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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이 더 오래 기승을 부렸더라면

흑사병이 더 오래 유럽을 유린했더라면…. 가정적 접근은, 기존의 역사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사가들은 대체로 피하려 하지만,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옳게 인식하는 혜안을 기르게 한다.

“유럽을 일거에 사지(死地)로 바꾸어버린 흑사병, 15세기를 지나 16세기에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다.” 물론 가정의 이야기다. 그랬을 경우 유럽은 아마도 사람을 구경하기 힘든 땅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정치제도든 과학문명이든 유럽세계가 근대 이후 자랑해온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페스트로도 불리는 흑사병이 역으로 유럽에서 중동과 서역을 거처 동쪽으로 옮겨왔더라면 동아시아가 치른 희생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오늘날 조류 독감, 사스, 신종 플루, 수족구병 같은 고전염성 질병들이 지구촌을 무시로 위협하기에 역사상의 대역병인 흑사병을 되짚어 본다.


역사상 수차례 창궐한 흑사병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를 현대의 흑사병이라 일컫기도 하지만 14세기 중엽, 특히 1370년대 전후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 : 사망률이 80%에 달한 선(線)페스트와 사망률이 거의 100%였던 폐(肺)페스트로 나뉜다)은 에이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흑사병으로 알려진 괴질은 역사상 수차례 창궐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세계도 전염성이 매우 강한 괴질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특히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존망을 건 30여 년간의 펠로폰네소스전쟁 중에 흑사병 혹은 티푸스로 여겨지는 괴질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페르시아전쟁사>의 헤로도토스와 쌍벽을 이루는 고대 아테네의 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그 괴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무 까닭 없이 사람들이 별안간 심한 두통을 겪고 눈이 충혈되고 염증을 일으켰다. 증상이 더 심해져 위장에 이르면 헛구역질을 했다.” 민주체제를 확립하고 파르테논신전을 재건하는 등 전성기 아테네를 이끈 페리클레스도 펠로폰네소스전쟁 중에 그 괴질로 타계했다. 그 괴질은 아테네 인구의 1/4 정도를 희생시켰다고 한다.
14세기에 유럽을 죽음의 땅으로 변모시킨 흑사병은 확실치는 않으나 중국을 정복한 몽골족이 흑해의 크림반도 소재 카파를 공격하면서 검게 타 죽은 중국인 흑사병 사체를 성벽 안으로 던져 넣어 퍼지게 되었고(말하자면 중세판 세균전 내지 생물학 전쟁이었다), 발칸반도 남단의 ‘에게해-보스포러스해협-다나넬즈해협-흑해연안’ 교역로를 왕래하는 뱃길을 따라 이탈리아의 항구들에 전래되고 뒤이어 알프스를 넘어 중북부 유럽으로 퍼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흑사병이 인도에서 발생해 타르시스(Tharsis)와 사라센인(아랍인)를 거처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가들은 상인들의 가래침도 병균을 전파하는데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지만 특히 상선에 숨어든 쥐가 흑사병균의 주된 매개자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한다. 여하 간에 그 괴질은 1346년경 흑해, 비잔티움(이스탄불), 에게해 등을 거처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이탈리아 항구들에 전파되었다. 아버지를 흑사병으로 잃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은 이탈리아반도의 참상을 잘 전해준다. “명미하고 우아한 피렌체 거리에 죽음의 역병이 들이닥쳤습니다. 2~3년 전 동양에서 발생해 숱한 인간의 목숨을 빼앗은 후에도 그냥 정지할 줄 모르고 차차로 만연하여 마침내 여기 서방에까지도 화를 뿌려가며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탈리아를 강타한 페스트는 곧바로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 독일 • 영국 등 유럽을 휩쓸었다. 잘 알려져 있지만 흑사병이 내습한 시기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문화를 꽃피우던 중이어서,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를 비롯한 다수의 이탈리아인들이 알프스를 넘어 중북부 유럽으로 여행했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수의 중북부 유럽인들 역시 학문적, 문화적 일이나 교역을 위해 이탈리아를 향해 알프스를 넘나들었다.
14세기의 흑사병은 한 차례의 습격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한동안 거의 주기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유럽을 유린했다. 1348~1350년에 한 차례 창궐한 흑사병은 1360~1363, 1371~1374, 1381~1384에도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을 공포에 빠뜨렸다. 수치는 조금씩 틀리지만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거의 전 유럽에 걸쳐 인구가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 감소됐다. 그 무렵의 이탈리아 <연대기> 작가 M. 빌라니에 의하면 페스트로 인해 이탈리아의 인구는 60% 정도 줄었다. 보카치오에 따르면 피렌체에서도 10만명 이상이 죽었다(당시 피렌체 인구는 10만 전후로 평가되므로 꽤 과장된 것 같지만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베네치아의 경우도 심할 때는 하루 5~6백 명이 희생되는 등 18개월 동안 인구의 60%가 흑사병으로 죽었다. 알프스 이북에서도 흑사병은 엄청난 수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독일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각각 주민의 50~66%와 70%를 잃었다. 영국의 브리스톨 역시 인구의 1/3을 잃었다. 주민 15~20만 명의 파리에서 심한 때는 하루에 800명이 죽었다고 한다. 프랑스 부르고뉴(부르군드)의 한 교구 기록부는 1200~1500명의 마을 사람들 중 615명이 1348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흑사병으로 죽은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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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도 흑사병을 피해가지 못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염병은 곤궁한 하층민들이 사는 무질서하고 불결한 거리에 즐겨 찾아드는 법이라 하층민의 희생이 무엇보다 컸지만 상류층 사람이라고 해서 흑사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아라곤의 피터 4세의 왕비 엘레노르, 영국 에드워드 3세의 공주 요안, 캔터베리대주교 스트레드포드, 페트라르카의 영원한 연인 라우라 등이 그들이었다. 아비뇽 교황청(주지하듯이 1309년 이후 70년간 교항청은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의 아비뇽에 있었다)의 고위 성직자들도 1/4로 감소했으며 추기경들도 1/3이 흑사병으로 희생되었다. 마르세유 서쪽 지중해연안 프랑스 도시 몽펠리에에 있던 도미니쿠스 수도원의 경우 140명의 수도사 중에서 7명만이 생명을 보전했다고 한다. 의사들도 흑사병엔 속수무책이어서 몽펠리에 서쪽의 지중해 연안 도시 페르피낭에서는 9명의 의사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이 흑사병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만 흑사병은 사회와 경제의 구조를 파괴하고 윤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촌락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 교회와 신자 사이의 관계도 무너져 갔다.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심지어 가족관계도 파괴해 버렸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가 하면 형이 동생을,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생존자는 “사람들은 이제 주검에 대해 죽은 염소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작업장의 대부분이 문을 닫았는가 하면 곳곳에서 경작지가 황무지로 변했다.
의학 수준이 낮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페스트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컸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 아니지만 괴상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그런 뜬소문은 사람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 다시 <데카메론>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그것이 천체 운행의 작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죄과에 대한 정당한 노여움으로써 신께서 인간에 내리신 것이지….” 의사든 아니든 괴질의 원인을 옳게 파악한 사람은 없었다. 엉뚱하게도 개와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의심해 닥치는 대로 죽여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가 하면 이상하고 근거 없는 예방법이나 치료술에 매달렸다.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란 말이 나돌았으므로 공기를 맑게 하기 위해 약초를 태우거나 향기를 내는 수지(樹脂)를 흡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페스트 사망자의 방문을 못질하거나 환자의 물건을 태워 없애기도 했다. 자신의 둘레에 항상 불을 피워두려고 한 성직자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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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징벌로 여긴 대중 집단적 광기 일으켜

