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쌓은 업보 1937년생, 우리나라 나이로 일흔 다섯이다. 고희를 넘어 망팔(望八)에 이른다. 45년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 학교는 누구 말마따나 청춘을 불살랐고 이 한 몸을 다 바친 곳이다. 있을 때나 떠났을 때나 미운 정, 고운 정이 싸락눈처럼 쌓인 내 마음의 안식처였고 죽어서도 내 영혼의 영원한 본향(本鄕)인 학교를 10년 전, 눈물을 삼키며 떠났다. 정신적으로 실향민(失鄕民)이 된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아참, 내가 퇴직을 했지?’하면서 되돌아오기를 여러 번 했고, 밤마다 교실 가득히 선생님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연구수업을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무료해서 둔해진 몸을 이끌고 어슬렁어슬렁 강가로 나가보았다. 형형색색의 자동차들이 물고기 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주한다. 어디를 가는 것일까. 뾰족한 모자를 멋스럽게 쓰고 유니폼을 곱게 차려 입은 남녀들이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린다. 모두 바쁜데 나만 하릴 없이 망부석처럼 강가에 서서 물그림자만 응시하고 있다. 아무도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는 사람이 없어 더 서글펐다. 불현듯 자식 생각이 났다. 남들은 아들 셋을 두어 부럽다고 했지만 모두 짝을 지어주었더니 두 놈은 태평양을 건너가고 한 놈만 한국에 남았는데 신통치 않다. 어쩌다 한 번 전화하는 일 말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오는 일도 거의 없다. 한동안 나는 자식의 효성이 부족한 점을 탓했지만 이젠 그런 유감조차 없어졌다. 이제 불혹(不惑)을 넘긴 자식에게 지금 와서 새삼스레 효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니라면 친구다. 친구뿐이다. ‘친구 셋을 잘 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인생인 것 같다. 불러 주는 사람도 없고 부를 사람도 없다. 내 것 남 줄 줄 모르고 남의 것 탐내지 않으며, 내 것 내가 먹고 네 것 네가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세상을 살았다. 딴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구가(謳歌)한다고 여겼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실패가 아니라 참패한 인생이었나 보다. 허심탄회(虛心坦懷)할 친구가 한 명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내 친구는 부지기수(不知其數)다. 초 · 중 · 고등학교에 대학, 대학원의 학연(學緣)에다가 충청남도 출신의 지연(地緣)뿐만 아니라 직장을 오가며 사귄 직연(職緣)과 교회를 다니면서 사귄 신연(信緣), 거기에다 군대에서 사귄 군연(軍緣)까지 합친다면 족히 수십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외롭고 곤고(困苦)할 때 찾아갈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걸까. 업(業)이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나의 업보(業報)일 뿐이다.
퇴임, 그 해프닝 2000년, 나는 교원정년 단축에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다. 65세를 ‘마지노선’으로 잡고 마음으로나마 퇴직 설계를 해왔는데 2000년 2월 갑자기 61세의 나이로 물러나게 됐다. 진갑(進甲)이라면 한창 나이다. 교육계에서는 정신적으로도 성숙되었고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무엇인지 철이 들 참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에 물이 올라 아이들에 대한 애정관이 한 차원 승화될 수 있는 비등점(沸騰點)에 있을 때였다. 퇴직사실이 믿기지 않고 분해서 여의도 고수부지(高水敷地)에 모여 벌건 대낮에 주먹으로 하늘을 쿡쿡 찌르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입에 침이 닳도록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보았지만 감불생심, 그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3월 2일 개학을 하면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한 마디 당부도 하면서 점잖고 보기 좋게 퇴직을 하려고 마음먹고 화단의 나무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2월 25일, 새 교장이 발령장을 들고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한 학교에 두 교장이 있을 순 없잖은가. 다급해진 나는 그동안 하던 일에 대한 브리핑이나 인계도 하지 못한 채 이것저것 짐을 싸서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퇴임, 그 후의 방황 갑자기 퇴임을 하자마자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었는지 학교 앞 개인병원에서 나를 불렀다. 