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밝히는 동화의 대반전 결과에 놀랄 틈도 잠시, 김은해 교사가 두 번째 퀴즈를 냈다. 질문인즉슨, 늑대가 토끼와 거북에게 경주를 시킨 뒤 둘 중 늦게 들어온 동물을 잡아먹겠다고 선포했다. 과연 누가 늑대의 먹이가 되었을까?
“처음에는 토끼가 빨랐겠지요. 그런데 앞에 강물이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토끼가 망연자실해 있자, 거북이 토끼에게 자기 등에 올라타라고 말해요. 거북은 토끼를 등에 업고 힘들게 강을 헤엄쳐 건너가는데, 강을 다 건넌 후 거북이 기진맥진해버려요. 그러자 이번에는 토끼가 거북에게 자신의 등에 올라타라고 해요. 그렇게 둘은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가치지향적인 교육이에요. 자신의 전문분야를 발견해 키우고, 능력이 다른 이들이 서로 협력하면 위험에 대처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담고 있어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다. ‘좋은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우문(愚問)에 토끼와 거북, 그리고 늑대까지 합류한 동화로 현답(賢答)을 만들어내는 김은해 교사. 알고 보니 김 교사는 2006년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생명과학과 연구교수로 10년이 넘게 ‘동물생리’ 분야를 연구한 과학자다. 그가 경기과학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기까지 어떤 스토리가 있었을까.
“2년만 더 연구하면 정교수가 되는 시점이었어요. 어느 날 문득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가치가 있는 일인가?’라는 의문이 생겼어요. 의미 있는 성취를 향해 달려왔지만 현재가 행복하지 않은 나날이었던 거죠. 한 달간의 고민 끝에 ‘인생의 후반부를 다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주변에서는 ‘여기서 포기하면 국가적인 손해’라며 만류했지만 과연 배움이란 게 무엇인지,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저의 내면의 답을 찾고 싶었어요.”
김 교사는 초등학교 입학 후 생애 처음으로 학교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진군했다. 사람을 배우기 위해 교육학을 공부하며 산학협력교사로 새터민 사람들, 대안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한 달 월급이 10만 원인 때도 있었지만 그 4년간의 ‘방황’은 김은해 교사에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의 답을 찾아주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어요.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나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었어요. 생명과학자로서 나의 역할도 ‘생(生)은 명(命)이다’라는 사실, 즉 살아있음의 이유를 찾는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공부가 나의 사명을 행하기 위해 지식 속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됐어요.”
지식보다 가치를 가르치는 교사
짐작할 수 있듯 김 교사가 수업하는 교실에서는 ‘속도주의’, ‘성과주의’ 따윈 발붙일 틈이 없다. 수업 방식도 새롭다. 경기과학고의 유전학 수업 시간에 김 교사는 13세에 시력을 잃은 데다 부모까지 잃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로 성장해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가 된 강영우 박사, 사지가 없는 몸으로 태어나 희망전도사가 된 닉 부이치치, 하반신 마비를 극복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사가 된 이승복 교수 등을 통해 신체의 한계를 노력으로 극복한 사례를 설파한다.
또 생리학 수업에서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최초로 발견한 뤼크 몽타니에, 자궁경부암의 발병 원인인 인체유두종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한 하랄트 추어 하우젠,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발견해 파킨슨병 치료의 발판을 마련한 아르비드 칼슨 등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인물들의 삶에 관해 토론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들은 그 누구도 노벨상을 목표로 공부한 사람이 없어요. 세상의 편견과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로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이 오랜 시간 연구를 가능하게 했고, 노벨상은 그 결과로 얻은 것이죠. 수업을 통해서도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과정의 가치를 나누고, 인물들을 통해 삶의 모델을 발견하는 기회를 갖고 싶어요.”
어린 시절 위기와 역경을 극복한 스토리는 김 교사 자신의 경험담이기도 하다. 김 교사의 아버지는 6·25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불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내적 상처가 많았던 아버지로 인해 집안은 바람 잘 날이 없었고, 어린 김 교사의 내면도 상처투성이였지만 학교에서는 늘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살았다고.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을 정도로 휘청대던 시기 한 선생님의 관심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경험이 그에게도 있었다.
“영재 1명의 영향력은 1억 명의 역할을 한다고 해요. 과학기술고 학생들의 능력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뛰어납니다. 탁월하지만 취약한 부분도 있고 발산적인 사고를 하면서 능동적으로 지식을 수용하고 내재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면도 있어요. 감성이 발달한 경우가 많아 정서적으로도 잘 다치고 상처도 쉽게 받아요. 이토록 예민한 아이들이 바닥으로 치달았을 때 딛고 설 계단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 터지기 직전의 압력밥솥 같은 상태에서 시원하게 바람을 빼주는 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 아닐까요?”
미국 교육자 찰스 시키즈는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Some rules kids won’t learn in school)’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기고한 열 가지 조언 중 첫 번째로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라”고 밝혔다. 노벨상 수상자들과 김 교사의 공통점은 공평하지 않은 인생을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 가치를 두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공부해서 남 주자”
“교사이기 이전에 과학자로서, 과학도를 꿈꾸는 학생들이 따뜻한 과학자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요. 영재교육은 전국 0.1%의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아니라, 미래형 교육과정을 만들고 적용한다는 점에서 특수교육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은 마음껏 꿈꾸고 꿈을 이야기하고 실현해가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비저너리(visionary)이고 교사는 비전코치(vision coach)인 것이죠.”
세상이 학생들을 ‘도토리’로 볼 때도 김 교사는 학생들을 ‘떡갈나무’로 예우한다. 학생은 ‘현존하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김 교사는 가치지향적 리더십 프로그램인 ‘공부해서 남 주기 프로젝트’를 정립했다. 자신의 존재를 보석처럼 여기는 ‘자존감’과 의사결정의 나침반으로 삼을 ‘원칙’, 인생의 관점을 키워주는 ‘멘토’, 인생을 설계하는 ‘비전’을 세워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스스로 찾아내고 발전시키며, 이를 지식의 나눔으로 확장해가도록 이끄는 비전 프로그램이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어울려 에코그린으로 과학기술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 IVY’를 만들었는가 하면, 동료 교사들과 교육공동체 ‘현존하는 미래’를 창단해 매주 스터디와 토론으로 소통해 나가고 있다. 학생들도 김 교사의 진심을 모를 리 없어서 “저를 인간으로 존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학교 이외의 넓고 깊은 세상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일이 요즘 부쩍 잦아졌다는 소식이 반갑다.
김은해 교사의 마지막 꿈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언젠가 국경 없는 과학자회의 일원으로 지구 반대편의 ‘떡갈나무’들에게 지식을 나누고 있는 그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서, 조금이라도 더 남 주기 위해 그는 오늘도 학생들과 수불석권(手不釋卷)의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