사람의 종자까지 따라서 끊기게 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또 다산은 불우한 환경과 악조건에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자신을 일으켜 세운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두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이 중에서 다산 자신을 학문의 세계로 이끈 등대역할을 한 성호 이익(1681~1763)을 역경을 극복하고 큰 학자로 대성한 모델로 꼽았다.

즉, 다산은 성호 이익을 자신이 본받아야 할 '역할모델'로 삼은 것이다. 성호는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이하진의 귀양지인 평안 영산에서 태어났지만,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는 등 비운이 잇따랐다. 그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둘째형(이잠)마저 자신이 올린 상소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성호는 경제적 곤궁 속에서 학문에 뜻을 두고 실학자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다산은 자신이 학문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이익이 걸어간 학문의 길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다산이 자녀들에게 편지를 통해 훈계한 내용으로는 독서에 힘쓸 것, 재물은 나눠줄 것, 근(勤)과 검(儉) 두 글자를 유산으로 삼을 것 등이다.

아버지가 직접 교육에 앞장서야
다산의 자녀교육 열정은 요즘 부모들도 혀를 내 둘을 정도로 철저했다. 요즘에는 대부분 자녀교육을 위해 공무원들이나 회사원들이 서울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되면 서울에 자녀를 두고 '주말부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전에는 대부분 아버지의 근무지로 가족이 이사를 다니면서 관사나 사택에서 살았다. 다산의 경우도 한양을 떠나 공무원 생활을 할 때 가족을 데리고 다녔다. 다산이 36세 때에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부임했을 때에는 두 아들을 위해 두 수레나 가득히 책을 싣고 와 직접 '서향묵미각(書香墨味閣)'이라고 이름붙인 공부방을 직접 꾸며주면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서향묵미각이란 책의 향기와 먹의 맛이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는데 자녀들이 아버지의 정성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럼, 다산의 가르침을 받은 그 후손들은 어떻게 됐을까. 다산의 가르침대로 두 아들은 독서를 통해 세상을 읽는 눈을 기르면서 당대의 문장가로 우뚝 서게 된다. 과거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페족이어서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해도 성인이나 문장가가 될 수 있다"는 다산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학문을 닦았던 것이다. 장남인 학연(學淵, 1783~1859)은 당대에 이름을 떨친 시인이 되었다. 동생 학유(學游, 1786~1855)도 당대의 시인으로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다산은 18년 동안 긴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강진초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단 한 번도 좌절하지 않고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쳐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유배가 다산에게는 고통스런 삶이었지만 그는 <목민심서> 등 조선역사상 불후의 역작들을 쏟아냈던 것이다. 다산은 억울한 삶을 보냈고 기막힌 세월을 보냈지만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성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또 가문의 CEO로서 유배지에서도 위기관리에 직접 나서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다산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이유도 실천적인 삶의 지침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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