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꿈을 이룬 친구가 있다. 모교에서 영어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던 그 친구는 지금 교무실에서 대입원서를 써주셨던 담임선생님과 책상을 마주하고 후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에서 제일 영어를 잘 했던 그 친구는 종종 선생님이 되면 단어숙어 암기비법이며, 문법을 쉽게 익히는 노하우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수하겠노라며 꿈에 부푼 미소를 짓곤 했었다. 열여덟 어린 마음에도 친구의 행복한 미소가 참으로 곱게 느껴졌었나 보다. 삼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에도 여전히 반짝이던 눈동자와 기대에 찬, 신나는 친구의 표정이 아른거리니 말이다.
몇 달 전 한 여고동창으로부터 그 친구의 근황을 들었다. “걔 요즘 생각이 많은가봐. 요새 아이들이 어디 우리랑 같니? 선생 우습게 생각하지, 또박또박 말대꾸하지, 맘고생이 심한 것 같더라. 차라리 집에서 자기애들이나 잘 가르치는 게 현명한 거 아닌가 고민 중이래.” “그래, 그럴 만도 할 거야, 요즘 애들이 보통 까다로워야지…….”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친구야, 흔들리지 마. 냉담하고 치열한 세상일수록 너처럼 열정적인 선생님이 꼭 필요해. 부디 네 따뜻한 꿈이 키워낼 아이들을 저버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당부가 터져 나왔다.
담임선생님의 ‘목소리’ 1980년대 초, 나라도 국민도 어려웠던 시절, 나는 또래보다 한참 조숙한 중학생이었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자식 교육에만큼은 아끼지 않았던 그 무렵, 불운하게도 우리 아버지는 몇 년째 실직 중이셨다. 가뜩이나 넉넉지 않던 집안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나는 결핍 속에서 사춘기를 겪게 되었다. 좋은 학용품은 고사하고 다른 아이들이 두세 권씩 보는 참고서인 전과도 한 권 갖기 어려웠던 나는 무언가를 사달라거나 친구를 부러워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을 감추기 위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웃고, 더 활달하게 더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봄날,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셨다. “너, 무용 좋아하지?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한번 배워보면 어떨까? 이번 체육대회 날 무용반 발표도 있단다.” 무용반에 추천하셨다는 말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왔다. 무용복을 맞추고 소도구도 사야하고 특별 지도비까지 내야 하는데 집에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무조건 안 하겠다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 무용반은 모든 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며칠을 망설이다 연습을 시작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이었다. 한 달쯤 지나 체육대회 때 입으려고 맞춘 무용복을 찾을 날이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