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간 가장 성공한 뮤지컬
많은 영화팬을 울린 원작 영화의 대본을 쓴 리 홀과 감독을 맡았던 스티븐 달드리, 영화사 워킹타이틀사는 이를 뮤지컬로 만들기로 하고 두 원작자는 직접 뮤지컬 각색 작업도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에 내한공연도 가진 바 있는 세계적인 가수 겸 작곡가 엘튼 존이 합류해 뮤지컬 흥행 신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뮤지컬의 본 고장인 뉴욕과 런던, 대서양 양쪽에서 올리비에상과 토니상에서 모두 작품상을 포함해 주요 부문을 휩쓸며 최근 10년간 가장 성공한 뮤지컬로 기록된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 8월 13일, 드디어 우리말로 된 라이선스 공연이 개막했다. 동양에서 뮤지컬의 최대 시장인 일본보다도 앞서서 아시아 초연 기록도 세웠다. 오디션을 포함해 총 제작기간은 3년, 총 제작비는 135억 원이 든 대작이다.
이 작품은 2시간 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춤, 노래, 연기의 3박자를 두루 갖춘 10대 초반 빌리 역의 배우가 시종일관 극의 정중앙에 서서 객석을 울고 웃게 만든다. 보통 아역배우들이 성인 뮤지컬에서 조연 이상의 역할을 맡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이는 분명히 새로운 관극 체험이기도 하다. 그만큼 주인공 빌리 역을 맡은 소년의 역량에 작품의 성패가 상당 부분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아시아 초연돼
우리나라에서도 800대 1의 경쟁률로 ‘대한민국 1대 빌리’ 오디션을 거쳐 4명의 빌리(김세용, 이지명, 임선우, 정진호)를 선발했다. 발레와 탭댄스을 구사하면서도 150㎝ 이하의 키여야 하고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빌리들이다. 이들은 개막전까지 1년 4개월여 동안 ‘빌리 스쿨’에서 화술, 노래, 발레, 탭댄스, 아크로바틱을 집중적으로 트레이닝 받으며 화려한 백조로의 비상을 준비했다. 개막을
장식한 이지명(13) 군은 <라이언 킹>에서 주인공 심바의 아역을 맡은 경험이 있는데다가 일취월장하는 춤 실력을 선보였다. 특히 빌리가 무대에서 관객을 집중시키는 주요 장면을 큰 실수 없이 매끄럽게 소화해냈다. 가령 빌리가 친구 마이클과 함께 옷장을 배경으로 벌이는 정통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쇼, 오디션이 좌절되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이는 ‘앵그리 댄스’, 2막 초반 소년 빌리의 환상 속에서 차이콥스키의의 ‘백조의 호수’에 맞춰 성인이 된 발레리노 빌리와 함께 공중에 매달려 벌이는 아름다운 2인무, 로열발레학교 오디션장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춤에 대한 열정을 설명하는 ‘일렉트릭시티’ 등 주요 명장면을 무리 없이 연기해내며 더 이상 아역배우가 아닌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거듭났다. 결정적인 고비 때마다 등장해서 빌리에게 위안을 주는 죽은 어머니의 환영과 절절하게 조우하는 장면에서도 큰 무리 없이 드라마에 몰입한다.
뛰어난 아역 배우들이 완성도 높여
이 작품은 외면적으로는 빌리의 성공기가 중심이지만 그 배경에는 여러 겹의 스토리텔링이 있다. 특히 1980년대 영국에 실재했던 정치 상황을 가감 없이 소개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 전체 에너지 생산의 75%를 석탄이 차지하면서 광산노조 역시 막강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1984년 마거릿 대처 총리가 연임해 집권하던 시절 석탄의존도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결국 대처 총리는 파업에 돌입한 노조와 1년간이나 대치하면서 항복을 받아냈고 광부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대처는 오늘날 영국 경제를 살린 정치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철권 정치는 석탄과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작가이자 사회주의자인 리 홀은 바로 그 시대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뮤지컬 무대에서 파업이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는 다루기 어렵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데모에 나선 노조원들과 이를 진압하는 무자비한 경찰과의 대치 상황도 등장한다. 하지만 과격한 장면도 유머를 머금은 유려한 대사와 두 집단의 극명한 대조를 활용한 연출로 긴장을 이완시킨다.
