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용 | 한양대 강사, 영화평론가
도라, 조슈에와 세상에 나서다
전직교사 출신의 도라는 브라질의 대도시 리우 데 자네이루의 중앙역에서 글 모르는 이들을 위해 편지를 대필해 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사랑을 호소하는 이, 아들에게 관심을 촉구하는 늙은 아버지, 받을 돈을 독촉하는 사람, 헤어질 것을 통보하는 연인 등 중앙역을 가득 메운 사람들처럼 그네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고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도라의 유일한 즐거움은 친구와 함께 편지를 뜯어 읽어보고 자신이 보기에 쓸데없는 소리를 적어놓은 편지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머지 편지들은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편지를 부탁하는 이들이야 절박할지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 이 모든 일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한 기계적인 직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계나 자본과 같은 비인간적인 대상을 다루는 직업과 달리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편지’를 써 주는 도라의 직업은, 학생이라는 살아있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이를 토대로 성장과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일인 그녀의 전직이었던 교사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도라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일종의 거짓이나 허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그녀에게 있어 편지란 무의미하며, 대필하는 일은 말 그대로 고단한 직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여인 아나가 도라에게 떠나간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편지를 서랍 속에 내팽개쳐둔다. 그리고 다음 날, 도라는 전날의 편지를 고쳐달라며 다시 찾아온 여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을 목격한다. 졸지에 갈 곳 없는 고아가 되어 버린 소년 조슈에는 역 주위를 떠돌고, 도라는 소년의 미래를 위하는 것이라며 입양원에 팔아넘긴다. 그러나 사설 입양기관 직원을 자처했던 그들은 아이들의 장기를 빼내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꾼들이었고, 도라는 그 사실을 알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무작정 조슈에를 구해낸 도라는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결심하고, 둘의 여행과 더불어 영화는 본격적인 ‘로드 무비’ 장르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교제와 나눔을 전제로 하는 신뢰
월터 살레스 감독의 최근작으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초기 삶을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처럼 로드 무비 형식의 영화는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긴 여행 과정에서 다양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며 겪게 되는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그린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함께 긴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은 때로는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그 이상의 연민의 정을 나누기도 하며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마음을 연다는 것이 꼭 모범적인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라는 어느 간이역 매점에서 배고픔에 음식을 훔치는 조슈에를 발견한다. 크게 놀라 야단을 치지만, 그녀는 좀 더 대담하게 많은 식료품을 훔쳐 나온다. 소년은 자신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음식을 훔친 그녀에게 대들지만, 먹기 좋게 빵을 잘라 나누는 도라의 손길에 마음이 풀어지고 만다. 대개 사람들은 참된 교육이란 진실한 신뢰의 관계를 토대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의 교제와 나눔을 전제로 하는 신뢰는 상황과 현실에 대한 변명 속에서 애써 외면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피상적 지식전달자와 수용자의 메마른 사제관계는 회피하기 어렵다. 마치 도라의 문장력이 일종의 기능적인 기술로 돈벌이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도라와 긴 호흡의 시간을 나누게 된 조슈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메말라버린 그녀의 몸과 마음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다시 여성으로서의 삶을 회복하기를 응원하기에 이른다.
그렇다. 교사의 삶이 언제나 학생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그렇게 고단한 직업이 또 어디 있겠는가? 교육의 진정한 기쁨 중 하나는 바로 이렇듯 도리어 아이들이 어른을, 학생이 교사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역설적인 나눔의 순간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라는 어린 조슈에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삶의 생기어린 격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새로운 삶의 의지가 슬며시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개개인의 다양한 ‘이야기’ 봐야
그러나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늘 이상적인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마을에 조슈에의 아버지는 이사를 가고 없다. 다시 떠나야 하는 고된 길.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둘은 서로 충돌하게 되고 조슈에는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도라는 걱정스런 마음에 소년을 찾아 헤매던 중 그만 정신을 잃고 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도라는 밤을 새워 자신을 간호하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평범한 그러나 인생의 묵직한 지혜가 느껴지는 말처럼, 두 사람은 이 일로 인해 서로를 보다 깊이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 이후 조슈에의 재치 있는 제안으로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도라는 시골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써주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편지를 쓰면서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순박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고통, 감사의 살아있는 말들을 느낀다. 일이 끝나자 조슈에는 당연하다는 듯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려 한다. 하지만 황급히 그것을 말리면서 도라는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는가를 가슴깊이 깨닫게 된다. 삶의 이야기로서 맥락을 잃어버린 ‘편지’는 글로 채워진 종이뭉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러티브’, 곧 살아있는 관계의 눈으로 보는 ‘편지’는 하나하나가 세상의 유일무이한 가치요 존재인 것이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학생들은 자칫 그저 번호나 명목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단순한 교육대상인 집단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열 명, 스무 명의 아이들은 각기 고유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특별한 존재들이다. 도라가 ‘편지’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그런 맥락을 발견하는 순간이 되었듯이, 교사에게 있어 학생이 그런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정해진 시간 이후 떠나는 마음
긴 여정의 끝에 드디어 도라와 조슈에는 아버지의 집을 찾게 되고, 그 곳에서 다른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비록 아버지는 없었지만 소년을 너무나 잘 대해주는 장성한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도라는 이제 자신이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느낀다. 마지막 날 새벽 도라는 소년이 사준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든 조슈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자신이 부치지 못했던 소년의 어머니가 쓴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린 편지를 남겨놓고 길을 떠난다. 새벽을 향해 걸어가는 도라의 발걸음은 희망찬 새 삶을 시작한 어떤 사람처럼 가볍고 경쾌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는 떠나가는 버스에서 조슈에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아버지로 말미암은 상처를 떠나보내며, 자신의 사랑과 진심 그리고 깊은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쓰면서 말이다. 이런 도라의 모습은 이상적인 교사의 삶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미의 심정을 가지고 한정된 시기를 아이와 함께 살아가다, 정해진 때가 되면 그 자리를 말없이 떠나 뒤로 물러나야 하는 삶 말이다. 떠나는 도라의 뒤를 숨이 턱에 차오르게 쫓아오는 조슈에의 모습은 그간 그녀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열매이다. 모쪼록 새롭게 시작한 2007년, 모든 교사들에게 풍성한 결실의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