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C 말 프랑스혁명은 유럽 근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중요한 사건인 만큼 역사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다. 그 중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것은 역사적 사실 외에 야사로도 오늘날까지 많은 화제가 되고 있다. 앙투아네트 왕비가 현명한 여인이었다면 프랑스혁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가정적 접근은, 기존의 역사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사가들은 대체로 피하려 하지만,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옳게 인식하는 혜안을 기르게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목걸이사건은 없었고, 따라서 프랑스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목걸이사건도 있었고 혁명도 일어났다.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래에서 보듯이 혁명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따라서 목걸이사건 아니라도 프랑스혁명은 일어났을 것이다.
사가들이 산업혁명과 함께 ‘이중적 혁명’으로 부르는 프랑스혁명. 19세기의 프랑스 사가 줄미쉴레는 프랑스혁명을 평등의 재생이자 영원한 정의의 출현으로, 미국의 저명한 현대사가 C.브린턴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가지게 하는 근대사의 드문 사건’으로 평가했다. 좀 지루하지만 혁명의 전말부터 개괄해보자.
혁명의 불씨 제공한 겁 없는 왕비
1789년 5월에 170여 년간 개점휴업 중이던 ‘삼부회’가 소집되면서 혁명의 막이 올랐다. 1788, 1789년의 흉작으로 곡가가 앙등(昻騰)하고 실업자가 급증해 정치·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열린 삼부회는 투표방식을 놓고 대립했다. 평민대표는 1, 2신분의 승리를 보장하는 신분별 투표 대신에 1인 1표 방식을 주장했다. 삼부회가 3신분 610명, 1신분 291명, 2신분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1인 1표제로 할 경우 3신분이 유리했다.
‘국민의회’를 선포해(6월 17일) 의회에서 축출된 3신분 대표들이 따로 테니스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저항할 것을 결의하자, 국왕 루이 16세도 1, 2신분 대표의 국민의회 참가를 허가했다. 하지만 왕이 질서유지와 의회보호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고 국민의 신망이 두텁던 넥케르를 재정고문에서 해임하자 폭동이 일어났다. 7월 14일에는 독재정치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이 파괴되고 전국에서 제2, 제3의 바스티유 사건이 빈발했다. 그런 와중에 빵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일단의 여인들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을 모독했다는 소문에 분노해 베르사유의 국왕 처소로 쇄도했고, 국왕은 그들의 압력에 굴복해 파리로 이주해야 했다.
결국 앙상 레짐(구체제)은 그해 8월에 무너졌다. 면세특권, 매관매직, 노예제 등을 폐지한 국민의회는 8월 27일에 주권재민, 천부인권, 자유와 평등, 재산권의 불가침 등을 담은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단원제 의회와 사법부의 독립을 규정한 헌법도 제정되었다. 이후 국민의회는 헌법에 따라 해산되고 새로운 선거로 구성된 ‘입법의회’가 1791년 10월 1일에 열렸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온건 지롱드당의 세력이 점차 약해진 대신 과격 공화파인 자코뱅당(산악당)과 그 지도자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이 혁명을 주도했다. 이에 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아시냐화(貨)가 폭등했다. 마르세유를 비롯해 전국에서 의용병이 파리에 집결해(마르세유 출신 의용병들이 부른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는 중에 자코뱅당이 정부를 접수했다. 그리고 새로 구성된 ‘국민공회’에서 중간파를 끌어들여 다수당이 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막을 올렸다.
1793년 1월 국민공회에서 100시간의 논의 끝에 루이 16세에게 반역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출석 의원 721명 중 361명만이 왕의 처형에 찬성했기에 1월 19일 다시 투표해 380대310으로 가결했고, 루이 16세는 “국민들이여 나는 죄 없이 죽는다”는 말을 남긴 채 단두대(기요틴, guillotine)에서 목이 잘렸다. 프랑스는 이제 공화국(제1공화국)이 됐다. 자코뱅당은 로베스피에르, 당통 등을 중심으로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집단재판을 통해 반혁명 세력, 외국인 혐의자, 망명귀족 등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자신들이 판 무덤 앞에서 기총소사로 처형된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낭트에서는 2천명 이상을 르와르강에 익사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처형되었다.
국민의 심판으로 처형당한 왕과 왕비
공안위원회는 또한 혁명적 개혁을 단행했다. 빈농에 토지소유의 길을 열어주는가 하면 생필품 최고가격제와 임금을 포함한 일반 최고가격제를 시행했으며 망명귀족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고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노트르담사원 같은 교회들이 행정사무소로 바뀌고 성직자들은 교회를 떠나야 했다. 또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18~26세의 미혼 남자 모두를 징집했다.
하지만 공포정치는 오히려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침체를 격화시켰다. 자코뱅당이 지향한 도덕공화국은 국민에게 초인간적 헌신을 요구하며 비인간적 잔인성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반혁명세력이 집결하는 가운데 내분에 빠진 국민공회는 결국 로베스피에르를 버렸다. 1794년 7월 27일 군중들이 “폭군을 타도하라”고 외치는 가운데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체포되고 다음날 기요틴에서 처형됐다. 국민공회도 해산되고 ‘5인 집정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백색테러 난무, 물가 앙등, 실업 증대 등 혁명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집정정부는 결국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정치, 경제, 사상 등으로 분류되는 혁명의 원인 또한 복잡했다. 정치적 원인은 바로 절대주의 구체제의 모순이었다. 군주들은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한 장의 밀서로 백성들을 체포·투옥했으며, 언론자유를 제한해 국왕의 정책에 대한 어떤 비판도 막을 수 있었다. 독재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부의 무능과 불합리성이었다. 정부기구들의 기능이 중복되는가 하면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예·결산제도, 왕실-정부재정의 구분, 공평조세 등이 확립되지 않았다.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한 귀족과 성직자는 면세특권을 누렸다. 사법제도도 정비되지 않아 일부 지역에서는 처벌대상이 되는 행위가 다른 곳에서는 범죄행위가 되지 않기도 했다.
