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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몽골에 갔었다. 남(南) 고비 사막의 대평원을 가서, 몽골 원주민들의 전통 주거인 겔(GER)에서 머물렀다. 겔은 중국식 이름으로는 ‘파오’라고 불린다. 원통형 본채에 원추형 지붕으로 된 몽골 유목민의 전통 가옥이다. 겔에서 지내다보니 어린 시절 살던 초가집 생각이 난다. 자연 그 자체를 두르고 살았던 점에서 겔과 초가집은 통한다.

몽골 평원의 대자연은 외경스러웠다. 우러러보면 밤하늘에는 살찐 별들이 보석 밭을 이루고 있었다. 별들은 제 광채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대지에 총총 쏟아져 내릴 듯 했다. 다음 날에는 저물 무렵 대평원의 아득한 지평 저쪽으로 거대한 비구름의 기둥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았다. 땅과 하늘을 수직으로 잇는 거대한 구름 기둥이 서서히 옮아간다. 백리 밖 비 내리는 모습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장관이다. 어둠이 내리자 구름 속에서 번개가 쳤다. 그러자 구름 기둥은 이내 장엄한 불기둥이 되었다. 먼 천둥소리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소년처럼 감흥이 일었다. 나의 감관이 경험한 대자연이 너무 황홀하였다. 주체하기 어려웠다. 보들레르의 말이었던가. ‘자연은 하나의 신전(神殿)이다.’는 말이 실감났다. 겔(GER) 안으로 들어 와 나는 엽서를 썼다. 젊은 한 시절 같은 직장에서 친했지만 어느새 무심하게 된 친구에게 엽서를 썼다. 자주 대하지만 이미 황홀한 대화가 증발된 일상의 친구들에게도 엽서를 썼다. 이럴 때 편지쓰기는 주체할 수 없는 진실의 황홀경을 나의 일상 속으로 잡아두는 과정이다.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먼 곳에서 편지쓰기’만한 것이 또 있을까. 겔의 지붕 위로 어느새 가느단 빗방울 소리가 듣는다.

사춘기 어느 해 가을, 가슴 설레며 그 누구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의 마음을 어렵사리 한 장의 편지로 담으며, 그런 마음조차도 차마 부끄러워, 내 감정을 직접은 토로하지 못하고, 내 마음을 남의 시에 의탁하여 전하고자, 온갖 시집을 다 뒤져, 정지용선생의 시 하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 정성스레 이 시를 적어 넣었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내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사람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샛별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그대는)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그대는)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그대는)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 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며지며

구비 구비 돌아나간 시름의 황혼 길 위
나는 바다 이 편에 남겨진
그의 반임을 고히 지니고 걷노라. (정지용, ‘그의 반’ 1935)


연애편지 쓰기는, 학교가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활동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개인이 경험하는 총체를 교육과정으로 보는 경험주의 교육철학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교육과정이다. 쓰는 동안, 나의 모든 지식이 순종하고, 나의 모든 열정이 다 무릎 꿇고, 나의 모든 감정이 길들여지는, 그리고 나의 모든 도덕이 아름답게 자극받는, 그런 총체적 경험의 마당이 곧 연애편지 쓰기의 마당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메아리 없는 편지이기 십상이다. 상대의 무심함에 쓰린 상처를 감내하며, 세상에 대한 면역을 키우던 첫 계절이 연애편지 쓰던 학창시절 아니었던가.

휴대폰이니 채팅이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면서, 속 깊고 은근한 편지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사람들 가슴의 진정성도 사라져 버렸다. 그 진정성 때문에 아름답기까지 하던 사람들의 부끄러움도 사라져 버렸다. 요즘의 사귐과 사랑은 그저 무수한 휴대폰의 수다와 부질없는 감정 확인으로, 쉽사리 이합집산(離合集散)한다. 도처에 소통이 과잉이지만, 오히려 진정한 소통은 빈곤해지는, 이 ‘가벼움의 시대’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소외(疏外)가 걸려 있다.

말없이 전해 받고 오래도록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던 편지글의 여운과 감촉을 추억해 보자. 우리들은 안다. 드러내자니 부끄럽고 안으로 감추어 두자니 안타깝기 그지없던 ‘진정한 내 마음’이 마지막 인내하는 그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침내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편지는 그런 웅숭 깊은 삶의 맛을 우러나게 한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펜팔(pen pal)’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모던(modern)하고 매력 있게 들리는 말이었던가. 1970년대 당시 유명한 <학원> 잡지나, 농촌 계몽용 <농원> 잡지, 대중잡지 등에는 펜팔 난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실제로 펜팔을 하는 친구들을 발견할 때면 부럽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펜팔에는 늘 전설이 따라 다녔다. 내용은 이러하다. 참으로 순정하고 순진하여 오히려 통속성이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어떤 청년이 마음 고운 아가씨와 펜팔을 하였다. 얼굴도 모른 채 여러 해를 펜팔로 사귀며 그 고운 마음씨와 성격에 깊은 흠모의 정을 쏟아 장래를 약속하자고 하게까지 되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상대 아가씨로부터 자기를 이제 그만 잊어달라는 편지가 왔다. 그 간 자기에게 사랑과 정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왔더란다. 그런데 자기를 잊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이 너무 당혹스러워 그 아가씨의 펜팔 주소지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 아가씨의 마을에 가서 알아보니 그 아가씨는 신체마비로 운신이 어려운 몸이었다는데,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유서에는 한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의 청춘은 행복했었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펜팔이란 것이 더 멋있고 고상해 보였다. 생각하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으로 삭막한 일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 앞에서도 고상한 감동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야기의 상투성을 먼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황홀한 정서를 담은 편지를 쓰기란 점점 어려운 일인가.

