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인터뷰란 것이 있다. 길가나 골목 입구에 카메라를 대기해 놓고 지나가는 행인을 카메라 앞으로 데리고 와서 짧고 간략한 반응을 말해 보게 하는 식의 인터뷰이다. 제야의 종이 울리는 종각 앞에 몰린 군중들을 배경으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민의 소망을 인터뷰한다든지, 정부 당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결단 같은 것이 내려졌을 때, 각계각층 시민들의 반응을 알아본다든지 할 때, 등장하는 인터뷰 방식이다.
일반 시청자들이야 이런 인터뷰 장면을 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저 아무나 나와서 자기 생각들을 잘들 말하고 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터뷰를 직접 진행해 보면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필자는 30대 초반 잠시 방송국 프로듀서로 근무한 적이 있다. 기생충 박멸 운동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는데, 시민들의 길거리 인터뷰 장면을 찍어야 했다. 길가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기생충 박멸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길을 막고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메라 앞으로 자진하여 나와서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인터뷰할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것이다. 왜 갈 길 바쁜 사람 붙잡고 귀찮게 하느냐 하는 짜증을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천신만고 끝에 인터뷰 의사가 있다는 사람을 찾아서 카메라 앞으로 데리고 오면, 그런 사람들은 물음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텔레비전에 자기 얼굴 나오는 것만 정신이 빠진다. 그런 사람일수록 엉뚱한 대답을 쏟아 놓기 일쑤여서, 이후 편집에서 잘라내는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만약 생방송에서 길거리 인터뷰를 하기로 한다면, 어쩔 수 없이 PD는 미리 인터뷰할 사람을 약속하여 정해 놓고 대기시켰다가, 순서대로 출연을 시켜야 할 판이다. 인터뷰의 진정성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이다.
모여든 사람 중에는 속내가 깊고 분별 있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들은 망설이거나 참는다. 굳이 이렇게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의 대상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말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방송 화면으로 나가면 온갖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번거롭고 요란스러운 작태라고 생각한다. 무슨 대단한 메시지도 아니고, 고작 물어보는 사람 구미에 대충 맞게 응해 주는 단순 역할이니, 그야말로 방송국 PD 좋으라고 해주는 인터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길을 막고 물어보는 일이나, 길을 막고 물어보자는 사람에게 대꾸를 해 주는 일이나 만만치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관용어구 가운데, ‘길을 막고 물어봐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실제로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뻔한 이치를 외면하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해 주는 말이 바로 ‘길을 막고 물어봐라’ 쯤에 해당할 것이다. 이렇게 상식 수준에서 이 말을 인정하고 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길을 막고 물어 본다’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떠오른다. 생각과 상상이 여기에 이르면, 길을 막고 물어본다는 말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한국 사람들의 말하기 기질이랄까 말하기 문화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길을 막고 물어보라는 말 속에는 ‘내가 전적으로 옳고 너는 전적으로 그르다’는 절대적 확신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절대적 확신은 때때로 주관적일 수 있다. 본인만, 당사자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말 절대적 정당함이 있는 것이라면, 길을 막고 물어보지 않더라도 이미 상대방이 승복하게 되어 있다. 단지 시간이 좀더 필요할 뿐이다. 왜 굳이 길을 막고 지나가는 제 삼자들에게 물어 본다는 말인가. 그것도 길을 막아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때 물음과 판단을 요구 받는 길 가던 사람들은 얼마나 타당하게, 얼마나 진지하게 물음에 답할 것인가. 그 제 삼자들은 절대로 선하고 절대로 믿을 만한 사람들인가. 절대적 확신이란 자기 최면에 불과할 때가 많다. 대화적 상황에서의 ‘나’는 상대에 의해서 상대화 되는 것이다. 그 점을 인정해야만 문제를 바로 보게 된다.
