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 직접 체험이 한 사람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 격언이 학교 교육과정에도 반영된다. 학생들의 체험활동 촉진을 교육과정에 반영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종전의 특별활동과 창의적 재량활동이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통합되고 시수가 늘어났다. 창의적 체험활동의 한 영역으로 진로체험이 자리 잡으면서 진로교육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 교육 현실에서 체험을 통한 변화를 교육의 중심에 놓는 일에는 여러 가지 도전이 따른다. 체험활동이 중요한 교육활동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실 여건에 대한 꼼꼼한 진단에 기초해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변화를 계획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직업체험 실태를 통해 현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체험활동의 현실을 파악해 보고,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진로교육이 발전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 본다.
학교 직업체험 실태를 통해 본 체험활동의 현실
학교 직업체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고용정보원이 2010년 전국 약 1000여 개 중 ·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직업체험 실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중 특징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자. 우선 대부분 학교들이 직업체험을 실시하지만 비정기적으로 하고 있다는 응답이 높았다(74.3%).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정기적으로 직업체험을 실시하는 학교는 25% 내외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대도시일수록 정기적으로 하는 비율이 높고 읍면 지역일수록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비율이 높아 지역 간의 격차도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학년별 실태를 보면 중학교에서는 고학년일수록 직업체험 실시비율이 높아지고, 고등학교에서는 고학년일수록 실시 비율이 낮아지고 있었다. 이는 중학교는 고학년이 될수록 진로선택과 관련된 직업체험이 중요해지고, 고등학교는 고학년이 될수록 입시와 관련된 교과학습에 몰두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직업체험 실시 방법에 대한 조사결과도 흥미롭다. 학교에서 직업체험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은 ‘직업동영상 등 시청각 자료 활용(88.0%)’이며 그 다음이 ‘직업인 초청 특강(61.1%)’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호응도를 살펴보면 가장 많이 실시되는 시청각 자료 활용 교육에 대한 호응도가 가장 낮고(75.5점) 실시 비율이 가장 낮은 직업현장에서의 직접 체험에 대한 호응도가 가장 높은(82.3점)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활동에 대한 호응도가 낮다
.(<그림 2>, <그림 3>새교육 참조)
학생들의 호응도가 낮은 방법이 가장 많이 쓰이는 이유는 그것이 손쉽기 때문이다. 직업체험 활동 실시의 용이성에 대한 질문에 교사들은 시청각 자료의 활용이 가장 손쉽다고 답변했다. 시청각 활용 교육방식이 손쉽다는 응답은 58.2%였지만, 직업현장 체험이 손쉽다는 응답은 7.1%에 불과했다.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체험,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직업현장에서의 직접적 체험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자원과 연계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직업체험의 어려운 점 1순위로 ‘활용시설이나 기관의 부족’이 꼽혔다(33.4%). 지역사회 자원을 활용하는 학교의 비율도 높지 않다. 직업체험을 위해 지역사회 자원을 활용하는 학교는 39%에 불과해 아직 상당수의 학교가 지역사회의 자원을 직업체험을 위해 연계하거나 활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비율은 대도시에서 읍면 지역으로 갈수록 떨어져서 직업체험에서 지역사회 자원의 활용에 있어서도 지역 간 격차가 나타났다. 그러나 향후 직업체험 활동 운영계획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교가 지속적으로 운영할 것이라 응답했으며, 새로운 직업체험 기관이나 프로그램이 제공될 경우 참여 의사도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현장에서 일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일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학습 동기를 높이며,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실제적 감각 같은 것을 익힐 수 있어 교육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활동이다. 문제는 직업체험이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교실 수업보다 몇 배의 부가적인 노력이 따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예산, 체험 현장 연계, 학생들의 안전, 시간 확보 등 다방면의 노력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직업체험의 유용함이나 중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학교에서 시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 결과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직업체험을 실시하는 학교의 비율은 늘어나지만 여전히 체계성이 떨어지며, 체험활동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학교 안의 교실 수업이 여전히 대부분이고, 지역사회와의 연계는 미흡하다. 지역사회 역시 다양한 기관들이 교육장 역할을 수행할 여건이 아직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실태는 학교의 현실 여건을 반영한 것이어서 창의적 체험활동 영역에 포함된 자율, 동아리, 봉사 활동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교과교육에서 진로교육 요소 강화돼야
진로교육은 먼 미래의 직업 선택 결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삶을 자립적으로 살아갈 능력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길러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진로교육은 교육의 한 영역이라기보다는 학교 교육과정 전반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원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인식한다면 우선 교과교육에서 진로교육 요소가 강화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과 수업이 진로교육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거꾸로 자신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교과에는 청소년들이 흥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면 직업인 특강이 꼭 진로 활동 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수업시간에 교과와 관련된 직업인을 초청해 특강을 듣거나 관련된 기관을 방문한다면 교과에 대한 흥미는 더 높아질 수 있다. 또한 교과별 프로젝트 학습을 통해 관련된 직업세계를 탐색하거나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창의적 체험활동 영역 간의 통합도 필요하다. 창의적 체험활동은 자율, 동아리, 봉사, 진로 활동으로 나누어 제시되고 있지만 실제 활동에서는 이 영역들이 중층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동아리별로 관심 직업기관을 탐방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복지기관 종사자들의 직업현실을 이해하는 식이다. 제한된 체험활동 시간을 영역별로 다시 분할하지 않고 여러 활동을 연계할 때 교육 효과는 배가될 수 있다.
