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사회주의체제 파리코뮌, 티에르의 중앙정부와 싸워 결국 승리하다.” 가정의 이야기일 뿐 파리코뮌은 2개월여 만에 사라졌다. 파리코뮌의 뿌리는 프랑스 • 프로이센전쟁이었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전쟁(1866)에서 승리한 후 통일의 완성을 위해 계획한 그 다음 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이었다. 당연하지만 프랑스는 자국의 동쪽에 통일된 독일이 등장하는 것을 우려했고, 따라서 오스트리아를 꺾은 후 프로이센이 결성한 북독일연방에 저항한 남독일의 영방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등 독일의 통일을 가능한 막으려 했다.
통일과업 시작 때부터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함을 인지하고 대비해온 비스마르크에게 프랑스 • 프로이센(보불)전쟁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스페인왕위계승 문제였다. 스페인인들이 1868년에 그들의 여왕을 몰아낸 후 왕위가 비어 있었는데, 1870년에 이르러 프로이센 왕가 호엔촐레른가의 레오폴드 공(公)이 국왕 물망에 올랐다.
빌헬름 1세 하지만 레오폴드는 스페인 국왕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가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반(反)독일적 정서가 강했던 프랑스에서 반(反)레오폴드 • 반독일 여론이 들끓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친척인 레오폴드가 스페인 왕이 될 경우 프랑스는 호엔촐레른가의 프로이센과 스페인에 포위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레오폴드는 프랑스의 반대가 심하고 유럽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자 1870년 7월 12일 사의를 표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프로이센 왕가가 스페인 왕위를 영구히 겸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독일주재 프랑스대사 빈센트베네디티는 확답을 받기 위해 7월 13일 온천장 엠스에서 휴양 중인 빌헬름 1세를 방문했다. 빌헬름은 베네디티에게 “나는 호엔촐레른가의 수장으로써 동의했을 뿐 프로이센정부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만약 레오폴드 부자(父子)가 후보수락을 철회할 의향이면 나도 수락할 것이다”고 말했다.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대사와의 회견내용을 몰트케 등과 함께 베를린에 대기하고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타전케 했다(엠스전보).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유도하는데 그 전보를 이용하기로 한 비스마르크는 그 다음날 전보의 앞뒤 내용을 잘라 발표했다. 양인 사이에 있었던 정중한 의례가 빠져버린 ‘엠스전보’엔 “산책하는 중에 가로막으며”, “대단히 성가신 태도로…(중략)… 요구하다”, “나는 그런 개입이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며 꽤 완강히 요구를 거절했다”는 등의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 전문은 독일인에게는 프랑스대사가 자국 국왕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으로, 프랑스인에게는 자국 대사가 모욕당한 인상을 주게 되었다.
독일의 여론도 일변해 반(反)비스마르크세력의 목소리는 줄어들고 프랑스 타도를 외치는 주전론이 기세를 올렸고 프랑스의 경우 국민의 분노가 충천했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의 끝 장면이 파리의 들끓은 반(反)독일 정서를 전해준다. 시민들은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하고 외쳤다. 그 1주일 뒤인 1870년 7월 19일에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그리하여 독일 통일을 위해 비스마르크가 기획하고 연출한 제2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최강의 프로이센군은 노도와 같이 프랑스로 진격했다. 더욱이 전쟁이 일어나자 남독일 영방들이 나폴레옹 3세의 기대와는 달리 프로이센 편에 가담했다. 피는 역시 물보다 진했다. 독일군은 3개 군단으로 나뉘어 프랑스로 진격했다. 2개 군단은 로렌으로 쳐들어가 바제느 휘하의 프랑스군을 메츠에서 포위했다. 메츠에서 포위된 프랑스군을 구원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직접 나섰으나, 프로이센군은 스당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키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개전 후 한 달 반쯤인 9월 2일의 일이었다. 제3군단도 알자스로 침입해 맥마흔이 지휘한 프랑스군을 괴멸시켰다.
파리가 포위된 상태에서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파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저항했으나 군사적 열세에 식량까지 떨어져 1871년 1월 28일에 결국 항복했다. 이어 그해 2월 12일에 휴전조약을 비준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티에르가 임시행정장관에 임명되어 뒷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조약을 비준했으나 프랑스인들의 분노와 저항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한편 독일은 오랜 꿈을 성취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전체를 아우르는 독일제국을 탄생시켰다. 비스마르크가 통일과업을 시작한 지 10여년 만의 일이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프랑스의 항복 열흘 전인 1월 18일에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영광을 과시하던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제1제국인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을 계승한 제2제국이었다) 황제로 즉위했다. 통일의 영웅 비스마르크는 후작작위와 함께 제국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때 이미 히틀러의 제3제국을 태동시키고 있었다.
프랑스는 1871년 5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알자스 전체와 로렌의 일부를 독일에 양도하고 배상금(50억 프랑)도 지불했다. 프랑스의 국민적 굴욕감은 크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국경을 사이에 둔 이웃 나라, 오랜 대립의 역사를 기록해온 나라와의 전쟁에 참패한 후에 땅을 빼앗기고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나라의 국민이 느낀 패배감과 복수심, 그리고 굴욕과 분노가 눈에 보일 듯하다. 알퐁스 도테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은 독일에 병합되어 다음날부터 독일어를 배워야 했던 어느 소년의 이야기를 빌려 알자스 • 로렌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을 전해 준다.