가령 스티븐 달드리는 원작 영화에서 발레 교습장에 가는 아이들과 그 길목에 서 있는 방패든 경찰들의 모습을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한 무대 위에 노조원들의 파업 현장과 빌리의 발레 수업을 병치시키는 뛰어난 연출력을 발휘했다. 또한 피터 달링의 안무는 정교하게 잘 추는 앙상블 배우를 위한 눈요기의 용도가 아니라 생활 속의 움직임을 기승전결을 갖춘 드라마틱한 동선에 실어 보여주려는 의도로 짜여졌다. 앙상블은 때로는 곤봉과 방패를 이용한 경찰관의 춤이 되었다가 탄광촌 주민들의 엉뚱한 발레와 어우러지며 결국은 화해와 인간애라는 작품의 주제를 극명하게 부각시킨다.
빛나는 빌리 역의 배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른’들의 연기와 노래는 아쉬운 점이 있다. 빌리의 가족을 제외하고 나머지 앙상블은 대부분의 장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연기 톤을 보이고 있으며 가창 역시 불안한 하모니를 보인다.
일부 장면에서 다소 과격한 욕설이 여과 없이 보여지는 것도 한국화 과정에서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원작의 설정에서 보이는 사투리를 처리하는 점도 부자연스럽고 동성애에 관련된 유머 역시 번역 과정에서 사라진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사실 이 작품은 원작 영화에서부터 빌리가 동성애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절친한 친구 마이클이 여장을 즐기는 동성애자이지만 빌리는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키스를 해주는 대신, 발레교습소 선생의 딸 데비의 애정공세는 단호히 거절한다. ‘발레는 호모나 하는 것이지만 내가 되고 싶은 루돌프 누레예프(러시아 출신의 유명 발레리노)도 그랬어’라는 내용에도 사회적 약자인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웃음폭탄 하나가 번역과정에서 사라졌다. 빌리가 로열발레스쿨에서 받은 합격통지서 겉면을 읽는 장면에서 “William Elliot is queer?”(아버지 윌리엄 엘리어트는 게이?)라고 발음하는데 당황한 아버지가 이렇게 정정해준다. “William Elliot Esquire!”(윌리엄 엘리어트 귀하!)라고. 이는 사투리 유머와 게이 유머가 결합된 명장면이지만 한국 공연에서는 욕설로 대치됐다.
엘튼 존의 음악도 다른 요소의 완성도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있다. 차라리 원작 영화에서 작품의 색깔을 결정했던 반항적인 색채의 영국 록그룹 T-Rex나 Clash 스타일의 음악이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한국인 ‘빌리 엘리어트’가 완성도 높은 원작과 이에 뒤지지 않는 소년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진 오랜만에 볼만한 신작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무대는 별다른 화려한 장식이 없이도 충분히 힘 있는 뮤지컬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 시대의 그 장소를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낡은 연습실과 집안의 모습은 뮤지컬이라는 무대장르가 관객에게 항상 알록달록하고 달달한 환상만을 전달하는 들떠 있는 작품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깊이 뿌리박은 휴먼스토리이자 내면을 반추하는 거울이 되는 작품들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객석에는 성인 관객들이 동반한 빌리의 나이와 엇비슷한 10대 청소년들이 많이 눈에 띈다. 나라와 시대는 다를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단한 노력을 통해 기필코 이루어내는 빌리의 모습과 그 역할을 해내는 한국 빌리 배우들의 땀을 보면서 우리의 어린 관객들도 무언가를 얻어서 극장을 나설 것이다.
내년 2월 27일까지. 문의 = 154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