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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서양의 거듭나기

교회의 강력한 권한과 영주의 영토 지배로 대표되던 봉건사회의 모습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국가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영주의 노예 신분이나 다름없던 농민들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시작된다. 시민의식의 성장과 경제체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교회는 차츰 힘을 잃고 개혁의 요구를 받게 된다. 또 흑사병의 창궐과 종교재판의 미명하에 벌어진 탄압은 개혁의 속도를 앞당기는 촉매제가 된다.

박경민 | 역사 컬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교회가 중세인의 모든 것을 제어하던 유럽사회도 도시의 발달과 함께 근대를 향한 허물벗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봉건군주들이 교황권을 배제하는 왕령국가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후 중세 유럽사회를 받쳐주고 있었던 양대 지주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봉건제가 무너지고 농민반란이 이어졌다.

거듭된 수난으로 약해져가는 교황
성직임명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카노사의 항복'을 받아내고 교회개혁에 앞장을 섰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불행한 최후를 마친 후(1085년), 2세기만에 교황권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황권 쇠퇴는 유럽의 단일성 파괴의 신호탄이었다. 소위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유럽연합의 붕괴가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1294~1303)의 재임 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보니파시우스 8세는 교황 우월적 내정간섭 문제로 영국과 프랑스 왕과 갈등을 빚다가 1303년 프랑스 왕 필립에게 체포되어 연금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들이 약 70여 년 동안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서 아비뇽에 강제로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시인 단테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 등을 비롯한 이탈리아 지성인들은 아비뇽의 교황들을 프랑스 왕의 포로라 비판하면서 '교황의 바빌론 유수(幽囚)'라 비꼬아 표현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비뇽 교황청의 과세확대와 징수방법은 유럽 전체에 걸쳐 교회에 대한 원성을 샀고 점입가경으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니, 이에 대한 강한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즉, 성직계급에 대한 불만과 교황권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70여 년의 아비뇽 교황 시대는 일단 그레고리우스 11세에 막을 내렸지만,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후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로마 군중들의 폭력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후임 교황은 나폴리 출신 우르바누스 6세(1378~ 1389)였다. 그러나 선출 이후 그가 도움을 준 프랑스 추기경단을 푸대접하자, 프랑스 추기경단은 로마에서 철수하여 클레멘스 7세(1378~1394)를 따로 선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교회에 두 명의 교황이 생긴 것이다. 이 시기가 교황권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처를 주게 된 대립교황시대이다. 이때부터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따로 분립되는 상태가 약 40년 간(1378~1417) 지속되었다. 이때 유럽 국가들은 이해득실의 눈치작전으로 어느 한 쪽에 가담해야만 했다.

이탈리아(로마)와 프랑스(아비뇽)가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이라면 나머지 국가는 국가 간의 역학관계, 즉 우호관계나 적대관계를 고려해서 어느 한 쪽에 가담하는 복잡한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프랑스에 우호적인 스페인과 스코틀랜드 및 독일의 일부 제후들은 아비뇽 측을, 그와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로마 측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공의회, 1414년에는 콘스탄스 공의회가 개최되어 우여곡절 끝에 오랜 교황의 분립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교황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수많은 비판가들 가운데 윌리엄 오캄이 있었다. 그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마르시글리오(Marsiglio of Padua)와 존(John of Jandun)은 〈평화의 옹호자〉라는 책을 저술하여 교황권의 한계를 꼬집었다.

봉건제 붕괴 가속화한 흑사병 유행
중세 서양의 정신적 지주였던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대한 회의가 일자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두려움에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전제한다면, 이러한 조짐은 당시 유럽인들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혼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상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활성화, 십자군 운동의 실패, 교황권의 추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데, 유럽인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 일으켜 정신보다는 물적 욕구를 자극하여 '돈을 벌자'는 경제욕구 팽배로 이어졌다. 한편 봉건영주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화폐가 많이 필요해짐에 따라 부역 대신에 생산물과 화폐를 거두었다. 다시 말해서 봉건국가에서 왕령국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절실해진 것이 돈(화폐)이었다는 말이다.