“어린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위해 수업을 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알자스와 로렌 주(州)에서는 이제부터 독일어 외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베를린으로부터 시달된 것이에요… 오늘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마지막 수업이 됩니다… ”교실 저쪽 구석에서는 오제영감님이 안경을 끼고 앉아서, 자신의 아베세 독본을 두 손으로 들고 이 조그만 어린애들과 함께 글자 읽기를 하고 있었다…. 별안간 학교의 괘종시계가 열두 시를 치고, 이어서 알젤뤼스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프로이센병사의 나팔소리가 우리 교실의 창 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멜 선생님은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교단 위의 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그렇게 크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분’하고 그는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나는… 나는…”그러나 무엇인가가 그의 숨을 막히게 했다. 그는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그는 칠판 쪽으로 돌아서더니 한 조각의 분필을 집어 들고 있는 힘을 기울여 한껏 큰 글씨로 이렇게 쓰는 것이었다.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그리고는 머리를 벽에 눌러대고 잠시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더니, 이윽고 말없이 우리에게 신호하는 것이었다.“끝났어… 모두 돌아가거라.” [PAGE BREAK]
하지만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이 끝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항복 선언과 민의회의의 휴전조약 비준을 수용하지 않으려던 노동자와 시민, 그리고 무장해제 당한 국민군 등은 결국 1871년 3월에 폭동을 일으킨 뒤 ‘파리코뮌’으로 불리는 자치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사회주의자와 일부 급진적 중산층이 주도하고 노동자 • 하층시민 • 군인 • 자영업자 등이 참여한 파리코뮌은 임시정부와 국민의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파리시의 자치권을 주장했다. 이후 리용, 마르세유, 툴루스 등지에서도 코뮌이 출현해 패전 프랑스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871년 3월 1일에 파리에 입성해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독일)군은 파리 시민들의 무언의 적의와 저항 가운데 3일에 철수했다.
그로부터 프랑스, 특히 파리는 중앙정부와 파리코뮌의 각축장으로 변해갔다. 3월 18일, 임시정부는 프랑스국군에게 파리에서 농성하던 코뮌 측 군대의 대포를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국군과 시민군 사이에 마찰이 있었으나 그때는 큰 충돌 없이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양측 대표가 파리시청에서 회합한 후 코뮌 측의 중앙위원회가 결성되고 중앙정부는 베르사유로 퇴거했다. 중앙위원회는 즉각 포고문을 내어 인민의회, 곧 코뮌의회의 의원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때까지 잠정적으로 활동할 것임을 공지했다.
파리코뮌 의원선거가 며칠 후인 3월 26일에 시행되었다. 노동자 출신이 20석을 차지했고 자영업자와 중산시민 출신이 나머지 70석을 점유했다. 28일에는 20만의 시민이 파리시청 광장에 모인 가운데 코뮌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으며 29일에는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아래에 군사 • 재정 • 식량 • 노동 • 교환 • 교육 • 외교 • 사법 • 보안의 9인 위원을 두었다. 코뮌은 이어 징병제와 상비군제 폐지, 인민에 의한 국민군 설치, 미지불 집세의 일시 연기, 공무원 급료의 최고액 설정, 종교재산의 국유화, 주인이 방기한 공장의 노동조합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 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 보장 등의 정책을 시행하거나 관련 법령을 제정했다.

중앙정부와 파리코뮌의 대결로 프랑스는 일시 무정부적 상태에 빠졌으나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철수했던 중앙정부군이 전열을 정비한 후 코뮌 측을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알자스에서 프로인센군과 싸웠던 멕마흔이 지휘한 정부군은 프로이센군의 지원 아래 5월 21일 파리로 진격해 파리코뮌 세력을 포위했다. 이후 파리 교외에 독일군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중앙정부군과 코뮌군은 생사를 건 처절한 살육전을 전개했다. 정부군은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시가전을 통해 한 거리 한 거리를 탈환해 갔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시민이 살상되었다. 코뮌 측도 파리대주교를 포함한 많은 인질을 처형했다. 저명인사를 포함한 3만 명의 시민이 죽은 ‘피의 1주일’ 후 파리코뮌은 붕괴되었다.
파리코뮌은 해체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이후 30여 년 동안 프랑스를 괴롭혔다. 정부 측과 파리코뮌 측은 서로 상대의 과잉행위와 비행을 비난했고, 파리시민들 사이의 불화는 프랑스의 정치와 사회에 오랫동안 악영향을 끼쳤다. 사실 프랑스는 위그노전쟁 때의 신 • 구교도의 싸움, 프랑스혁명 때의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투쟁,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기밀을 판 혐의로 1894년에 체포된 이래 드레퓌스의 유 • 무죄를 놓고 정계와 학계가 벌인 심각한 대립,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알제리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대립 등 ‘프랑스 • 프랑스전쟁’으로 불리는 국론의 분열과 대립을 자주 겪었지만 파리코뮌 사태도 그 중의 하나였다.
파리코뮌이 실패하지 않았을 경우 프랑스와 서유럽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파리코뮌은 흔히 최초의 사회주의체제로 평가되지만, 파리코뮌이란 사회주의체제의 실험이 성공했을 경우 사회주의는 더 빨리, 그리고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 인류 복지에 이바지했을까? 혹은 46년 후 볼셰비키의 소련공산체제가 한바탕 실험으로 끝났듯이 파리코뮌 또한 결국은 무익한 실험으로 막을 내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