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를 전후하여 서양의 세상보기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럽인을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를 졸업한 유럽은 기지개를 켜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동양침탈을 시작하고, 르네상스를 통한 인간의 자아의식이 싹트고 권위에 대한 비판론을 제기하는 등 유럽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근대로 가는 역사 구분의 전환점 우선 개념정리부터 필요하다. ‘소생’ 또는 ‘재생’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르네상스(Renaissance)’는 역사상 어느 특정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구분을 뜻하는 말이다. 즉, 중세를 졸업하고 근대로 가는 역사 구분의 전환점에서 바로 르네상스가 동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특히 북부지역에서 시작된 배경은 옛 로마제국 시대로부터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물려받고 일찍부터 다른 유럽 국가보다도 도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 운동기간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동방의 여러 나라와 접촉하여 고도로 발달되고, 아라비아의 과학이 접목된 그리스 자연과학 및 철학사상과 접할 수 있었으며 이때 그리스-로마신화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적극적 후원자였던 교황들과 제후들은 미술과 문학 분야에 있어서 인문주의자의 활동을 마치 자기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는데, 특히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피렌체의 메디치가(家), 밀라노의 비스콘티가(家)가 대표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쟁쟁한 인문주의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휴머니스트 중의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과 소박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여 교회의 타성화된 의식(儀式)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뜬 참다운 생활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던 ‘불가타역(譯)’이라는 라틴어 신약성서를 불신하고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다시 번역하여 수년간의 고생 끝에 초기의 필사본에서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1516년에 출판하였다.
비록 우리나라보다는 200년이나 늦었지만, 이미 1447년에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1454년에는 구텐베르크 성서출판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최초의 원어 신약성서 출판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노력은 가톨릭교회의 타성적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이르렀는데, 대표적 저서인 〈치우신예찬(痴愚神禮讚, Encominum moriae)〉에 그의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이 책은 교회 성직자의 부조리와 부도덕성을 공격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1517)에 민중이 호응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 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항로 개척에 나선 두 나라 중세 말까지 유럽인의 세계관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나 십자군 원정 기간을 통해서 접한 동방 문명으로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아라비아 저편의 동쪽 지역과 대서양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대항해 시대 이전에도 탐험의 시도는 있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5세기 전에 당시 노르웨이인 에릭이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되어 그린란드를 발견하였고, 다시 11세기 초 에릭의 자손인 라이프가 아메리카 쪽으로 내려와 라브라도르에 도착하였으며 더 남하하여 뉴잉글랜드에 닿았다. 그 밖에도 노르웨이인들은 북극지방으로 항해한 적도 있었으나 하나의 전설로 유럽사에서 잊혀진 일이 되고 말았다.
7세기에 모하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점령을 당한 후에는 더욱 유럽 세계가 좁아졌고 실크로드를 통한 유럽과 동양 사이의 통로가 사실상 폐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세계 탐험에 나서면서 탈 유럽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불가능해진 육로 무역을 포기하고 동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나 긴 세월동안 이슬람과의 국토회복 전쟁을 통해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몽골제국 시대에 유럽으로 전해진 나침반으로 장거리 항해를 위한 성숙된 여건을 갖출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먼저 선수를 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4년 전에 이미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인 희망봉에 도착하였고 10년 후에는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당시 인도의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유럽에서는 같은 비중의 금과 교환된다고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어 유럽인들은 항로개척에 정열을 쏟아 부었다. 바다의 동쪽 길을 이미 포르투갈에 의해서 선점 당한 스페인은 바다의 서쪽 길을 통해서도 향료의 나라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에게 후원을 약속하였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산티페 협약(1492년)’을 맺었다.
