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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코’를 갖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파스칼이 언급한 대로 그녀의 코가 낮았더라면 실제로 로마의 역사 또는 세계사가 바뀌었을까? 사가들은 기존의 역사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대체로 가정적 접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가정적 접근은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군대를 격파하다.”

물론 뒤집은 이야기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악티움해전에서는 물론 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참패했다. 그리하여 승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고 더불어 공화국 로마는 ‘제국 로마’로 변신했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우연론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역사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사는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 이후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줄곧 시비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말하자면 여성미의 척도인 코 높이가 알맞지 않아 클레오파트라가 그처럼 절세미인이 아니었을 경우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악티움해전은 없었을 것이고, 더불어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로마제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논리다. 근대의 사가와 역사철학자들 대부분은 “러·일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역사 필연론과 함께 우연론을 배격하지만, 사람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코 가설 같은 우연론의 매력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갈리아(현 프랑스 지역)의 정복자로 입신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 세력가가 득세하고 원로원의 권위가 흔들리는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공화국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 원로원을 누르고 폼페이우스 등과 함께 이른바 ‘삼두(三頭)정치’를 폈다. 이후 그는 결국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제거하고 원로원까지 손에 넣어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지만 브루투스·카시우스·키케로 등의 공화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주지하듯이 카이사르 암살사건은 셰익스피어의 팬을 통해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살아남았다.

고결한 도덕성을 자랑하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은 카이사르의 부장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등을 제거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장례식 날 안토니우스는 유혈이 낭자한 카이사르의 옷을 흔들며 사람들의 연민을 자아내는 추도사를 하고 카이사르의-양자 옥타비아누스는 뒤이어 돈을 풀어 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브루투스 일당을 타도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공화국 말기의 로마를 통치했다. 바로 제2회 삼두정치다.

그러나 권력, 특히 최고 권력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임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두 번째 삼두정치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북아프리카의 통치자 레피두스가 탈락한 후 서부지역 통치자 옥타비아누스와 동부지역 통치자 안토니우스는 결국 세계국가 로마의 주인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라고 해서 오랫동안 최고 권력을 공유하도록 역사가 허용할 리 없었고, 더불어 로마는 귀족공화국일 뿐이었지만 공화국으로 존속할 수 있을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아래에서 그 추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카이사르의 사후 안토니우스 유혹
영역을 크게 넓힌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점령한 후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했고, 세기적 사랑을 자랑한 두 사람 사이에서 케사리온이 태어났다(카이사르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후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에 갔다가 카이사르가 살해된 후 황망히 귀국해야 했던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실력자 안토니우스를 제2의 기회로 삼기로 작정했다. 당시 28세(혹은 29세)였던 그녀는 그를 유혹하기 위해 갖가지 선물을 챙겨 소아시아의 타르수스로 마중을 갔고 그는 그녀에게 넋을 빼앗겼다(그가 이집트에서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14살 때였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원정을 위해 결국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고,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로마로 로마를 공격하는’ 책략을 펼 수 있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원로원에서 남편을 비방하는 연설을 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살해되어 머리만 로마로 보내져 효수된 키케로(그는 로마를 대표한 철학자요, 연설가였다)의 늘어진 혀에 바늘을 꼽기까지 했지만 남편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이집트에서 로마로 일시 귀환한 안토니우스는 풀비아가 죽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하는 등 한동안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속을 자랑했다.

뛰어난 미인으로 소문난 새 아내 옥타비아로부터 두 딸을 얻었지만 이미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안토니우스가 점차 강화되어 가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르티아원정을 단행하면서 양인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재회를 즐기며 옥타비아누스와 자웅을 겨루기로 작정한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아내 옥타비아에게 장문의 이혼편지를 보낸 후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그처럼 다시 동방행을 단행하자 로마에서의 그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고 일부 지지자들은 그와 동행하지 않고 잔류했다. 옥타비아누스로서는 호기를 맞이했지만 공화국 로마의 운명은 반대로 풍전등화 같은 처지가 되었다.

