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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북도 남북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남북전쟁에서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가정적 접근은, 기존의 역사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사가들은 대체로 피하려 하지만,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옳게 인식하는 혜안을 기르게 한다.

“갓 독립한 미국, 남북전쟁에서 어느 편도 승리하지 못해 결국 북부와 남부로 갈라서다.” 물론 가정해 본 이야기다. 주지하듯이 미국은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어 남북전쟁(1861~1865)이란 심각한 내적 도전을 잘 극복했고, 더불어 초일류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이 북부-남부의 분열을 고착시켰을 경우 오늘의 북아메리카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성장해가던 미국 또한 마냥 순풍만을 노래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부딪친 내외의 여러 도전 중에서도 흑인노예 문제는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을 넘어 드디어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처절한 싸움을 벌이도록 했다. 남부에서는 인구의 5%에 불과한 백인 지주들이 400만 명을 넘어서는 흑인노예를 사역해 담배 • 목화 •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이른바 재식(栽植)농업적 대농장을 경영했다. 영국이 선도한 산업혁명으로 원면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는 가운데 새로운 품종의 면화가 들어오고 씨아가 발명되면서 남부의 면화농업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초기에는 주로 해안지대에서 이루어지던 담배재배 또한 미시시피강 유역의 주들을 거쳐 마침내 텍사스주까지 확산되었다. 한편 루이지애나 동남부의 기름지고 따뜻한 지역에서는 사탕수수재배가 성행했다. 루이지애나는 1830년에 이르러 미국 전체 사탕수수의 절반을 생산했다.
반면 북부지방은 철과 석탄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해 방직 • 제지 • 금속 등의 공업을 발전시켜 갔다. 따라서 북부는 영국 공산품 유입을 막기 위해 남부와 달리 보호관세정책을 지지했다. 거기다 북부는 흑인노예문제와 관련해서도 흑인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남부와 달리 보다 신축적 태도를 보이다가 점차 흑인노예를 해방시키는 쪽으로 기울었다.
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 지향적이던 연방당(후일의 공화당)은 북부 공업지역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반면 지방분권 지향적이던 공화민주당(후일의 민주당)은 남부 농업지역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사실 독립 후 정부를 조직할 때부터 정치지도자들은 연방파와 반연방파로 나뉘었다. 첫 정부의 국무장관 제퍼슨이 이끈 연방파와 재무장관 해밀턴이 이끈 반연방파 사이의 대립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해밀턴은 보다 긴밀한 연방,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했고 제퍼슨은 보다 광범위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원했다. 또한 해밀턴은 무정부상태를 두려워해 질서와 보다 효율적인 중앙정부에 관심을 둔 반면, 독재를 두려워한 제퍼슨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단체는 자치권이 있다”는 신조에 따라 폭넓은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했다. 연방파와 반연방파는 점차 정당형태로 발전했다.
하지만 미국은 연방파와 반연방파의 주장을 융합하고 조절해 나가는 예지를 발휘해 삼권분립에 입각한 공화제 헌법을 만들어 각 주에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되 중앙정부가 각 주를 통할하게 했다. 또한 상 • 하원으로 구성된 연방의회에 입법권과 과세 동의권을 부여하고, 연방 최고재판소와 주 재판소가 사법권을 갖도록 했으며, 행정권은 4년 임기의 연방 대통령이 행사하도록 했다.