농민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둔 소출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벌었고 일정한 지대(地代), 또는 세금을 낸 나머지는 저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농노의 신분에서 차츰 벗어나 경제적인 향상을 누릴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무렵 유럽 전체를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간 대사건이 발생하였는데, 1347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페스트(흑사병)의 유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모르는 상황에서 페스트라는 괴질은 전 유럽으로 파급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무려 유럽의 인구를 삼분의 일로 감축시키고 말았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의 위안을 주어야 할 가톨릭교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중들에게 스트레스만 주었다. 페스트는 창궐하고 민심이 흉흉하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했겠는가.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자 각 지방의 영주들은 농촌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민의 처우를 개선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페스트가 사라지자 생활이 곤란한 영주들은 다시 농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58년 프랑스에서는 '자크리 반란'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자크(Jaques)'는 흔해빠진 프랑스 남자를 일컫는 말이며 '자크리(Jacquerie)'는 당시의 농민폭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쉽게 '김 서방의 난'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난은 노르망디·피카르디·샹파뉴 지방의 농민들의 폭동이었으며 많은 귀족들이 살해되고 방화가 벌어졌다. 이를 왕은 무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한편 1381년 6월 10일 영국의 켄트 주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영주에게 저항하여 와트 타일러가 주도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반란이었다. 반란군이 캔터베리 시와 런던을 점령하자, 위기감을 느낀 왕실이 유화적 태도로 타일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다. 타일러는 국왕 리처드 2세와의 면담을 통해서 농노제 폐지, 시장독점 배제, 지대율의 인하 등을 약속 받고 두 번째의 면담에서 교회재산 몰수,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를 관철시키려 하였지만 런던 시장 월워스의 계략에 빠져 살해되고 지도자를 잃은 농민군도 진압되었다. 비록 농민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주와 국왕에 의해서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농민의 신분해방 운동, 즉 '봉건체제의 붕괴'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

신도들로부터 외면 받는 가톨릭
12세기에 마케도니아로부터 카타리(순수파)의 사상이 여행 상인과 십자군에 참전한 군인들에 의해 유럽에 도입되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경건한 군인(일반 신도)들은 직접 성지 예루살렘에서 가난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는데, 목수였던 가난한 예수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교회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더불어 가난했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미 12세기에 성장한 도시들은 더 이상 주교들의 교권 하에 있지 않아 도시에서는 민중들의 발언권이 확대되었고 이에 일반 신도들도 자각하여 교회와 종교문제를 성서에 입각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타리파는 12세기 중반 독일의 쾰른에서 처음 시작되어 차츰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특히 남 프랑스의 카타리파를 '알비주아(Albigeois)'라 불렀으므로 일명 '알비파'라고도 하였다. 알비파는 가톨릭교회의 정통적 교의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는데, 악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육식과 성(性), 결혼, 재산을 완전히 부정하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철저한 반정부 노선을 걸었는데, '황제는 사탄의 수괴, 제후들은 사탄의 협조자'라 비난하였고 남 프랑스, 특히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는 프랑스 왕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제후들과 제휴하여 '알비 전쟁(1209~ 1229)'을 일으켰다.

한편 1173년 프랑스 리용의 상인이었던 왈도는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일종의 사회구제단체를 창설하였다.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청빈의 고귀함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왈도파가 가톨릭교회를 긴장시킨 이유는 성직자들을 무시하였고 진실한 크리스천의 길이란 오로지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성직자 무용론, 다시 말해서 성직자의 역할과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교의를 부정하였다. 1184년 교황 루치우스 3세가 왈도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나 그는 이에 반발하였고 결국 파문을 당했다.

오히려 종교개혁 앞당긴 마녀사냥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가와 교회가 공통적 위기감을 느끼고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그들이 정치·사회·종교의 기반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1183년 교황 루치우스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회가 파문한 이단을 즉시 제국이 체포하여 국가법정에 세우는 종교재판 설정에 합의하였다. 당시 유럽사회는 정치와 종교를 공동 운명체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절차는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 시대에 완성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능동적으로 색출하며 이단 용의자에 대한 공소를 제기하기 위해 종교 심문관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1252년에는 이단자가 이실직고하도록 종교 재판관들에게 고문까지 허용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의 신학자들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폭력을 배격하였지만 일반대중들은 종교적 이단자를 곧 정치적 반란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고문허용이라는 불행한 결과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속칭 '마녀사냥'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종교재판은 원래 이단자를 색출하고 단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교회의 시책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정치적인 반대파의 숙청에도 교묘히 이용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을 적극 색출하여 공소를 제기해야하는 상황에서 익명의 제보만 있어도 '체포 → 구금 → 기소 처형'의 정해진 코스를 진행하였다. 게다가 당시는 개인별 검거건수가 저조하면 바로 무능 아니면 직무유기로 이어지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1517년 마르틴 루터 이전부터 여러 가지 개혁운동이 있었다. 일반인 청빈운동으로 일컬어지는 가톨릭 내부의 개혁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12세기의 카타리파와 왈도파의 이단운동에 이어 13세기에는 교회개혁은 탁발 수도회, 즉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에 의해서 자극을 받았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자를 무조건 비난하거나 재산 그 자체를 악이라 매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탁발 수도회가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은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두 수도회는 포교 사업을 확장하여 중국까지 파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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