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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꽃을 피우다

교향악단 연주자를 꿈꾸던 현우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길고 긴 겨울을 보내고 있다. 현실에 대한 도피처로 택한 것이 강원도 탄광촌의 중학교 관악부 임시교사직. 인생의 낙오자라는 자괴감으로 힘든 삶을 살던 현우에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아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던져준다. 긴 겨울잠을 자던 희망의 싹을 발견한 현우는 이제 떳떳하게 싹이 트는 봄을 기다리게 된다.


박준용 | 한양대 강사, 영화평론가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은 강원도 탄광촌의 도계중학교에 임시 음악교사로 부임하게 된 한 트럼펫 연주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하는 주인공 현우는 교향악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류에서 밀려난 트럼펫 연주자. 재능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어 자괴감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처지도 못되면서 음악 학원에서 용돈이나 벌라는 친구의 말에는 자존심 상해한다. 돈을 위해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믿는 그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밤무대에 서는 일만은 끝내 피하려고 한다. 그런 주인공 현우에게 겨울은 길기만 했다. 교향악단 연주자를 꿈꾸었던 미래는 암담할 뿐, 현실의 벽에 부딪쳐 보내야만 했던 연인은 주위를 맴돌며 맘을 아프게 하고 나이든 홀어머니에게 효도도 못하고 걱정만 끼쳐드리는 형편이다. 그에게 인생은 늘 그렇게 캄캄한 겨울일 것만 같았다.

탄광촌에서 만난 순수한 열정
하지만 꽁꽁 언 땅 밑에서도 자연은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듯이 겨울은 고요히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보낸 옛 연인 연희(김호정)가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날, 현우는 강원도 탄광촌에 있는 중학교 관악부 교사 자리에 지원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부임한 첫 날. 낡은 악기, 너덜너덜한 악보, 까까머리에 얼굴은 새까만 아이들이 모여 있는 초라한 관악부를 보는 순간 한숨만 나올 뿐이다. 게다가 올해 전국경연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강제 해산해야만 하고, 현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망 없는 레이스에 돌입해야 한다. 우승은 턱도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담겨 있는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그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렸기에 아이들의 음악에 대한 사랑까지 포기하게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선생님이 굳은 신념과 이상을 품고 교직을 시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는 현우처럼 어쩔 수 없는 생활의 한 방편이나 일종의 안정된 직업으로 교직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교사가 일상적인 직업들과 달리 사람, 곧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변화무쌍한 존재인 아이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특수한 성격의 일이라는 데 있다. 이런 까닭에 교육이란 언제나 학생은 물론 교사 본인도 이런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화하고 성숙되어 갈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교직이란 어떻게 시작하느냐 못지않게, 영화 속 현우의 변화처럼 그 열린 가능성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느냐에 그 궁극적인 성패의 여부가 달려있다.

비현실적 공간에서 현실 깨달아
아이들과 대회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그래도 여전히 옛 사랑의 그림자에 가슴이 저리는 현우. 그런 현우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맑은 심성을 가진 마을약사 수연(장신영)의 배려로 현우는 언 땅을 녹이는 따뜻한 봄기운을 느낀다. 현우를 이해하고 바라봐 주는 순박한 사람들도 그의 곁을 지켜 준다. 잘하든 못하든 좋아하는 거 계속 하자는 친구의 술주정, 기나긴 겨울을 보내야만 봄이 오는 거라는 수연의 넋두리,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자신의 울부짖음에 "넌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무뚝뚝하게 내뱉는 엄마의 한 마디를 가슴깊이 되새기며 말이다. 현우는 그제야 알게 된다.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얼어붙었던 마음에 사랑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희망은 아직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겨울을 보낸 현우에게 어느덧 꽃피는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 속의 도계는 탄광촌이면서도 잿빛 가루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마을이다. 자잘한 상처들로 가슴 속 깊이 할퀸 현우는 도계에 오자마자 "잘 데는 있으세요?"라고 묻는 속 깊고 착한 아이를 만난다. 동네 사람들도 대부분 착하고 순박한 심성을 갖고 있다. 마치 현우를 위해 준비된 듯한 이 공간은 도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시골 이미지로 채색된 듯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곳의 실제 일상일 것 같은 탄광촌의 고단한 인생이나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의 고민은 살짝 스치고만 지나간다. 하지만 감독이 현우의 구부정한 뒷모습에 카메라를 집중하며 쌓아 올려가는 일상의 모습들은 잔잔하고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한계를 통해 희망과 가능성 찾아
드라마틱한 삶과는 거리가 먼 남자 현우. 그가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연습하는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주지도 못하고, 하다못해 단 한 번의 우승마저도 주지 못한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에게 "내가 너희한테 우승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건 사기치는 거야"라고 말하며 김을 빼 버리는 현우는 어찌 보면 자격미달의 교사다. 하지만 아이들의 현실적 한계와 이후 발전 가능한 꿈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는 선생의 길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꿈이 지나치면 곧 직면하게 될 차가운 현실에서의 고통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반대로 현실의 한계만을 강조한다면 아이들의 가능성을 그 싹부터 밟아버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꿈을 품으려는 아이들에게 현우는 먼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을 말한다.

그런데 실은 그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인 것이다. 삶의 사소한 장애물들에 무수히 발이 걸려 넘어지고 눈물은 가슴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그런 현실 말이다. 엄청나게 화려하고 잘난 삶을 꿈꾼 것도 아닌데 인생은 그렇게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주저앉아 있으라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현우는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를 품게 하지 않으면서 바로 그 지점, 그 현실로부터 시작한다. 희망과 가능성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늘의 수고에 의해 내일의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배감을 녹이는 인내와 용기
제대로 소리도 나지 않는 악기를 들고도 최선을 다해 연습에 열중하는 관악부 아이들.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할머니와 살고 있는 재일은 할머니에게 트럼펫을 들려주겠다며 어려운 곡을 연습하고, 용석이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도 '케니 G'처럼 유명해지고 싶다며 의지를 다진다. 이렇게 가난한 형편에도 꿈을 품고 사는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들이 이윽고 현우의 마음속으로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광부인 용석의 아버지는 용석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연주가의 꿈이 그들의 형편에선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을 알기에 용석의 손에서 트럼펫을 뺏는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현우는 관악부 학생들을 데리고 탄광촌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아버지들 앞에서 엘가의 'Pomp And Circumstances(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한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너무도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연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들은 시커먼 탄가루가 묻은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친다. 용석의 아버지가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이 장면은 두고두고 가슴을 찡하게 한다.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은 제목 그대로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정직한 영화이다. 아무리 겨울이 매서울지라도 결국 그것이 지나가면 봄이 온다는, 이를 악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그저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인내와 용기만 있다면 봄은 오고 꽃이 피어난다는 자연의 순리를 영화는 담담하게 말해준다. 또한 이 영화는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했던 한 어른이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존의 교육현장을 다룬 영화들이 주로 열정을 가진 교사에 의해 학생들이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데 비해 이 영화는 순수한 학생들의 열정이 패배감에 젖어 있던 한 선생을 변화시킨다는 설정으로 신선한 자극과 감동을 준다. 실제로 이 영화는 퇴직 후 폐광촌으로 내려가 도계중학교 관악부를 지도한 어느 교사가 아이들과 지낸 1년을 기록한 TV 다큐멘터리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제작되었다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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