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보편적 진리 담은 고전
지난 1967년 제작된 제임스 클라벨 감독의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은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일컬어지는 교육영화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제법 시간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본 이 영화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교육영화들이 가진 정형화된 구성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사회와 학교가 포기해 버린 문제 학생들, 그런 학생들을 방관하고 있는 무기력한 교사들, 거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주인공으로서 교사, 그리고 그의 헌신과 희생에 극적인 변화의 순간을 체험하는 아이들과 여타 교사들, 마지막으로 멋진 해피엔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흐름의 이야기 구성이 전형적이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이후 수많은 교육관련 영화들의 형식과 내용에 이 작품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전형적’이라는 말 때문에 이 작품에 선입견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장르의 예술이 그러하듯 한 영역의 전형이자 고전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측면의 완성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런 형식을 생생히 살아 있도록 만드는 인생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져 있기 마련이다.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 역시 여기에 예외이지 않다.
학업 이전에 인생을 가르치다
주인공 마크 태커레이는 흑인으로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후, 엔지니어로 직업을 구하고 있던 중에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임시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부임한 학교는 런던 항만 근처의 빈민촌에 자리 잡은 곳으로 대부분 교사들은 문제아 일색인 학생들을 이미 포기한지 오래고, 아이들은 희망 없는 미래를 기다리며 거칠고 폭력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커레이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학교마저 포기해 버린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직업인으로서 교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절망의 구렁텅이에 내던져진 아이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세상 그 어느 곳에도 마음 둘 곳 없어 반항과 일탈이 생활화 된 아이들의 계속된 빈정거림과 반항에도 불구하고, 태커레이는 묵묵히 교사로서의 직분이라고 생각하는 학업을 진행해 간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결국 교사로서 태커레이의 인내도 그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여타 교사들처럼 무관심과 방관의 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압하여 억압적인 교육환경을 만들어 가거나의 양극단의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깨닫게 된다. 자신에게 맡겨진 학생들이 문학이나 수학, 세계사와 같은 수업을 받아야 하는 대상 이전에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곧 사회에 첫 발을 내딛어야 하는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나 예의조차 배우지 못한 정규 교육과정의 학생 이전에 ‘아이들’이었다. 태커레이는 이들에게 진도에 따른 수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사람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 알게 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한다.
진실 담은 형식으로 마음 열어
이런 그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예의였으며, 다른 하나는 진실이었다. 바로 곁에서 삶을 같이 살아가는 친구들, 나아가 자신과 다른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없는 삶이란 인간의 그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태커레이는 먼저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학생들 상호간에서 존칭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던 아이들의 반발은 당연히 예정된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는다. 크고 작은 마찰의 순간이 지나면서 일상의 어느 곳에서도 한 인격체로서 존중과 대우를 받아본 적 없던 아이들은 점차 이렇듯 작은 호칭에서부터 교사가 학생을, 또 서로 간에 존엄한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기성의 형식에 대한 반항심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청소년기라 할지라도 사실 아이들은 알고 있다. 정신과 내용이 빠져버린 말 그대로 껍데기뿐인 형식의 강요, 형식에 의한 통제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를 말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비록 정형화된 형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에 상응하는 진실과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면 기꺼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청소년기가 감각적 발달이 왕성한 시기일지라도 그네들도 당연히 다른 사람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엄격한 훈육이 일반적이었던 과거 중학시절, 수업 중에는 물론 그 외의 시간에도 어린 우리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시며 인격적인 대우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수학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잊혀 지지 않고 남아있다.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신뢰 회복
그의 두 번째 교육방법은 ‘진실’이다. 태커레이와의 만남을 통해 아이들은 그가 실은 자신들 못지않은 빈민가 출신으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시 흑인으로서 온갖 고생과 수모를 겪으며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서로 모른 척 감추려 하고 있는 삶의 상처들을 담담히 고백하듯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서 일종의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런 아이들에게 태커레이는 말한다. “내 방식은 진실이다. 그것은 때로 두렵고 위험한 것일 수 있고, 실제 그러하다. 하지만 난 그런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렇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진실은 다소간의 위험을 내포한다. 내 진심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 그러하며, 상대방의 진실을 목격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교육에 있어 아이들의 삶, 그 진실과의 직면은 알게 되는 만큼 그것을 감당해야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힘들고 부담스런 어떤 것일 수 있다. 교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아이들과 나누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손쉬운 길은 학생은 학생의 길을, 교사는 교사의 길을 가는 것이다. 각자 기능
과 역할의 측면에서 제 자리만 지키면 된다. 쇠락해 가는 학교의 대다수 직업인 교tk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태커레이는 이를 참아낼 수 없었다. 그는 두려운 진실과 직면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각자 삶의 진실과 맞부딪혀 싸울 것을 요구한다. 물론 진실이 진실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쌓여 있어야 한다.
신뢰 없는 진실은 오히려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만을 남길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태커레이는 먼저 자기가 겪은 어두운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흑인으로서 가난과 편견, 차별을 극복하고 당시 거의 백인 일색이었던 교사의 자리에 오기까지 고난한 삶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이는 당시 흑인으로서 최초로 장편 극영화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태커레이 역의 ‘시드니 포이티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영화는 관객이 예상하는 동시에 기대하는 것처럼 변화된 모습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과 태커레이의 감동적인 이별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인생의 한때를 함께 했던 선생님과 헤어지는 순간에 아쉬움의 눈물을 나누는 모습이 이제는 점점 더 낯선 풍경이 되어가는 요즘, 이 영화는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진정한 사제지간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참고로 당시의 가수로서 영화에 학생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은 ‘룰루(Lulu)’가 부른 주제가 ‘To Sir With Love’는 서정적인 멜로디와 감동적인 가사로 이 작품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알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던 노래이기도 하다.
*영화정보*
제목 :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감독 : 제임스 클라벨
출연 : 시드니 포이티어, 주디 그리슨
제작년도 : 1967년
관람등급 :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