함께 퇴직했던 친구들은 대운(大運)이라며 부러워했다. 나는 병원에서 홍보 업무를 맡았다. 직원들은 나를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오래도록 선생님 소리만 듣던 내가 갑자기 이사님이 되니까 낯설고 얼떨떨한데다가 병원에서는 의학용어를 거의 약자로 말하고 업무를 추진해서 애로가 많았다. 잠잖게 교장실에 앉아서 도장만 찍던 사람이 보건소, 경찰서, 구청을 비롯해 보건복지부까지 돌아다니며 대외 행정업무를 보면서 병원 월보(月報) 만드는 일까지 하다보니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병원에서 5년을 견디다가 퇴사했다. 그리고 집에서 칩거(蟄居)를 시작했다. 내친김에 새로 공부를 해보려고 특정한 요일을 정해서 백화점의 문화센터를 찾아 재직 때부터 연주해 오던 클라리넷을 연주해 보고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걸 해서 어쩌자는 거냐’ 라고 자문(自問)하면서 손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표가 없으면 꿈도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새로운 시작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새 사업을 한다는 친구를 떠올렸다. 강남 도심 한복판에 출근한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MVNO’라고 하는 아주 생소한 사업을 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별정통신사업’이라고 한다. 일종의 무선전화기(휴대폰) 판매 사업이다. 그들에 따르면 아주 솔깃한 사업이었다. 투자하는 것 한 푼 없고 사업이 잘 되기만 하면 나는 수직상승해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전화기를 한 대 구매함과 동시에 사업자로 등록을 했다. 그때부터 그곳 사람들은 나를 ‘사장’이라고 불렀다. 홍보이사에서 사장님으로 바뀐 것이다. 마침내 내가 취업을 한 것이다. 집에서 아내의 눈치 볼 필요 없고 용돈 달라고 손내밀 것도 없다. 하는 일은 회사 스케줄에 따라 정해진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휴대폰 판매 사업을 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단말기를 팔면 거기에 따른 수입이 생기고 일정량을 채우게 되면 직급도 승진해 임원이 된다고 했다. 신나는 일이다. 나는 금세 성과를 올려 이 회사의 중역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만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집으로 돌아와 국영문(國英文)으로 명함을 찍어 사업을 시작했다. 첫 번째 고객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아내와 자식이었다. 아내를 앉혀 놓고 휴대폰을 공짜로 바꿔줄 테니 신청하라고 종이를 내밀었더니 펄쩍 뛴다. 회사에서 배운 대로 전화요금이 어떻고, 나중에 이익이 되는 것은 어떻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내 가족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는데 처음부터 벽에 부닥치고 말았다. 집 안의 조카, 처가를 비롯해 친인척들을 있는 대로 찾아갔어도 모두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거절했다. 어깨에서 힘이 쪽 빠졌다. 하는 수 없이 제자들을 찾았다. 검찰청에 있는 제자를 찾아갔더니 강남의 아주 그럴듯한 음식점에서 거하게 한 상 대접하며 “선생님, 그 회장이란 놈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좀 알아오세요. 틀림없이 다단계 사기꾼일 겁니다” 하면서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면서 녀석은 내가 불쌍하고 측은지심이 들었는지 내 호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주며 이런 것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니까 조심하셔야 한다며 뛰어간다. 다시는 오지 말라는 뜻이다. 도와주지 못하면 쪽박이나 깨지 말 것이지, 고약하고 섭섭하다는 생각이 자꾸 났다. 이 사업을 통해 나는 너무 무모했다는 생각을 했다. 웬만하면 누구나 전화기 한 대쯤이야 쉽게 사줄 줄 알았는데 세상은 그게 아니었다. 2년여 동안 제자들을 찾아 헤매면서, 지난 날 은사로서 존경을 받아 오던 내 인격에 먹칠을 했고 대학 교수로 얻었던 명성에도 상처만 남기고 보기 좋게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사회가 불신으로 만연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가장 취약한 것이 비즈니스(사업) 분야라는 점이었다. 미움과 시기가 난무하는 고해(苦海)의 땅을 헤매고 있던 중 국내에서 한자교육으로 유명한 어느 한 출판사에서 나를 불렀다. 두말할 필요없이 고맙다고 허리를 굽히면서 얼른 자리를 옮겼다. 내가 필요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너무 기뻤다. 거기서 나는 다시 ‘이사’가 되었다. 