식민지 건설로 이어지는 대항해 드디어 콜럼버스는 구름이 짙게 깔린 스페인의 사르테스 강을 핀타 호, 니냐 호, 산타 마리아 호를 이끌고 조용히 빠져 나와 대양을 항해 하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선원들은 지치기 시작하였고, 콜럼버스 자신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인도로 가는 길이 너무 험하고 멀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 “육지다, 육지!” 핀타 호의 마스트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던 갑판원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 무렵이었으며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산이 들어맞았다며 인도라 믿는 바람에 그 뒤로부터 졸지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도 사람(인디오, 인디언)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콜럼버스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네 차례의 항해 끝에 1518년 산또 도밍고(Santo Domingo)에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한 총독부를 설치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는 유럽인들에 의한 침략과 정복, 약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항해술이라고 하면 결코 스페인에 뒤질 포르투갈이 아니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는 1497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로부터 인도 항로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리스본을 출발하여 이듬해에 아프리카 동해안의 메린다에 도착하였다. 그 후 10년 동안 항로를 찾아 인도에 도달하여 동양 항로를 개척하였고(1498), 까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하여 그곳에 포르투갈 식민지를 건설하였다(1500).
특히 원래 포르투갈 사람인 마젤란(?~1521)은 1518년 스페인 국왕(카를로스 1세)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카알 5세)의 특허장을 받고 1519년 5척의 함대와 승무원 280명을 이끌고 세비야(Sevilla)를 출항하여 세계일주여행(1519~1522)을 떠났다. 1520년 남아메리카의 남단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자,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계속 항해하여 1521년에는 괌도를 지나 필리핀 제도를 발견하였지만, 막탄섬에서 원주민들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으며 드디어 1522년 만신창이가 된 한 척의 배가 귀항하였는데, 그 배는 다름 아닌 마젤란의 탐험대 가운데 한 척이었다. 살아 돌아온 인원을 세어보니 거지꼴을 한 18명이 타고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한 이후, 포르투갈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인도로 항해하였고, 그 때 고아, 실론, 수마트라, 자바 등을 점령하여 무역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1542년에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1557년에는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극동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사회 변화로 이어지는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루터의 주장이 많은 유럽인들의 호응을 얻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개혁(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단순히 종교적인 면에서만 출발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고 각 지역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요인이 추가되어 하나의 역사적 대사건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가톨릭의 쇠퇴와 형식주의적 타성에 있었으며 또 한 가지 중세 말기의 경제 및 사회적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도시의 발달과 상업 르네상스가 ‘황금만능주의’를 유발시킴으로써 면죄부 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주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루터는 세 가지 유일사상, 즉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오캄의 유명론 신학을 발전시켜 ‘만인 사제론(萬人 司祭論)’을 주창하였다. 그는 1517년 면죄부 판매에 반발하여 95개 논제를 제기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는데,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바젤의 출판업자들이 이 내용을 출판함으로써 1518년에 들어서면서 이 논제가 세인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는 활자매체를 통한 언론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에 공포된 교황의 교서에 의해 정식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루터의 명성은 독일 전국에 퍼졌고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그를 지지하여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로 돌아가 루터교(Lutheranism)를 창립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주도로 개혁운동이 진행되었는데 그는 루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에라스무스의 종교적 관념을 일상생활의 철학적 지침으로 받아 들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루터보다 더 과격하였으며 자유로운 성서 해석을 하였다. 츠빙글리의 프로테스탄트는 유아세례 문제로 1524년 재세례파가 등장함으로써 분열되었는데,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된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은 다른 주(canton)로 옮겨가고 차츰 스위스 밖의 지역, 예를 들어 슈트라스부르크 및 라인강 상류의 다른 독일 도시로 전파되었으나 1531년 츠빙글리가 전사하자 그의 개혁교회는 지도자를 잃고 침체하였다.
1532년 스위스의 가톨릭 주(canton)와의 싸움에서 츠빙글리가 전사한 후 개혁운동이 주춤했으나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대륙에서는 루터파의 직접적인 영향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이외 지역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스위스·프랑스·네덜란드·스코틀랜드 지역은 칼뱅의 개혁교회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다. 특히 스위스를 중심으로 칼뱅의 개혁교회가 쉽게 뿌리를 내린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츠빙글리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덕분이었다. 사실 칼뱅의 개혁사상은 루터보다는 츠빙글리에 가까웠으며, 16세기 전반기 스위스 13개주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각기 독립적인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상업과 교역으로 크게 번창하였고 스위스의 북부 도시, 예를 들어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은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였으며 특히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칼뱅은 장로직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을 단행하였고 상공계급이 많은 북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파,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에서는 퓨리턴파라 불렀으며 그의 개혁운동이 성공한 요인은 ‘경제활동의 합리화’로 이는 궁극적으로 근대적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