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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미사일사건, 위기로 끝나지 않았다면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위기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를 파괴하는 등 보다 강경한 방책을 택했거나 소련이 공해에서의 ‘정선검색’을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맞섰을 경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핵전쟁이 벌어졌어도 인류사는 지속되어 왔을까?…가정적 접근은, 기존의 역사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사가들은 대체로 피하려 하지만,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옳게 인식하는 혜안을 기르게 한다.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요구를 일축하고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포기하지 않다.” 소련이 미국의 코앞이나 다름없는 쿠바에 핵탄두 발사가 가능한 미사일기지 건설을 강행했을 경우 인류세계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할 만큼 스쳐 지나가 버림직한 일들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대사건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물론 그 역으로 세상이 숨을 죽이고 귀추를 주목하며 긴장하는 대결이나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사례를 간간이 기록하고 있지만 ‘쿠바사태’야말로 세계를 극도로 긴장시킨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철의 장막’ 안쪽의 공산주의 진영과 서방의 자유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을 벌여온 세계는 하마터면 냉전이 아닌 열전으로, 그것도 인류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핵전쟁으로 빠져들 뻔 했다. 바로 쿠바미사일위기였다. 1960년대 서양의 내로라하는 군사평론가들은 동․서 양진영이 보유한 핵무기가 지구의 생명체 모두를 여섯 번 내지 일곱 번 깡그리 몰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주지하듯이 2차 대전 후의 그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명실공히 자유민주세계를 이끄는 국가였다. 터키와 그리스의 공산화를 막은 1947년의 트루먼선언, 총 120억불을 투여하여 전후의 서유럽을 부흥시킨 머셜플랜, ‘미주공동방어조약’(1949)․‘북대서양조약기구(NATO)'(1949)․‘미주기구(OAS)‘(1951)․'동남아시아조약기구’(1954) 등의 결성, 미군 전사자만 2만5000명을 기록한 한국전쟁, 1948년이래 봉쇄․장벽․공수(空輸)로 점철된 베를린사태 등등은 모두 미-소 대립체제에서 미국이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한 일들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혁명

한편 쿠바에서는 1959년에 바티스타의독재체제를 타도하는데 성공한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을 주도한 피델 카스트로는 토지개혁으로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는 한편 소련과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 친소반미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쿠바 내의 미국인 재산도 몰수했다. 쿠바의 미국과의 교역이 위협받고 급기야 미국은 쿠바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1961년 초). 쿠바는 그로 인해 거의 유일한 수출상품인 설탕의 최대 고객 미국을 잃어 경제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소련이 쿠바 산 설탕의 새로운 고객이 되었으나 미국시장의 상실을 제대로 보전해주지 못했다.

바로 코앞에서 반미기치를 높이 들고 공산주의 소련을 끌어들이는 쿠바를 미국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1961년 4월 15일에 쿠바공군 비행장을 폭격한 미국은 그 이틀 뒤에 비밀리에 훈련시켜 온 망명 쿠바인 수천 명을 피그스만을 비롯해 쿠바의 여러 지역에 상륙시켰으나[피그스만작전] 쿠바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주도한 쿠바침공이 실패한 이후 카스트로의 반미친소정책은 보다 강화되었다. 이후 소련과의 밀월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중에 쿠바는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 무렵 쿠바는(미국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련의 미사일[유도탄]기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국의 공산체제에 비해 의회의 강력한 견제 아래 있는 미국 행정부의 비효율적(?) 정책결정을 계산에 넣었을 뿐 아니라 케네디를 우유부단한 인물로 오판한 흐루시초프는 피그스만사건을 쿠바에서 소련 군사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고, 그것은 1962년 10월의 쿠바미사일위기로 나타났다.

1960년 5월에 쿠바를 보호해주기로 약속한 바 있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겸 수상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42기의 중거리 탄도유도탄 등을 배치해 미국에 뒤진 전략핵무기 부문을 상쇄하려 했다. 소련이 쿠바에 배치하려던 탄도미사일은 쿠바에서 핵탄두를 발사할 경우 미국의 대부분을 수분 안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소련의 미사일배치로 위기 고조

흐루시초프는 미국이 핵전쟁이 될 3차 대전도 불사할 의지로 소련의 쿠바 탄도미사일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을 것으로 예단했다. 그는 쿠바의 소련 핵미사일은 ‘독일의 비핵화’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나아가 그것은 또한 핵무기개발을 기도하던 중국으로 하여금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게 하는데도 유익할 것으로 판단했다.

미국은 1962년 6월에 소련이 쿠바로 갈 미사일을 선적한 사실을 결국 인지했다. 그리고 동년 8월 29일에 이르러 쿠바 상공을 비행하던 U-2 정찰기는 쿠바에 새로운 군사기지가 건설되고 있고 소련의 군사기술자들이 쿠바에 들어와 있는 사진을 찍어 보고했으며, 이어 10월 14일에는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대가 건설되고 있음을 보고했다.

그로부터 미국과 소련은 13일 간 초긴장상태에서 숨막히는 외교전을 벌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10월 16일에 소집한 ‘비밀위기관리위원회’는 전략공군기를 동원한 쿠바 미사일기지폭파 쪽으로 기울었다. 케네디는 즉각적 쿠바침공․공군기에 의한 미사일기지폭파․쿠바 해상봉쇄․외교적 해결 등의 대책을 면밀히 검토했다. 결국 소련 미사일이 쿠바로 운송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군에 의한(소련선박에 대한) 해상봉쇄, 곧 ‘정선검색(quarantine)'을 단행하기로 했다. 케네디와 그의 핵심 참모들은 결국 핵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되 미사일기지 제거가 가능한 방책을 택했던 것이다.