경제적 원인은 구체제의 계급적 착취구조에서 비롯했다. 국민의 1%도 안 되면서 20% 이상의 토지와 많은 재산을 소유한 고위 성직자들은 흔히 국민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을 제쳐두고 정치에 간여하거나 여타의 부도덕하고 사치스러운 일에 몰두했다. 국민의 6, 7%에 불과한 귀족 역시 정치적, 경제적 특혜를 누리면서 국민 위에 군림한 기생적 존재였다. 반면 국민의 94% 정도였던 3신분은 대체로 가난과 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사가들은 3신분의 가난과 고통을 강조하지 않는다. 빈민이 아니라 부유한 자본가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국가경제의 주역이면서 과도한 세금을 물어야 했을 뿐 경제적 공헌에 걸맞은 정치적,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 특히 중세적 길드와 중상주의로 인해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방해받자 산업자본들은 혁명세력으로 변해갔다.
때마침 계몽사상가들이 전제체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합리와 자연주의를 강조하고 인간세계의 무한한 진보를 믿은 계몽사상가들은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다. 그 중에서도 로크와 몽테스키외 등은 자유주의를 강조했고 루소는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그들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론은 그처럼 대조적이면서도 공통의 요소를 가졌다. 두 이론 다 필요악인 국가는 계약에 토대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인민주권을 주장했다. 두 이론 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중시했다.
결국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은 재정악화였다. 프랑스는 재정궁핍에 시달리면서도 함대를 파견해 독립전쟁을 벌리던 미국을 도왔다. 그로 인해 프랑스는 재정이 파산상태에 이르는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몇몇 정책이 실패한 후 국왕은 증세를 통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고, 프랑스는 바로 혁명으로 빠져들어 갔다.
사기극 부른 왕비의 끝없는 사치
드디어 목걸이사건 이야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궁중의 여인들이 국정을 어지럽히거나 양귀비처럼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경우가 없지 않다. 남편 루이16세에 뒤이어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마리앙투아네트도 현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치스럽고 탐욕스러웠다.
그녀의 끝없는 사치는 프랑스가 역사적 대혁명에 빠져들게 하는데 적지 않게 이바지했다. 그녀는 화려하고 사치한 궁정생활로 그렇지 않아도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국가의 살림살이를 어렵게 했을 뿐만 아니라, 루이 16세의 재무장관이나 재정고문들이 파산에 이른 재정 상태를 치유하기 위해 어렵사리 입안한 정책들을 그 때마다 귀족들과 결탁하여 반대하는 등 국왕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른바 ‘다이아몬드목걸이사건’(1785~1786)도 그녀의 역사적 역할에 걸맞게 널리 회자되는 일화이다. 오스트리아의 빈 주재 프랑스 대사로 일하다 오스트리아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딸이자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미움을 산 추기경 드 로앙이 라 모트 백작부인의 사기극에 말려들면서 목걸이사건은 시작된다. 백작부인은 추기경에게 왕비가 문제의 목걸이를 갖고 싶어 하니 목걸이를 사주면 자신이 왕비에게 전해 화해시켜 주겠노라고 했다. 추기경은 가짜의 왕비 메모를 읽고 왕비로 변장한 창녀를 베르사유궁 정원에서 만난 뒤 대금을 분납키로 하고 구입한 목걸이를 백작부인에게 넘겼다.
그러나 로앙 추기경은 첫 분납금을 내지 않았고, 보석상이 왕비에게 대금지불을 요청하면서 사기극은 들통이 났다. 160만 루블이나 하는(당시 노동자 월급은 3, 40루블이었다) 다이아몬드목걸이는 이미 런던에서 조각조각 나뉘어 팔린 다음이었다. 추기경이 감히 목걸이 건을 발설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백작부인이 런던에서 팔아버린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추기경은 법정에서 목걸이 사취혐의는 벗었으나 공직에서 해임되었고 라 모트백작부인은 태형과 낙인형에다 종신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 이후 영국으로 도망간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방하는 <회고록>을 썼다.
부정적인 왕실 이미지 구축에 일조
다이아몬드목걸이사건 어디에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개입한 부분은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은 ‘사치만 추구하는 왕비’라는 이미지와 상승 작용하여 그녀를 못된 왕비로 회자되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목걸이사건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고 국민은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정부에 더욱 분노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빵이 없어 굶주린다니까 “빵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고 그래”라고 말했다나. “보리쌀이 떨어졌으면 쇠고기 먹으라고 그래”라와 다를 바 없는 말 아닌가.
다이아몬드목걸이사건이 없었을 경우 프랑스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상술한데로 루이 16세 때의 프랑스는 정치·경제·사회·이념 모두에서 혁명의 불길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역사에서 ‘불가피한’ 사건은 없겠지만 목걸이사건도 비록 주역은 아니었으되 프랑스를 혁명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데 일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