무엇보다 진학지도가 진로지도로 통합되어야 한다. 창의적 체험활동시스템(
www.edupot.go.kr)과 입학사정관제 등의 도입으로 진학지도와 진로지도의 통합을 위한 환경이 마련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관심과 적성에 기반을 둔 진로지도를 진학지도와 적극적으로 연계해야 할 것이다.
학부모, 지역 기관 등 사회 자원 적극 활용
지역사회는 체험활동과 진로교육을 위한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진로교육은 삶과 일의 경험에 대한 교육이므로 실제 다양한 직업인들과 일터들을 연계하는 활동이 필수적이다. 가장 접근이 쉬운 것이 학부모 자원이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학부모들을 직업인 특강 강사로 초대하거나 체험활동 멘토 역할을 하도록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학교의 학부모 자원이 많지 않다면, 자원자 발굴은 개별학교에서 하되 교육지원청 단위로 학부모 강사단을 만들어 교육지원청 명예교사로 임명하고 관내 학교들이 공동으로 활용하도록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방법을 고려할 만하다.
직업체험을 반드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네의 작은 가게, 공방, 중소기업들이 청소년들이 현재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일터이며 앞으로 선택할 일터일 가능성이 더 높다. 지역별로 상가번영회나 소상공인 연합회 등의 단체와 연계해 소규모 체험활동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개별학교의 노력보다는 자치단체의 적극적 지원과 개입이 필요하다. 국가적으로는 직업인들의 재능기부 운동이나 사회기관의 교육기부 운동을 확산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적 자원 격차 해소를 위한 지원 필요
체험활동은 학교의 담장을 넘어서서 지역사회의 자원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에, 사회적 자원이 빈약할 경우 체험활동이나 진로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사회문화적 자원의 대부분이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어 농어촌 지역이나 중소도시의 체험 자원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농어촌 지역 학교에 체험활동을 위한 차량이나 차량 운영비를 지원해준다면 체험 시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비수도권과 중소도시 등 소외지역 우선으로 소규모 지역사회 직업체험관을 개설하고, 전국 순회 운영이 가능한 이동식 직업체험관을 설치한다면 지역 간 격차 해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문화가정 및 경제적 소외계층 청소년을 위한 진로 멘토링 프로그램도 지원해야 한다. 대학생들을 멘토로 연결하고 이들이 단순 학업지도가 아니라 일정한 교육을 거쳐 진로 · 진학 멘토로 활동하도록 하고 봉사 점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이나 견학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비용이 필요한데 현재 학교 예산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한 학생 개인 부담으로 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체험활동에 대한 예산지원을 대폭 확대하거나, 청소년들의 체험활동을 위해 무료 개방하는 기관과 프로그램들이 늘려야 한다.
진로활동 전반을 기획 · 운영할 전담교사 배치해야
교사의 역량과 전문성은 진로교육 발전의 핵심 요건이다. 우선 교장, 교감 등 학교 경영자 진로연수가 확대되어야 한다. 또 아이들을 직접 만나는 교사들은 진로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담당 교과가 직업세계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의 일일 직업체험처럼 교사를 위한 일일 직업체험 프로그램(Teacher’s shadowing)이 있다고 한다. 수학 교사라면 수학적 능력이 요긴하게 쓰이는 직업현장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도 교과별로 관련된 직업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안내 및 연계 시스템이 마련되고, 교과 교사와 관련 직능단체와의 네트워크가 활성화된다면 교사들의 진로지도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담임교사 진로지도 연수, 진로상담 교사 연수 등 진로지도 관련 교사들에 대한 연수가 지금보다 대폭 확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 교사들의 진로역량이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교과 영역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따라서 ‘진로와 직업’ 교과를 담당하고, 진로활동 전반을 기획 · 운영하며, 진로상담을 담당할 진로 전담 교사를 양성 · 배치할 필요가 있다.
체험활동은 교과 수업과 떨어진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지식을 학생들의 경험 안에서 재구성해내는 수렴점이자 학습에 대한 동기를 새롭게 부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필자가 만났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체험활동의 교육적 위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직업체험은 모든 것을 한 방에 끝내는 것 같아요. 갔다 오면 확 달라져요. 직업 동영상을 그렇게 보여주고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다 한 후에 수행평가 보고서까지 내도록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딱 체험하고 오면 그 자리에서 달라져요. 체험이 가장 확실합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체험활동과 진로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초기 단계이기는 하나 진로교육을 발전시키려는 다양한 지원책들도 실행되기 시작했다. 체험활동과 진로교육은 학교를 넘어서서 사회를 교육적으로 재구성해 낼 때 가능한 일이다. 개별학교, 가정, 지역사회의 연계와 협력이 더 공고해지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이를 지원할 정책들이 꾸준히 시행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