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가 세운 화실 '운림산방'의 전경.
최효찬 | 자녀교육 컨설턴트,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저자
유대인 자녀교육의 핵심은 모범
극성스러운 자녀교육 때문에 '유대인 엄마(Jewish Mom)'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에서 아버지가 주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먼저 자녀에게 모범을 보이고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가려 노력한다. 랍비 토케이어는 한가한 시간이면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데, 이제 겨우 다섯 살인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흉내를 내면서 '공부하는 척'을 한다고 한다. 아이는 서재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꺼낸 다음 의젓하게 앉아 페이지를 넘기면서 눈을 치켜뜨는 아버지의 폼을 흉내 낸다. 물론 아직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아버지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어린 그의 가슴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그의 정신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책 읽는 모습을 흉내 내면서 성장한 어린이 중에 세계적인 명사가 된 사람이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의 직위에까지 오른 헨리 키신저 박사이다. 그는 어렸을 때 매일 아버지와 함께 공부를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 루이는 독일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의 일가가 살던 아파트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닉슨의 중국방문 등을 일구어냈고 중동평화에 앞장서는 등의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키신저는 외교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 이면에는 19세기 유럽 외교사에 대한 그의 넓은 지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그를 깊은 학문 속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재능은 억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진도 운림산방의 소치 허련(1808~1893)에서 시작된 화계도(畵係圖)는 5대째 이어지고 있다. 소치에 이어 2대는 4남 미산 허형이 이었고 3대는 허형의 두 아들 남농 허건, 임인 허림으로, 4대는 허림의 아들 임전 허문으로, 5대는 남농의 손자 허진(전남대 미대 교수)과 4촌 간인 허은, 허청규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 허재, 허준, 허윤정, 허윤선 등 10여명이 줄줄이 예비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한 가문에서 한 사람의 인재를 키우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5대째 화계도를 이어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소치와 남농으로 대표되는 이 집안이 5대 200년에 걸쳐 30여명에 이르는 걸출한 화가를 배출하고 있는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냉정한 대물림'에 있었다. 아이가 부모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결코 대물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냉정한 대물림을 하지 않으면 결코 아버지의 벽을 넘어 더 나은 경지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남종화를 마지막으로 꽃피운 소치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제자로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될 때에도 그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그림을 좀 그린다 하면 추사 휘하에 들어갈 정도로 그의 명성은 절대적이었다. 소치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자 자칫 높은 파도에 밀려 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제주행 배에 올랐다. 추사와 소치의 목숨을 건 사제지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추사는 소치가 재능을 펼 수 있도록 당대의 권력자들을 소개해주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외척(영조의 장녀 화순옹주가 증조모)이자 고조부 김흥경이 영의정을 지낸 전통 명가의 후예다. 소치가 구현해낸 이상적인 화풍은 다름 아닌 추사가 추구했던 품격 있는 문인화인 남(종)화였다. 추사는 시·서·화가 일치하는 격조 높은 문인화를 원했는데, 이를 소치가 구현해냈다는 것이다. 소치는 42세 때에는 헌종 앞에서 어연(御硯, 임금이 쓰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영예를 얻으면서 화가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조선시대의 화가는 크게 '화원화가'와 '사대부화가'로 나뉜다. 화원화가는 직업화가로서 주로 왕실에 소속된 화가들이다. 사대부화가는 정치적 탄압이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이 막혔을 경우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양반출신들이다. 겸재 정선의 경우도 과거를 몇 번 보다 떨어져 결국 화가의 길을 걸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대부 화가들이 주로 그리는 그림이 문인화(남화)였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화단의 권력은 직업화가(왕실소속 화원화가)들에게 있지 않고 사대부화가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사대부화가들이 그리는 격조 높은 문인화가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반면 직업화가가 그리는 그림이 북(종)화였는데, 여기서 양반이나 사대부가 그리는 남화를 숭상하는 '상남폄북(尙男貶北)'의 풍토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고 한다.