로마를 이용한 로마 공격에 실패해
기원전 31년 9월 레바논 앞 바다 악티움해. 옥타비아누스 휘하 함대와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연합함대는 악티움해를 붉게 물들이면서 격돌했다. 500척의 함선과 7만 여의 보병을 동원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해에 진을 쳤다. 이오니아해로부터 내려온 옥타비아누스의 400척 함선과 8만 보병은 안토니우스군과 이집트군의 연합을 막으려 했다. 일부 동맹세력의 이탈과 보급품의 부족을 느낀 안토니우스가 먼저 공격했다. 육전에서의 세(勢) 불리를 의식했든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서였든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조언을 쫓아 해전에서 결판을 내기로 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암브라시아만 밖으로 나와 서진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소형함대가 뒤를 따랐다. 곧 격전이 벌어졌고, 양측의 소형 함선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갤리선들을 빼내 전장을 벗어날 때까지 서로 상대 함선의 측면을 공격하려 애썼다. 결국 크게 패한 안토니우스 또한 몇 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랐다. 뒤에 남은 안토니우스의 함선들은 항복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뒤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대패한 후 해전 일주일 후에 투항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의 전령이 알렉산드리아의 궁전에 도착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죽어 황금침대에 누워 있었다. 갖은 기교를 동원해 승자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했지만 실패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달라는 편지를 쓴 후 자신이 죽은 줄로 오인하고 자살한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이집트 왕실의 상징인 코브라에 물려서 말이다. 39세 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묻혔고 더불어 로마공화국도 역사의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클레오파트라.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을 뜻한다든가. ‘나일강의 악녀’로도 불리는 클레오파트라 7세는 여신 비너스와 더불어 흔히 서양의 여성미를 상징한다. 하지만 주화나 부조에 남아있는 클레오파트라는 미인이기보다는 매력적 여인으로 보이게 한다. 그녀는 육감적 입과 의지적인 턱, 부드러운 눈매, 넓은 이마,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역시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줄이 많은 현악기 음색을 가졌다.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든 황제
안토니우스를 꺾은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1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때까지 사실상 로마를 통치해온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자)’란 칭호를 바쳤고 군대는 임페라토르(imperator, 군사령관 - 황제 emperor의 어원)란 칭호를 바쳤다. 그는 황제(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공화국 로마는 제국 로마로 바뀌었다. 원로원은 존속했으나 제위를 장식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러나 황제로 군림하기보다 공화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는 ‘존엄한 황제고 신 같은 카이사르의 아들’이란 칭호보다 ‘제1시민(프린켑스)’이란 칭호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제1시민으로 자처했다고 해서 그의 지배체제를 ‘원수정’으로 부르거나 원로원에 지난날 권력의 일부를 부여했다고 해서 ‘양두(兩頭)체제’로 불리기도 한다. 일체의 허식을 피한 그는 검소하게 생활한 반면 흉년에는 황실금고를 열어 굶주리는 빈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매년 수회에 걸쳐 유희(서커스)를 베풀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투스가 절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랜 전통의 공화제를 경시하다 결국 공화주의자들에게 살해된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공화주의자로 행세했지만 실제로는 행정, 군사, 재정 등 모든 면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그는 상비군제도의 도입 이외에도 세제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추진했다. 전성기의 로마제국은 스페인, 프랑스, 북아프리카 등지에 50여 개의 속주를 두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징세청부제를 폐지하는 등 속주통치체제도 정비하여 제국이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토대를 튼튼히 닦았다. 그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 로마로 만들었다”고 자부했고 40여 년에 걸친 그의 치세 중에 제국은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500년 제국역사의 단단한 기틀 마련
하지만 제국 초에는 네로와 같은 용렬한 황제들로 인해 국기가 적잖이 흔들렸다. 3대 황제 칼리굴라는 연회에 초대된 신하의 아내들과 성적 유희를 즐겼는가 하면 말(馬)에게 집정관직을 수여했고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황후의 치맛바람을 벗어나지 못하다 결국 네 번째 황후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네로는 모후와 의붓동생을 죽이는 것도 부족해 로마시를 불태우고 기독교도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기초를 튼튼히 놓았기 때문에 로마제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팍스 로마나’의 번영기를 포함한 500년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를 운위(云謂)하는 자들이 전술했듯이 그녀의 뛰어난 미모가 악티움해전을 낳았고, 그로 인해 세계국가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뀌고 세계도 더불어 제국적 질서로 바뀐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좀 높거나 낮아 절색이 아니었을 경우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는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고 악티움해전도, 아우구스투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의 제국으로의 변신이 과연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을까? 사실 로마공화국은 300여명의 종신 귀족 원로원 의원들이 거의 전권을 행사한 귀족공화국이었을 뿐이고 또 제국으로 변신하지 않았어도 동일하게 최강의 국가로 군림하면서 주변 민족과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거나 지배했을 것이다. 아니 세불양립(勢不兩立)이 역사의 이치이니 클레오파트라가 없었어도 또 다른 악티움해전은 있었을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 코’ 운운하는 것은 우연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역사의식의 발로이다. 우연론은 역사적 방법론을 파산으로 이끌 뿐이라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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