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명은 모든 것을 증가시키는 속성을 가지며, 그에 따라 무질서와 혼돈 역시 증가한다. 2000년대 이후 하나의 조류가 된 ‘느림’의 기획들은 이러한 문명의 속성을 거스르려한다는 점에서 계몽적이다. ‘인간의 조건’은 예능과 계몽을 결합한 ‘착한’ 대중문화이지만, 그 ‘착함’ 속에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오롯이 담겨 있다.
문명의 발전과 엔트로피의 증가 문명이 ‘발전한다’는 익숙한 상식대로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문명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일 것이다. 선형적인 진보의 문법으로 설명되는 이 최첨단 문명은, 따라서 언제나 증가하는 방향성을 갖는다. 상품량이 증가하고, 속도가 증가하고, 매체가 증가하고, 정보량이 증가한다. 모든 것이 더 많아지고 더 빨라지는 이 현대문명의 속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편리하게 살고 있다고 느낀다. 현대문명은 지금 이 순간도 더 빨라지고, 더 많아지고,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대문명의 속성은 그에 따른 엔트로피(무질서, 혼돈)의 증가를 낳는다. 에너지의 총 질량은 일정하나, 그 방향성은 언제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만 작동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현대문명의 속도와 매체와 상품이 만들어내는 무질서한 결과들이 결코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음을 시사한다. 속도가 빨라지고 상품이 많아질수록, 쓰레기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많아지는 것이다. 현대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이 엔트로피의 부정성은 다시 현대문명을 위협하게 된다. ‘현대인’이란 이러한 현대문명의 역설적 속성과 그 속성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말한다. KBS에서 방영 중인 ‘인간의 조건’에서 의미하는 ‘인간’이란 바로 이 ‘현대인’을 지칭한다. 이 프로그램이 의도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조건이 되다시피 한 장치들을 없애거나, 현대문명이 양산하는 부정적 결과를 최소화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조건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프로그램의 시작 부분에 언제나 현대문명의 빠른 속도와 증가하는 혼돈을 나타내는 자료화면이 삽입되는 것은 이러한 목적을 잘 드러낸다. 요컨대 ‘인간의 조건’의 목적은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계몽적 성격을 띠게 되는 이유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