출판사라서 도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회사에 나가서 16개 시 · 도에 있는 각급 학교에 한자급수시험을 보도록 권장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업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현직에 있는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허리를 굽히면서까지 한자시험을 보게 하라고 하기엔 염치도 없고 더구나 그들에게 물질적 · 정신적으로 큰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아주 힘이 들었다. 아는 후배들이 얼마나 성가시고 짜증이 났을까 싶다. 내가 재직 중에 가장 싫어하던 것이 선배가 찾아와서 청을 하는 일이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내가 그 짓을 다시하고 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1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사장이 밥을 함께 먹자고 했다. 자리에 앉자 예상한 대로 사업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성과가 저조해 회사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많다고 한다. 간접적으로 풀이하면 나의 진퇴문제를 우회적으로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사장 눈치까지 보면서 회사를 다녀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다가 어느 날 사표를 냈다. 사장은 이런저런 이유도 묻지 않았고 만류도 없었다. 차 한 잔을 비우지도 않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문간에서 그는 나와 헤어지며 “이사님은 참 순진한 분입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알지 못한다. 집으로 들어와 ‘방콕’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고독이 밀려오고 우울증이 고개를 들었다. 내 주위에서 일정한 과업이 떠났다는 것은 거의 사형언도와 다를 바 없었다. 나에게는 돈, 권력, 명예보다 일이 필요했다. 누가 그랬던가. ‘I Love you보다 I Need you’가 더 좋은 말이라고 하더니 틀림없는 말이다. 사회에서는 모두 나를 보고 “I don’t need You”하고 있으니 말이다. 멀쩡한 데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닌가. 마치 부자 아파트촌에서 이사를 갈 때 멀쩡한 침대며 가구를 마구 버리듯 사회는 나를 그렇게 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싶어 슬펐다.
귀향(歸鄕), 앙코르 인생 그런데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기적이 아니면 천우신조(天佑神助)요 ‘미라클’이다. 한마디로 만루 홈런을 친 것이요, 인생역전 그 자체였다. 이 외롭고 따분하고 슬픈 못난 늙은이를 학교에서 전문 상담교사로 불러준 것이다. 강제 퇴직(?)을 하고 11년 만의 멋진 컴백이었다. 비정규직이었지만 나의 ‘앙코르 인생’에 제2막이 오른 것이다. 여기서 재직하고 있는 교사들은 나를 ‘교장선생님’이라 부르며 가족처럼 잘 대해준다. 역시 학교는 따뜻한 곳이다. 그것은 다른 사회를 가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체감온도라 할 수 있다. 나는 ‘교장’에서 퇴직 후 ‘홍보이사’가 되었다가 ‘사장님’, ‘이사님’을 거쳐 다시 ‘교장선생님’이 되었다. 산전수전을 거쳐 아주 먼 길을 우회(迂廻)해 돌아온 것이다.
달라진 학교 내가 배회하는 동안 학교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겉모습도 달라졌고 속도 몰라보게 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학교는 열 번도 더 변했다. 교사들의 모습과 그들의 언어가 달라졌고 업무며 결재방식, 의사소통 방식, 가르치는 방법도 많이 달라져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런 경우를 두고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고 하나,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해야 하나, 만감이 교차한다. 구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는 거(去)하고 디지털 시대가 내(來)한 것이다. 구어(口語)시대는 가고 ARS와 기계음(機械音) 시대가 온 것이다. 연필(鉛筆) 시대가 가고 전필(電筆) 시대가 온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대부분의 노년층은 새로운 문맹 세대가 됐다. 이들은 집에서 자식들에게 소외(疏外)당하고 사회에서도 상대해 주지 않는 이른바 ‘궁민층’(窮民層)이다. 그 묘한 경계선에 내가 있다. 우리는 해방과 함께 새로 국어를 배워야 했고, 수없이 문법과 맞춤법이 바뀌면서 고통을 받아왔다. 이제 겨우 한글 좀 익히는가 했더니 컴퓨터와 IT 산업이 등장하면서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처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