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 남북조 시대에 중국의 혼란을 틈타 한반도 삼국은 고대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중국과의 교류(백제), 또는 영토회복 운동(고구려)을 벌였다. 581년 중국에서는 양견(楊堅)이 수나라를 세운다. 이후 만주와 요동을 장악하여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고구려와 이제 막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한판승부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현대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은 국내 통일전쟁이라 강변하고 있다.
충돌할 수밖에 없는 두 세력 문제(文帝)는 북주(北周)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수(隋)로 삼았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국호였다. 서기 589년 문제는 마지막 남조 국가인 진(陳)을 멸망시키고 무려 370년 만에 중국을 재통일했으나,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진나라의 시황제와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문제는 짧은 기간에 통일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는데 주력하여 관료의 등용문인 과거제를 비롯하여 본격적인 율령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 중국에서 과거제도는 청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약 1300년 간 지속되었다.
604년 양제(煬帝)도 부황(문제)의 국가건설 의욕을 그대로 이어받아 대규모 건설 사업을 강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전체 길이 1800㎞에 달하는 대운하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토목사업이었다. 610년에 완공된 대운하 덕분에 중국에서는 물류혁명이 일어났다. 즉, 항저우[杭州]에서 베이징[北京]까지 선박수송이 가능해졌으며 강남의 풍부한 쌀을 비롯한 곡물을 화북지방까지 수송할 수 있어 중국을 명실상부한 통일국가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들의 고통을 수반하므로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공사장에 나가서 노역을 해야지,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모두 양제를 비난하여 결국 수나라를 단명에 그치게 하고 정작 이익은 당나라가 보았다.
대운하를 건설하는 양제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왜냐하면 동북방민족(한민족과 같은 계열)이 중국의 분열시대에 힘을 쌓아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나라도 전신이 같은 계열인 북주가 아닌가! 한 무제 이후 역대 중국 정권은 토벌작전과 동화정책으로 흉노는 사라졌으나 그 대신 돌궐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황인 문제는 고단수 이간책을 써서 돌궐족을 동 돌궐과 서 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켜 놓았지만 이번에는 소수림왕 이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영토 확장으로 동북아시아 강대국으로 떠오른 고구려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양제는 위기감을 느꼈다. 고구려가 수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 서진하여 중국을 도모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다. 더욱이 문제 때에도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혼쭐이 난 바 있었으므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생각했는지, 결코 만만치 않는 고구려를 상대로 무모한 군사도발을 감행하였다.
무모하게 끝난 양제의 도전 양제는 나름대로 정복 시나리오를 짰다. 즉, 대군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되, 만약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되면 대운하를 통해서 원정군의 보급을 확보하여 지속적인 작전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대륙과 해상을 봉쇄하여 고구려를 말려 죽이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대운하를 너무 믿었다. 611년 양제는 무모한 군사도발을 감행하였다. 중국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전쟁에 나섰으나 고구려도 이미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하면 그 다음 순서는 이민족 정리였기 때문이다.
양제는 고구려가 곧 무너질 줄 알았지만, 처음부터 무리였다. 엄청난 병력의 수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중심으로 치밀한 작전을 세워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고구려의 전략은 첫째, 대규모의 군대를 맞이해서 정면승부를 건다는 것은 무모하니 성을 중심으로 수비에 들어가서 적과 말을 배고프게 만들고 둘째, 시간이 갈수록 적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적의 염탐꾼에게 아군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히 유의하며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을 적절히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작전계획은 들어맞았다. 양제가 몸소 친정을 하여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략했으나 4개월이 넘도록 함락하지 못하고 들판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야 했다. 초조해진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병력 30만을 내어주면서 평양을 신속하게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우중문 군대 이외에 수나라 병사들은 수륙양면으로 평양을 공격하는데, 손발이 맞지 않아 수군이 단독으로 공격하다가 나중에 영류왕이 되는 건무에게 전멸을 당하다시피 하였다. 수나라 육군은 당황하였다. 평양에 먼저 도착한 수나라 군대가 보급물자를 받을 수 없는 난감한 입장에 빠진 것이다. 적을 눈앞에 두고 수나라 병사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을지문덕 장군의 차례다. 아무리 적군의 숫자가 줄었어도 대군은 대군이다. 그는 우중문의 군대를 상대로 전선을 축소하는 작전을 썼다. 넓은 들판에서 싸우면 적군에게 포위되기 십상이지만 협곡 등 좁은 장소에서 싸우면 아무리 대군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앞뒤가 생기기 마련이다. 넓은 장소에 많은 사람을 풀어놓으면 '옆으로 나란히'가 가능하여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좁은 곳에서는 '앞으로 나란히'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제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차례차례 맞서 싸우면 된다.