상남폄북이란 남종화를 숭상하고 북종화를 배척하는 중국의 회화 이론으로 동기창(董其昌), 막시룡(莫是龍) 등이 제기한 남북종론(南北宗論)에 기초한다. 남북종론이란 역대의 화가들을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로 나누고, 그 작품을 각각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눈 것이다. 문인화가들이 그린 남종화는 고아하고 미적 가치가 높으며, 직업화가들이 그린 북종화는 천박하고 미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였다. 상남폄북론은 중국의 근·현대 회화사는 물론 한국의 회화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추사에 의해 자신의 이상적인 문인화를 그리는 화가로 신임을 받은 소치는 50세 때 귀향해 진도에 '운림산방'이라는 화실을 세웠다.
학문이 짧으면 붓을 들지 말라
이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후손들과 제자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남농과 의제에 의해 한국 남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된다. 소치는 4남을 두었는데 미산 허형이 그 뒤를 이었다. 시·서·화에 뛰어나 소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장남 허은은 18세에 요절했다. 소치는 이를 애석하게 여겨 허은에게 주었던 호(미산)를 막내아들 허형에게 물려주면서 대를 잇게 했다. 그러나 그림에 재능을 지녔던 미산은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끝에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소치는 장남에게만 그림 공부를 시키려고 하였다. 4남 중 막내인 미산은 서당에 가기가 싫어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나무를 해 날랐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산에서 나무나 하자, 소치는 글공부를 싫어하는 막내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글공부를 게을리 하면 결코 화가로 대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글공부가 싫었던 미산은 늘 아버지 몰래 사랑방에 숨어들어 형이 그림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들키고 말았다. 문순태가 쓴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에는 이에 대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산으로 쏘다니더니 이제는 네 형 그림 공부까지 방해하는구나!"
아버지의 호통은 대단했다.
"아버님, 아우의 그림 솜씨도 대단합니다. 얘, 아버님께 한번 보여드려라!"
미산의 맏형은 가끔 아우가 붓장난하는 것을 훔쳐보았으며 그 솜씨가 대단한 데 놀란 터라 아버지께 보이기를 권하였다.
"이깐 놈이 무슨!"
소치는 아예 미산을 무시해버렸다. 은근히 부아가 난 미산은 먹을 갈아 탐스러운 묵모란(墨牡丹) 한 그루를 그렸다. 소치는 아들의 솜씨에 놀랐다. 농담(濃淡)을 비끼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러나 소치는 아들의 솜씨를 칭찬해주기는커녕,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느냐?"
하고 꾸짖으며, 미산이 그린 묵모란을 꾸적꾸적해서 휙 던져버렸다.
미산이 그린 묵모란을 처음 본 소치는 붓 솜씨는 놀랍지만 결코 성가(成家)하지는 못할 것으로 헤아림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산의 글공부가 너무 얕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치의 예견대로 미산은 끝내 아버지가 바라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5대째 화통 잇는 5가지 비결
자칫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착이 강할 경우 가족의 정에 이끌려 분별력을 잃을 수 있지만, 소치가는 그렇지 않았다. 후계를 뽑는 대물림 과정은 핏줄의 정을 훨씬 뛰어넘는 엄격한 것이었다. 허진은 5대째 화가로 내려올 수 있었던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붓 재주 하나로는 결코 화가로 이름을 남길 생각을 말라. 우리나라 예체능교육의 문제점은 기능이나 기교 위주의 교육에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예체능에서도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을 중요시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화가나 음악가로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기교만 가지고 대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넓은 지식과 인성이 뒷받침될 때 예술의 거장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나라도 화가로 대성한 인물들을 보면 시·서·화의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에 고루 바탕을 두고 있었다. 소치의 후계자는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었기에 글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치는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자면 붓 재주보다는 사람의 됨됨이와 높은 학덕이 앞서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라. 허진은 법대를 목표로 공부하다 고1 때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미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그림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인 남농이나 그의 부친도 화가로서 대를 이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게 자신의 천직임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강요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던 것이다. 