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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戰運) 감도는 유럽과 이슬람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이슬람과 서구 그리스도교의 문명충돌이라 보는 시각이 크게 대두되었다.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고 교황권의 강화와 교세의 확장에 따라 유럽과 서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한편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나타나 반도를 통일하고 그의 후계자인 역대 칼리프들은 정교일치의 거대한 사라센 제국을 탄생시켜 유럽세계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daum.cafe.net/parque)


거대한 군사종교세력의 등장
이슬람교의 창시자는 물론 마호메트이다. 그가 탁월한 종교적,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아라비아 전체를 통일하고 그의 후계자들이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거대한 사라센 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가 그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이란의 사산 조(朝) 페르시아와 오랜 싸움을 계속하는 바람에 6세기 후반에 들어와 '비단길'과 '바다길'이 거의 막혀 아시아에서 오는 상품이 아라비아 반도로 집중될 수밖에 없없다. 자연히 그 중심지인 메카가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크게 번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호메트는 610년에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이란 아라비아말로 '신으로의 절대적 귀의'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부와 권력이 대상인(大商人)에게 편중된 것이었기 때문에 마호메트의 '알라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사회변혁을 통한 일종의 계급투쟁이었기 때문에 결국 메카에서 메디나(현재의 야슬리브)로 추방을 당하였다. 서기 622년 7월 16일의 이 사건을 '헤지라'라고 하며, 이것이 이슬람력(태음력)의 기원이다. 마호메트 사후, 이슬람은 마호메트의 후계자이며 신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하고 그들의 지도하에서 대 정복사업을 하였는데 이를 지하드[聖戰]라 한다. 이슬람은 정복사업을 통해 급속한 속도로 세계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상권 확대를 위한 정복전쟁
이슬람 군대가 동방에서 이란의 사산 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서방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인 이집트와 시리아를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인 지하드의 막이 올랐다. 한편 제4대 칼리프인 알리가 내분으로 암살을 당하니 서기 661년 무아위야(Muawiya)가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인도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땅을 정복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암살을 계기로 이슬람 세계는 크게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되어 두 종파 사이의 갈등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자손만이 마호메트의 후계자로서의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반면에, 수니파는 이슬람교의 신도 누구나 자격만 갖추면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복사업 이면에는 포교보다는 경제적 이익확대, 다시 말해서 상권 확대가 가장 큰 관심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마호메트 시대의 아라비아 반도는 척박한 불모의 땅이었고, 북부를 지나는 풍요로운 실크로드 지역은 그리스도교의 비잔틴 제국과 조로아스터교의 사산 조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어 아랍상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하려면 통행세 또는 높은 세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아라비아를 통일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하면 화도 나고 지금까지 바친 세금이 아까워지기 시작하였다. 자기들이 직접 무력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지배하면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통행세라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권 확대를 위한 정복사업 결과, 이슬람은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의 통치 하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원주민을 해방시키는 존재가 되었으나 반면에 그 땅에 군림하고 있었던 그리스도교를 배척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나중에 십자군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8세기 전반에 이슬람 제국(사라센 제국)은 광대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이슬람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에 역대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들은 이슬람으로부터의 국토회복 전쟁에 매달려야 했다.

이슬람 제국의 갈등과 분열
이슬람교는 아랍인에서 시작하여 조로아스터교의 이란인을 개종시키더니 투르크인(터키인) 등 많은 민족으로 확산되어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고 중세의 문명을 이끌어 나갔다. 661년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왕국은 근 1세기 동안 세습적으로 칼리프를 계승하면서 활발한 통상과 문화적 융성시대를 맞이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인도에서 이베리아 반도까지 이슬람의 영향권 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반대파가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마호메트 가문이 가장 불만이 많았다(암살당한 알리는 마호메트의 사위).

그들은 남 이라크를 거점으로 하여 마호메트의 조카인 아바스의 혈통을 이은 아바스가 중심이 되어 8세기 중반에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웠다. 또한 수도를 바빌론이 융성하였던 메소포타미아에 '평안의 도읍지'라는 뜻인 바그다드로 옮기고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로 키워가면서 약 75년간에 걸쳐서 크게 번창하였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설화와 민담을 모은 아라비안나이트(아라비아 야화)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는 역대 칼리프 가운데 가장 걸출한 군주였다. 아무튼 당시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였고 사라센 대제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의 중동패권주의와도 연관이 있다. 비록 지금은 미군의 포로가 되어 재판을 받는 신세지만….

8세기 초에 우마이야 왕조는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인도 북서부까지 그들의 영향권 내에 두었다. 732년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의 게르만 국가인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속 북상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을 침략하였으나 메로빙가의 궁재였던 샤를 마르텔에 의해서 격퇴되고 말았다. 패배한 이슬람군은 피레네 산맥의 남쪽으로 후퇴하였지만 서유럽의 세계는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아직 유럽 국가의 틀이 잡히지 않은데다가 프랑크 왕국도 국가로서의 틀이 완전히 여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우마이야 왕조가 망하고 아바스 왕조로 교체되자,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었던 잔존세력들은 코르도바 칼리프국을 세우고 이집트에는 카이로 칼리프국이 성립되어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의 후예인 파티마 왕조가 통치하였다. 한편 바그다드에 있었던 아바스 왕조도 10세기에서 11세기 중반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아랍인들은 11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온 셀주크 투르크인에 의해서 페르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지배주체만 바뀌었을 뿐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일정한 토지세와 인두세를 부과하였다. 설령 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더라도 면제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코란이냐, 칼이냐' 즉 '이슬람교를 믿지 않으면 죽는다'고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 왜곡 과장된 말이다. 이슬람 군대가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서방 그리스교 국가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한 말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 다시 말해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신도들도 다 같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대우를 받아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기반으로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을 한 이란 민족(페르시아)은 '세금도 내고 개종도 했는데 그럼 우린 뭐냐'면서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란인들의 불평불만을 선동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세력이 다름 아닌 우마이야 왕조에 비판적인 집단이었다. 특히 마호메트의 조카인 아바스의 혈통을 이은 아바스가(家)가 정권을 탈취하여 아바스 왕조가 세워졌는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었던 우마이야 왕조의 잔존세력들은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는 후(後)우마이야 조를 세움에 따라 756년 이슬람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새로운 지배자, 셀주크 투르크족
서기 751년에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바스 왕조의 군대가 중앙아시아의 탈라스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이 때 포로로 잡힌 당나라 병사 가운데 제지술(製紙術)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곧 사마르칸트에 연행되어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었다. 중국으로부터 배운 제지기술은 훗날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서양인들도 동양의 선진문명에 감탄하여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쪽 땅을 동경하게 되어 이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이후 동양과의 교역에 더욱 열을 올리는 요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리상의 대발견과 대항해시대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아바스 왕조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0세기에 들어와 이집트는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의 후예가 통치하였는데 파티마 왕조는 수도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신도시 카이로로 옮김으로써 오늘날 이집트 공화국의 수도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기 946년에 이르자 이란의 시아파 군사정권인 부와이흐 조가 동 칼리프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아라비아인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정교일치의 대권을 넘겨받았다.

이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옛 조국(사산 조 페르시아)을 멸망시킨 이슬람 세력에게 조상대대로 믿어오던 신앙(조로아스터교)까지 버리면서 개종했지만 찬밥신세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는 불만이 쌓여있던 터라 아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서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 이슬람인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기존 아랍인 칼리프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겨 두었다. 하지만 이란인 정권(부와이흐 조)도 11세기 중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바그다드를 지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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