을지문덕은 적의 대군을 유인하여 치고 빠지면서 심리적으로 지치게 만들고 길목마다 병사들을 매복시키는 한편, 백성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양식을 감추고 우물까지 메워버렸다. 흥분한 우중문은 숨을 몰아쉬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여 을지문덕을 추격하였으나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중문의 퇴각명령과 함께 을지문덕의 공격명령이 동시에 내려졌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리며 전투다운 전투를 못해 스트레스가 쌓은 고구려군은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대군을 몰살시켜 버렸다.
왕조는 바뀌어도 고구려만은 양제의 도전정신은 대단했다. 그 뒤로도 두 차례의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백성들의 반응이 냉담했다. '정말 속없는 황상폐하, 못 말리는 황제폐하, 언제나 철이 드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운하 건설에 불만이었던 백성들은 무모한 전쟁준비에 반기를 들고 말았다. '사지(死地)에 들어가 고구려군의 칼에 맞아 죽거나 물귀신이 되기보다는 폭군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죽더라도 죽자'면서 '양현감(楊玄感)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618년 양제로부터 모반의 위험인물로 몰려서 지방으로 쫓겨났던 이연(李淵)이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여 당나라를 세웠다. 시황제의 진나라보다는 조금 나아도 명이 짧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나라를 보면 '죽 쑤어서 개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당 고조 이연은 수나라의 제도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문제와 양제가 나라의 기초를 너무 잘 정비해준 덕분에 손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당 시대'가 여러 면에서 '진·한 시대'와 비슷하지만 성격은 크게 다르다. 오늘날의 국가적 의미는 수·당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한 시대에는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었지만, 수·당 제국은 율령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율령은 오늘날의 모법, 즉 헌법에 해당되며 북조시대에 싹이 터서 수나라를 거치면서 당나라에 이르러 통치의 근간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했던 것이다.
정관(貞觀)은 당 태종의 연호이다. 그가 통치한 23년을 역사에서는 '정관의 치(貞觀의 治)'라 하며 당나라의 번영을 표현하고 있는데, 당 태종은 내치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당의 세력판도를 크게 넓히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나쁜 인연을 맺었다. 당이 건국되자 고조(高祖)는 백성들의 여론을 감안하여 고구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냈으며 고구려 역시 당나라와 싸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 포로도 교환하고 이때 당으로부터 도교가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태종이 제위에 오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국내정치가 안정되자 고구려에 대해서 압력을 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바람에 고구려가 반발하였고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요동지방에 천리장성을 쌓는 등 철통같은 경계태세로 맞섰다. 이때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과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북수남진(北守南進)을 대외정책으로 삼았다. 이는 북으로 당나라와 평화를 유지하고(北守), 남으로는 신라를 친다(南進)는 정책이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서기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당에 대해서 강경책을 썼던 것인데 당 태종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임금(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패배 이후 장기 전략으로 전환 서기 644년 당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는 요동성을 공략하여 고전 끝에 함락에 성공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지휘 하에 고구려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목숨을 건 총력전을 전개하는 바람에 두 달간의 공격을 포기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그 후 두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그때마다 고구려에 의해서 격퇴당하는 수모 때문에 당 태종은 깊은 마음의 병을 얻어 서기 649년 '고구려'라는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 태종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에 대한 당의 전략이 수정되어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버리고 장기전의 우회공격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당은 고구려의 남쪽 백제를 먼저 치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북수남진(北守南進) 정책에다 백제의 측면공격으로 신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당에 접근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나·당 연합군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포괄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 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7세기에 이르러 한반도의 상황은 복잡한 삼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수 양제나 당 태종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한반도의 허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세기를 기준으로 이미 삼국은 전쟁과 평화, 동맹과 적대 관계를 복잡하게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의 통일제국으로서 삼분된 한반도를 공략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을 것이며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정리를 해야 한다는 절실한 시대적 요청도 작용했을 것이다.
7세기에 벌어졌던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종전의 산발적인 전투가 아닌 삼국의 총력전에 당나라와 왜국(일본)까지 개입된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고 결국 신라의 불완전한 승리로 삼국시대가 마감되었다. 요동과 만주, 한반도를 잇는 옛 조선(고조선), 그리고 조선의 실지회복을 국시로 삼았던 고구려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된 한민족의 역사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전제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현재도 민족의 역량을 모아 선조의 영광을 되살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