자신에게 잠재해 있는 '끼'를 느끼고 재능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허진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보이지 않은 힘'이 작용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고3 여름방학 때 목포에 내려가 할아버지 밑에서 사군자를 치며 처음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남농은 손자가 그림을 그려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반응이 없었다. 남농이 아무 말 없이 난을 하나 쳐주면 일주일이건 열흘이건 잘 그릴 때까지 그것만 그려야 했다. 할아버지는 늘 먹을 입에 달고 살 생각이 없으면 당장 그림을 그만두라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또 남농은 손자가 서울대 미대에 합격해도 손자에게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할아버지가 무척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 사후에야 친지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자만심을 경계해 손자에게 직접 칭찬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진도의 가난한 청년 소치가 조선 화단의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 사는 녹우당1)과의 인연과 함께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큰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다. 녹우당에서는 그림에 대한 기본지식을 공부할 수 있었고 초의선사는 또 추사에게 소치를 소개해주었던 것이다. 소치의 명성은 두 스승의 입을 통해 번져나갔고 마침내 임금(헌종)이 그를 불렀다. 허진은 "요즘도 가끔 소치 할아버지의 이런 행로를 따라 녹우당을 찾아 소치로부터 시작된 인연을 되새겨보곤 한다"고 말한다.
넷째,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운림산방의 최고 스승은 다름 아닌 가문 자체였다. 후손들은 소치, 남농 등 그 이름만으로도 존경이 우러나왔고 닮으려 노력했으며 뛰어넘기 위해 도전했다. 그래서 그들을 뒤쫓은 후손들은 가난마저도 대물림했다. 허진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남농의 대를 이으면서 남농의 묵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화의 경지를 열고 있다. 허진의 그림에는 고답적인 산수의 묵향보다 현실이 살아있는 에너지가 묵향보다 더 강렬하게 전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형편이 어렵더라도 항상 베풀며 살아라. 인연의 소중함 때문에 남농 생전의 목포집은 이 고향의 사랑방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허진에 따르면 할아버지 화실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린 시절 사촌들과 함께 놀다가 화실에 가보면 커다란 책상을 놓고 작업하시는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무릎 꿇고 먹을 가는 제자들, 바둑 두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등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풍속화를 보는 듯 했다고 한다.
집안의 명성에 기대지 않는 노력
남농의 며느리이자 허진의 어머니 역시 생전에 베푸는 삶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허진의 어머니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기꺼이 베풀었다고 한다. 허진의 친구들도 "어머니 때문에 허진을 미워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어머니는 늘 '인사를 잘해라', '겸손할 줄 알아라'를 반복해서 들려주셨어요. 특히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성적으로 남에게 항상 베풀기를 즐겼습니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가면 어머니는 항상 진수성찬을 마련해 친구들을 대접해주곤 하셨어요. 제 친구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허진의 모친은 자녀교육에 정성을 기울여 미술계에서는 모범적인 자녀교육을 한 어머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화관광부가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1999)'을 수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허진의 어머니는 생전에 허진에게 엄격한 교육을 했다. 특히 허진에게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노력을 하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었다. 혹 허진이 할아버지인 남농의 명성에 의지해 자기계발에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언은 허진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허진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인정받기 전에는 결코 남농의 손자임을 내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허진은 문화관광부장관이 수여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으면서 어머니의 은혜에 답했다. 이에 앞서 남농이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1976)했는데, 이로써 3대에 걸쳐 정부로부터 상을 받은 것이다. 소치가는 그림 재주 하나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소치는 재능 하나만으로는 결코 대가의 경지에 오를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치가 "학문이 얕으면 절대로 붓을 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붓끝 하나의 재능으로는 화가로 우뚝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 부모들은 자녀의 성공을 위해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인 것이다. 소치 가문에서는 이러한 얕은꾀가 결코 통하지 않았다. 소치가가 5대째 화가를 배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화가가 되기에 앞서 인간이 되고, 학문에 힘쓰도록 가르친 철저한 인성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