보카치오는 어떠한 예방법도 기도도 소용없다고 전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페스트를 신의 징벌로 여기기도 했다. 위의 빌라니에 따르면 신은 자비롭지만 일련의 재앙을 통해 인간의 사악한 범죄를 징벌하는데 흑사병도 신이 내린 징벌로 보았다는 것이다. 파리대학 의학부는 토성, 목성, 화성이 이례적으로 물병자리궁에 모여 뜨겁고 습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지구가 독한 유기체를 발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혹은 1345년에 혜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심지어 마법사들이 주문 외우기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번에도 집단 히스테리의 제물이 되었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났을 때 내부의 적으로 지목되어 한 차례 살육과 약탈의 제물이 되었고 후일 히틀러에 의해 민족말살의 수난을 당한 유대인은 14세기 중 • 후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도 집단적 광기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다. 페스트가 모종의 독에 기인한 것으로 믿은 자들은 그들이 미워하고 시기해온 유대인을 의심했다. 유대인들이 고의적으로 샘이나 수원(水源)에 독약을 풀어 넣어 페스트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군운동 때와 같이 흑사병이 창궐할 때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1924년에 관동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자, 잔학한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방화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무고한 한국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육한 관동대지진사건을 생각하게 하는 만행이었다. 교황 클레멘트 6세가 똑같이 페스트의 피해를 당하는 유대인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포고문까지 발표했으나 기독교도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대인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유대인을 생매장하거나 불 속에 던져 죽이는 등의 집단광기 외에 자학고행도 등장했다. 페스트를 신의 징벌로 여긴 자들이 육체적 고통을 통해 신의 노여움을 풀어 역병을 피하려는 행위였다. 십자가와 가죽끈을 손에 잡은 전라 혹은 반라의 남녀가 성가를 부르며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의 거리거리를 돌아다녔다. 중세에는 여자도 벌거숭이로 밖에 나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은 듯하지만, 흑사병에 대한 공포와 자학적 광기가 심리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못되었다. 그들은 군데군데에 매듭이 있고 못이 박혀있는 가죽끈으로 자신들의 몸을 줄곧 내려치면서 거리를 떼 지어 돌아다녔다. 피가 흐르다 못해 피부가 찢기고 살이 뜯기는 편타(鞭打)고행이었다. 페스트와 함께 그 기상천외의 고행이 프랑스, 독일, 영국, 스웨덴 등 유럽 각지에서 유행했다.
동방으로부터 전래된 흑사병은 1380년대 이후 알게 모르게 사라졌다(흑사병에 관한 유럽의 마지막 기록은 1771년에 6만 명을 희생시킨 모스크바의 흑사병이다). 1350~80년대의 흑사병이 그 자취를 감춘 것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상의 괴질이 대개 그러하듯 알게 모르게 수그러들었던 것 같다. 아마 계절의 변화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결국은 극복했겠지만 흑사병이 더 오래 창궐했을 경우 지중해연안과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근대 이후 세계사를 선도한 유럽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왕성한 창조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인적 드문 땅이 되지는 않았을까? 또한 그러했을 경우 흑사병의 피해는 유럽에 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흑사병은 유럽에 전래된 경로를 따라 동양으로 되돌아와 동북아시아까지 포함한 아시아 인구의 반을, 혹은 그 이상을 죽음으로 내몰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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