길을 막고 물어보라는 마인드 속에는 상대를 100대 0으로 완전 제압하겠다는 일종의 증오 기제가 있다. 네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확인시켜 주겠다. 앞으로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겠다는 심정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의 장본인 가운데는 확실한 제압을 해서 만천하에 알리고 모멸감을 주어 사회에서 매장을 시킬 사람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들 일상의 자질구레한 논쟁거리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논쟁이나 토론도 다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들인데, 이번 논쟁 한 번하고 다시는 너와는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살기로 한다면, 그건 정말 본말(本末)이 뒤바뀐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상 이치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상대를 100대 0으로 완전 제압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제는 내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이긴 것도 있고, 상대가 이긴 것도 있고, 그런 모양새로 살아가는 것이 균형을 이룬 사람살이의 모습이다.
길을 막고 물어보라는 마인드 속에는, 여차하면 사람들이 공공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길마저도 막겠다는 발상이 들어 있다. 나의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으로 길을 막는 조치까지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이니, 이 지나친 몰입이 두려울 뿐이다. 길이란 무엇인가. 개인 간의 사소한 논쟁 가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공공의 가치물이다. ‘길’이 추상적 의미로 승화되면 천명(天命)의 경지에 이르는 것인데, 그 까짓 길쯤이야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이 들어 있으니, 감정이 문제를 다루는 수단을 어떻게 악화시키는지를 잘 보여 준다.
길을 막고 물어본다는 발상 속에는 이처럼 다소 간의 억지가 전제되어 있다. 이 말을 즐겨 사용하는 우리네로서는 우리의 말하기 기질이 이처럼 잘 표현된 것도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언쟁의 당사자는 자기들의 문제를 자기들 수준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동네 사람들 전체의 문제로 끌고 들어온다. 그래서 조용히 자기네들끼리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내가 옳으면 그 옳다는 것을(상대가 잘못이면 상대가 잘못이라는 것을) 상대에게 차분하게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동네방네에 알려, 어떤 위세의 분위기로 제압하려는 발상이 들어 있는 것이다. 얼핏 사람들의 보증을 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객관성이 보장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무책임한 선동의 힘을 믿는 측면이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한국 사람들의 언쟁 장면은 예측하기 힘들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정의 면모를 가지는 것이다. 좋게 시작한 대화가 중간에 무슨 연유인지 거친 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부부싸움을 해 본 사람들은 다 절감할 것이다. 싸운 뒤 화해를 하기 위해 시작한 대화인데, 도대체 대화를 어떻게 전개하였기에 대화하기 이전보다 더 고약한 싸움의 경지로 되돌아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이 모두가 감성이 과잉된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성 과잉으로는 갈등과 논쟁을 당사자들이 책임 있게 해결하지 못하게 한다. 감성은 신명을 창출하는 데는 뛰어난 효력이 있지만, 감성이 갈등을 만나면 파국을 부른다.
길을 막고 물어보라는 감성의 마인드로는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는, 윈-윈(win-win)의 경지를 추구할 수 없게 한다. 문제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머리로써 생각할 때 ‘윈-윈’의 지혜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논쟁이 심화될 때는 감정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혜를 발휘하는 셈이 된다. 논쟁이 거친 싸움의 파국으로 가는 것을 유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막고 물어보라고 꾸짖는 톤으로 호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대 신뢰의 효과보다는 선동의 분위기를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말이 이미 감정의 상투성이라는 맥락에 강하게 기대어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나는 오늘도 그 어떤 상대를 향하여 ‘길을 막고 물어봐’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난 가을 김남조 시인이 주신 시집 한 장을 읽으면서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진검을 지닌 이
진검 그것 외엔 가진 거 없는 이는
좀체 칼을 뽑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도
사랑한다는 마음의 진검을
평생 동안 아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날에 서로
알고 있었다.
<진검·1, 김남조>
나는 마음 속 진검은 고사하고 자주 가짜 검을 뽑아들며, 그 때마다 불쌍한 상대를 향하여 ‘길을 막고 물어봐’를 외쳐대며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고 성숙한 소통은 언제나 나의 것이 될 것인가. 그것은 정녕 신기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