미국의 연방헌법은 그처럼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지만 그렇다고 초기의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영토가 넓어지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각각 대체로 연방과 반연방을 지향했다. 남부의 지주들은 ‘5분의 3 타협’에 의해 선거권이 없는 흑인노예를 포함시킨 인구비례로 하원의석을 배정받아 정치적으로도 특권을 행사했다. 특히 흑인노예가 남부만이 아니라 서부에서도 증가하면서 신주(新州)가 노예주 자유주(非노예주) 중 어느 쪽으로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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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를 택한 이른바 노예주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자유주는 서부개척으로 새로운 주가 생길 때마다 자기 쪽으로 넣으려고 다퉜다. 각 주는 2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신 주의 향방은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1818년에 자유주인 북부의 일리노이주가 연방에 편입돼 노예주는 10개, 자유주는 11개였으나 앨라배마주가 노예주로 편입되어 노예주와 자유주는 동수가 되었다. 그때 미주리주의 연방편입문제가 대두했다. 북부에서 자유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미주리의 연방가입을 반대한다고 한 것이다. 전국적 항의가 발생하는 등 한동안의 폭풍이 지난 뒤 타협이 이루어졌다. 미주리주는 노예주로 연방에 들어가되 메인주를 자유주로 넣었던 것이다.
1845년에 텍사스가 미국의 영토로 되고 멕시코전쟁으로 서남부에 넓은 새 영토가 생겼다. 그리고 1848년 1월에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1년 만에 8만 명의 ‘포티나이너(Forty niner)’를 등장시킨 ‘골드러시’를 낳았다. 이미 텍사스가 노예주로 편입되었으므로 뉴멕시코 • 유타 • 캘리포니아주의 향방은 매우 중요했다. 역시 첨예한 대립상태 끝에 타협이 이루어져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하되 뉴멕시코와 유타는 노예제에 대한 언급 없이 준주(準州)가 되게 했다.
경제적, 사회적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한 북부와 남부의 갈등과 대립은 그처럼 노예문제로 인해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노예폐지론자인 공화당의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갈등은 대립을 넘어 전쟁으로 발전했다. 켄터키주의 빈농 출신 링컨은 이미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1858년 7월) 남북 대립상태에 대한 자신의 기본신념을 토로했다.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집안은 오래갈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半노예와 半자유를 영원히 지탱해 갈 수 없다고 믿는다.…(중략)… 나는 분열상태가 종결되리라 기대한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
노예해방주의자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서려 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대표자회의는 “이로써 미합중국이라는 이름 아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다른 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방은 해체됐다”고 선언했다. 남부의 다른 주들도 사우드 캐롤라이나주를 따랐다. 그리고 1861년 2월 남부 7개 주는 아메리카연방, 즉 남부동맹을 결성했다. 남부동맹은 분리 독립을 선언한 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어 수도를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에 두는 ‘아메리카연합’을 조직하고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한 다음 미시시피 출신의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자신들의 국기를 내걸었다.
링컨은 남부동맹이 결성된 1개월 뒤인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연설에서 이탈한 주들의 복귀를 요청하면서 연방의 결속을 호소했지만 버지니아와 아칸소 등 4개 주가 가담해(4월 17일) 아메리카연합은 11개 주로 늘어났다. 버지니아주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헌법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공헌을 했으며 5명의 대통령을 낸 주 아닌가?
전쟁을 피하려던 링컨의 노력도 헛되이 외국무기를 구입하는 등 전쟁준비를 서둘러온 남부가 북부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은 비극적 내전에 휩싸였다. 처음 수세에 몰렸던 북부는 다수의 인구(남부 11개 주 9백만 명의 두 배를 넘는 23개주 2200만 명) 및 우수한 공업력과 해군력으로 점차 남부를 제압해 갔다. 전쟁 중에 링컨이 ‘노예해방령’을 선포하자(1863. 1. 1) 흑인노예들이 다수 북부로 도주해 남부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게다가 남부가 믿었던 영국도 국제 여론 등을 의식해 개입을 포기했다.