케네디는 소련이 쿠바에 넘겨주려는 ’공격 무기와 관련한 물자‘를 미군이 빼앗을 것임을 선언하고 기지폐쇄와 미사일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소련에 보냈다. 케네디는 나아가 쿠바에 대한 전면침공 태세를 취해 흐루시초프에게 자신의 최후통첩이 헛말이 아님을 인지시키려 했다. 세상의 보통사람들 대부분은 적어도 10월 22일까지는 핵대전인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를 위기의 문턱에 처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각국 정부의 수뇌들을 비롯한 정보관계자들은 숨을 죽이며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했다.

10월 18일에 백악관을 찾아온 미국 주재 소련 대사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케네디에게 소련은 쿠바사태와 관련해 미국에 어떤 공격을 가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다. 그 후에도 두 초강대국의 대통령과 수상은 최후통첩적 메시지들을 주고받았다. 10월 22일. 케네디는 국민에게 위기상황을 알리고 흐루시초프에게 세계평화에 대한 ‘비밀스럽고, 무모하고, 도발적인 위협’을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0월 24일. 쿠바로 향하던 소련의 배들이 ‘정선검색’을 피해 결국 항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틀 후인 26일. 흐루시초프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 않을 것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쿠바의 미사일 철수를 제의하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냈다. 하지만 하루 뒤인 27일. 흐루시초프는 터키에 있는 미국 미사일의 철거를 요구하는 더 강경한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은 스푸트니크 소동 후 이미 터키에 배치한 자국의 낡은 주피터미사일의 철거를 검토해왔지만 케네디는 소련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수용될 터키 배치 미사일의 철거를 거부했다.

미국의 강공에 발뺀 소련

미국이 소련의 새로운 요구에 대한 대응책을 찾아 부심하던 중 법무장관 R. 켸네디가 한 방책을 제시했다. 즉 흐루시초프의 두 번째 메시지를 접수하지 못한 것으로 하고 첫 번째 메시지, 곧 ‘미국의 쿠바 불침공 조건하에 소련 미사일 철거’ 제의에 답하는 방안이었다. 28일. 미국의 전략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흐루시초프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미국이 쿠바 불침공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거하는 것에 동의했다. 케네디 또한 미국이 수년 전에 터키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거할 것을 흐루시초프에게 비밀리에 약속했다. 미국은 수개월 후에 조용히 터키로부터 미사일을 철거했다. 당시 쿠바의 카스트로는 미국의 협박에 굴해 미사일을 철거하는 소련에 분노했지만 행동에 나설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음에랴.

다음 수주일 동인 두 강대국은 약속을 이행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쿠바 발(發) 미사일위기는 1962년 11월말에 이르러 완전히 종식되었다. 미국과 소련, 특히 미국이 진심으로 핵전쟁도 불사하려 했는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쿠바미사일사태는 핵전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언제든지 열릴 수 있음을 경고해주었다. 사실 그것은 인류가 핵전쟁에 제일 가까이 나아간 사건이기도 했다.

케네디와 미국은 쿠바 미사일위기에서 당시로서는 분명히 승리한 것으로 보였고, 미국의 핵무기에서의 우세가 승리의 주된 요인으로 인식되었다. 소련은 당시 핵전쟁을 벌일 수 없던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것은 미국이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해군력과 공군력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도 완전한 승리를 구가한 것은 아니었다. 터키에서 핵탄두를 철거했을 뿐만 아니라 쿠바 불침공을 약속했는데 이는 소련으로부터 매년 3억 달러를 원조받던 쿠바가 도발해오더라도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용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쿠바사태 냉전 완화계기로

한편 쿠바 미사일위기가 자국의 패배로 종결된 후 소련은 군사적 열세로 인한 굴욕을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흐루시초프와 그의 후계자들은 평화시로서는 역사상 최대에 이를 만큼 군비를 강화하려 했고, 그리하여 1970년대에 이르러 소련은 핵무기와 대양에서의 해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더불어 미‧소 양국의 화해가 서서히 추진되고 1963년에는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쿠바위기는 냉전을 완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흐루시초프는 ‘독일평화조약’을 체결을 위한 노력 및 독일과 중국의 비핵화를 위한 노력에서 결국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했는데(1964)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소련이 쿠바에서 당한 굴욕적 패배가 그로 하여금 1964년 10월에 실각하게 한 것으로 평가한다.

미국 영화 <13일>은 백악관․카리브해․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지만, 미국이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를 파괴하는 등 보다 강경한 방책을 택했거나 소련이 공해에서의 ‘정선검색’을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맞섰을 경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핵전쟁이 벌어졌어도 인류사는 지속되어 왔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주로 일부 중대한 사건들이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경우 인류가 부딪쳐야 했을 어두운 사태를 이야기해왔지만, 쿠바 미사일위기만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경우 엄청난 재앙을 인류에게 준 사건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쿠바 발(發) 미사일위기는 ‘핵균형’을 일종의 안전핀으로 믿지만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발상인지를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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