편지쓰기가 가지는 원형의 이미지 가운데는 진정성의 이미지가 스며 있다. 편지는 전화로 불쑥 하는 말과는 다르다. 격을 갖추는 글이어야 한다는 데서 오랜 생각의 축적과 시간의 준비를 요한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심사숙고’의 과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가 그 누구를 향하여 심사숙고한다는 것이 주는 진정성, 누군가 나를 향하여 자신의 감정과 정신 전체를 모아 심사숙고해 준다는 것, 이것이 편지쓰기의 숨어 있는 메커니즘이다.

누구나 사춘기 시절, 마음에 살아 있는 편지 한 장이 있을 것이다. 심각한 오해의 끝자락에서 친구가 보내오던 편지 한 장, 세상과의 불화를 온통 혼자 걸머진 듯 저항의 표정으로 길을 떠나며 불쑥 던져 놓던 편지 한 장, 토스토에프스키의 무거운 독서에 심취하며 온갖 지적 허영과 오만으로 난해한 의식에 스스로를 분열시키던 편지 한 장, 밤이 하얗게 새도록 갈증 속에서 사랑의 마음을 써 놓고는 마침내 아침에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 우리는 편지쓰기의 공간을 통해서 모순의 현실에 대한 고뇌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그 고뇌를 통해서 우리의 생을 성숙시킨다.

그런 편지를 떠올리노라면 지금도 감회가 아득하게 어리어 온다. 진정을 다하는 편지의 언어는 늘 미더웠고 관용이 넘쳤다. 눈앞에 현존(現存)하지 않는 상대를 향하여 마음의 눈으로 끝없는 응시를 함으로써 비로소 얻어내는 한 구절의 메시지! 아,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에 대한 믿음’과 통하는 것이었다. 한 세대 전만해도 그렇게 모던(modern)해 보이던 ‘펜팔’이란 말이 이제는 구시대의 문화 유물처럼 되어간다. ‘일선에 계신 국군 아저씨들에게’ 쓰는 그 형식적인 편지쓰기마저도 이제는 사라졌다. 새로운 의사소통의 습관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겠지만, 편지 문화의 한 가운데서 우정과 사랑을 쌓았던 우리들에게는 아쉬운 감회가 아니 일어날 수 없다.

기성의 세대라면 누구에게나 가슴 아린 옛 편지의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못 보낸 편지들을 정갈하게 다시 써 봄이 어떠하겠는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보내지 못한 마음의 편지들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너무 소중해서, 내 마음의 풍경이 오묘해서, 그 밖에도 내 안의 모순을 감당하지 못해서 보내지 못한 편지들을 이 가을에 어찌 할 것인가. 세월이 곰삭을수록 옛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왜 그런 노래도 있지 않던가.

나의 몽골 여행은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었으므로, 몽골 대평원에서 쓴 편지보다 내가 먼저 귀국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슴지 않고 몽골에서 그 편지들을 부쳤다. 나의 감회가 황홀하였고, 그것을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소중하였으므로, 시간 형편에 상관하지 않고 나는 몽골에서 그 편지들을 부쳤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가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편지보다 내가 한국에 먼저 돌아갈 텐데. 뭐.’ 이 고정관념이 편지쓰기를 방해한다. 한국에 먼저 돌아오는 것과 편지를 부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같은 공간에 같이 있어도 황홀경의 소통은커녕 대화 한 마디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의 면모이다. 하기야 진정성이 촌스러워 보인다는, 잘난 현대인들도 없지 않은 세태이니까. 귀국하여 여러 날이 지났을 때, 나의 수신인들은 편지 받은 즐거움을 내게 반갑게 전해 주었다. 그 전언들로 인하여 나는 몽골에서의 편지쓰기보다 더 황홀한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무슨 아날로그 원조(元祖)같은 육필 엽서를 받다니.”
“무슨 과거로부터 받은 편지 같아서 충격이 참신했다네.”

얼굴 못 본 지가 족히 2년도 넘은, 후덕하고 마음씨 좋은, 나의 옛날 직장 친구, K여사는 이렇게 말한다.

“몽골서 보낸 엽서 받으니, 뭐랄까, 하여튼 내 일상이 확 깨어나더라. 마치 늘 무덤덤하게 지내던 이웃집 총각에게 느닷없이 프로포즈라도 받는 듯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 분위기 한 사흘은 가더라. 고맙다. 난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들 일상이란 것이 참 빤한 것인가 봐.”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옛날 노래 가사가 와 닿는다. 순진하여 통속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으리라. 그냥 영악하다는 평판에 갇히는 것보다야 낫겠다. 또 통속적이어서 순진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이 깊어가는 가을에 조용히 스스로에게 권유해 보기로 하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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