북부는 결국 우세한 해군력으로 남부의 해안을 봉쇄하여 남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특히 1863년 7월 1~3일의 게티스버그전투 이후 북군의 우세는 확고해졌다. 군대를 증원한 양측이 사흘 동안 처절한 싸움을 벌인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스버그전투에서 남군은 투입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8000여 명이 전사 혹은 부상했고 북군도 2만 3000여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4개월 뒤인 11월 19일, 격전지 게티스버그 국립묘지 개관식에 참석한 링컨은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하리라는 것,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그리고 한때 남군이 북군에게 ‘치욕’을 안겨준 셰넌도어계곡회전도 4년 만인 1865년 3월에 결국 북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은 결국 그다음 달에 끝났다. 그랜트 장군 휘하의 북군은 1865년 4월 3일에 리 장군 측의 저항을 일축하고 남부동맹(아메리카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함락시킨 뒤, 9일 리 장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4월 13일, 워싱턴시에서는 환희에 젖은 군중들이 시가지를 누볐다. 노스캐롤라이나로 진격한 셔먼장군 휘하의 북군도 4월 26일에 존스턴의 항복을 받았다. 그로써 내전은 끝났다. 남군의 수송력과 전쟁물자상의 열세 및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도 북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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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62만여 명, 부상자 50만여 명(북군은 155만 6000명 중 35만 9000명이 전사하고 27만 5000명이 부상당했고 남군은 80만 명 중 25만 8000명이 전사했으며 22만 5000명이 부상당했다)에 전비가 150억 달러에 달한 남북전쟁의 뒷수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전쟁의 총성이 멎은 며칠 뒤인 4월 14일에 링컨이 남부의 광신적 청년 J.W.부스에게 피살됨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됐다(남군으로 참전한 부스는 소수의 공모자와 함께 링컨을 워싱턴의 한 하숙집에 납치하려 했으나 계획을 변경해 링컨을 정부의 고위 인사들과 함께 암살하기로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한 15일 아침, 시인 제임스 로웰은 “모두가 경악했던 4월의 아침처럼,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나본 이 없는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린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썼다.
전후 10여 년 동안 군정이 실시된 남부는 혼란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 섬멸전과 다름없는 격전을 치른 뒤의 재통합은 평탄한 길은 아니었고 일부 사람들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았지만 미국은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남북이 융화하여 국가적 재통합을 이루어냈다. 남북전쟁은 내란적 전쟁이 흔히 그랬던 것과는 달리 보복 • 처형 • 추방 등을 불러오지 않았다. 전쟁 중인 1864년에 재선된 링컨은 남부동맹이 항복하기 3주일 전에 행한 두 번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전략)…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자비심을 가지고 …(중략)…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이 나라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싸움하러 나간 이와 전쟁미망인과 고아를 돌보기 위해 …(중략)… 우리 다 같이 힘써 나갑시다”라고 말했다.
미국 의회는 1868년에 아칸소,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루이지애나, 조지아, 앨라배마, 플로리다 등 7개 주의 연방 재가입을 승인했다. 의회는 또한 1872년에 포괄적 사면령을 통과시켜 남부동맹 동조자 500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정치권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북부 사람들은 전쟁 중에 “제퍼슨 데이비스를 풋사과나무에 매달아라”고 외쳤으나 데이비스는 교수형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는 2년간 투옥되었지만 30년을 더 살면서 자신의 일생을 정당화하는 회고록을 쓸 수 있었다.
거기다 항용 패배자의 몫인 망명이나 추방도 거의 없었다. 남부의 병사들도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북군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그랜트 장군은 한 회의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하 장병들의 소란스런 시위를 중단시키면서 “반란군들은 이제 다시 우리나라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랜트는 물론 남부의 실패한 영웅 리 장군 또한 뛰어난 영도력과 위대한 패배를 통해 널리 존경받았다.
제2의 아메리카혁명으로도 불리는 남북전쟁에서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미국은 어떤 모양일까? 아마도 북부 미국과 남부 미국으로 분열되어 대치해 왔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북미대륙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초일류 강국으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랑해온 미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세계사도 상당히 다르게 흘러왔을 것이다. 특히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과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미국이 1, 2차 대전에 연합국 편에서 참전하지 않았을 경우 1, 2차 대전은 훨씬 더 장기화했거나 독일의 세계제패 꿈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전개된 동서냉전도 없었거나 다르게 진행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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