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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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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도 안 오는데 눈이 오는 날

우리 인간들의 언 몸을 녹이는데 필요한 것은 기온이나 불, 그리고 두터운 옷만 있는 게 아니다. 바람 부는 눈밭을 홀로 걷고 있는 양 춥고 외로운 순간에도 몇 개의 따스한 기억만 있다면 얼어붙은 육신과 가슴에 훈김이 피어오른다. 해 마다 벚꽃이 필 무렵이면, 꽃샘추위 아무리 기승을 부리고, 바람 끝이 솔잎처럼 뾰족하게 매워도 내 마음의 창은 활짝 열리면서 살랑살랑 다사로운 봄바람이 불어온다, 몇 개의 기억으로 인해.

그 봄의 나른한 삽화 하나

봄볕이 나른하게 몽환적이다. 봄볕보다 더 나른하게 몽환적인 것은 학교 뜰 가득 피어난 벚꽃. 점심을 먹고 꿀벌이 잉잉거리는 벚나무 밑을 산책하던 난 마구 꺾인 채 시들어 가고 있는 벚꽃 가지들을 발견했다. 꽃잎은 흡사 흰 눈이라도 내린 듯 수북하게 쌓여 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 심술궂기도 해라.’
주변을 둘러보던 난 미끄럼틀에 올라가 늘어진 벚꽃가지를 붙잡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는 승우를 발견했다. 우리 반 아이다. 개구쟁이 녀석. 유치원 시절부터 별나기로 소문난 아이다. 우리 반 여자 아이들은 걸핏하면 유치원에 다니던 녀석에게 맞고 울었다. 난 녀석을 불러 몇 번이나 혼을 내고 주의를 주었지만 매번 효과는 그다지 신통하지 않았다. 그녀석이 입학하였을 때, 난 녀석으로 인해 나의 일 년이 그다지 평탄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고, 역시나 그렇게 나의 신학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난 녀석을 불러내려 혼을 내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없이 꾸중을 듣는 녀석.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묵묵부답. ‘그냥 예쁘니까, 어쩌면 심심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장난삼아, 놀이 삼아 그 예쁜 꽃들을 의미 없이 꺾었으리라’ 지레 짐작하면서 난 녀석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다. 그런데...... 근처 나무 의자에 벚꽃 화관을 쓰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민지가 눈에 띈다. 어느 공주의 화관이 그토록 어여쁘고 향기로울 수 있을 거나. 민지의 머리 가득 꽂혀 있는 꽃가지. 그리고 두 손으로 감싸 쥔 꽃다발.
“아니, 민지야. 이게 무슨 일이라니? 선생님이 그렇게나 꽃 꺾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니? 아무리 예뻐도 눈으로 봐야지.”
내 질책에 민지는 무척 억울한 모양이다. 승우도 모자라서 민지까지...... 무척 속이 상한 내 목소리엔 화가 잔뜩 묻어 있었으므로 아이는 또 당황했던 모양이다.
“제가 아니에요. 제가 안 꺾었어요. 승우가 꽃 꺾어 와서 이렇게 해 주었어요.”
아이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변명했다. ‘아하! 그렇게 된 모양이구나’. 승우는 민지를 좋아했다. 그 개구쟁이 녀석도 민지 앞에서는 양처럼 순해졌다. ‘그래, 꽃 좀 꺾으면 어때? 벚꽃으로 치장한 이 아이의 모습은 세상의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걸.’ 부러운 눈길로 민지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훈김이 피어오른다. 내 유년에도 승우 같은 남자아이 하나 있어 이렇게 몽환적인 기억의 조각을 남겨 주었다면 내 가슴을 장식할 보석이 되었으리. 그러나 내겐 불행하게도 그런 남자 아이가 없는 것 같다. 민지를 부러워하면서 난 이른 봄날 이른 오후의 몽환적이고 나른한 산책을 계속한다.

삽화 둘
쉬는 시간에 놀러 나갔던 아이 하나. 숨 가쁘게 교실로 뛰어 들어온다.
“선생님, 지금요. 눈도 안 오는데 눈이 와요. 운동장에요.” 의아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답답했는지 아이는 연신 창밖을 가리킨다. 운동장엔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벚꽃 잎이 날리고 있다. 흰나비처럼 흰 눈처럼 난분분 난분분 날리고 있다. 내 가슴에도 꽃눈이 날린다. 꽃비가 내린다. 나비처럼, 눈처럼.


삽화 셋
아이들은 바람이 불면 후두둑 날리는 벚꽃 잎을 잡으려고 와아~ 함성을 지르면서 꽃잎을 쫓아다닌다. 그러나 꽃잎은 팔랑팔랑 나비처럼 이내 손을 피해 날아가면서 잘 잡혀주지 않는다. 꽃잎을 잡는 순간,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벚꽃 잎처럼 작고, 얇으면서 가벼울지라도 그 작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을 소원.
쉬는 시간에 밖으로 나갔던 아이 하나 울먹이면서 들어왔다.
“난 참말로 빌고 싶은 소원이 있는디 꽃잎을 못 잡았어예,”
“네 소원이 무엇인데?”
“빨리 6학년 되는 거라예.”
“왜?”
“6학년이 되면 울 아부지가 컴퓨터 사준다고 했어예.”
어쩌면 좋으니? 네가 꽃잎을 잡는다 해도 6학년이 되려면 아직도 5년을 기다려야 하는구나. 벚꽃 잎처럼 작고, 곱고, 가벼우면서도 연줄처럼 긴 기다림을 지닌 소원이구나. 네가 6학년이 되기 전에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좋겠다.


삽화 넷.
반 아이가 돌에 머리를 맞고 다쳤단다. 머리가 찢어져서 양호실로 갔단다. 다행히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다친 아이는 머리에 붙인 반창고가 훈장이라도 되는 양, 전쟁 영웅처럼 의기양양한 반면, 돌을 던진 아이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앞에 불려 나왔다. 이유를 물었던 나는 돌을 던진 아이를 나무랄 수 없었다. 아니...... 그 작은 가슴에 얼마나 간절한 소원을 담았기에 그렇게 까지 했을까? 꼭 안아 주고 싶었다.
소원을 빌고 싶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꽃잎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단다. 나무를 흔들어도 밑동을 발로 차도 꽃잎은 떨어지지 않았단다. 그래서 돌을 던졌단다. 그런데 그만 친구가 맞고 말았단다. 난 아이가 빌고 싶은 소원을 묻지 않았다. 무언지 모르지만 그 작은 가슴에 담긴 소원을 나 혼자 가만히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삽화 다섯
벚꽃이 활짝 핀 나무 밑 모래 밭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음엔 아이 혼자 두꺼비집을 만들고 있는 줄 알았다. 큰댁에 맡겨진 아이다. 부모와 왜 떨어져 살아야 하는지 아이의 큰어머니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내 질문에 자신의 아이를 키우기에도 벅차다는 말만 반복하던 큰어머니. 아이는 취학 전 또래 집단에서 생활한 적이 없어서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아이 곁으로 다가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이는 구멍을 파고 있었던 게다.
“할무니가..... 무랑 배추를 땅 속에 묻었어예. 오래 되어도 안 썩어예.”
“너는 무엇을 묻으려고?”
“꽃이 예뻐서요. 엄마 오면 주고 싶어서......”
나도 함께 구멍을 판다. 깊디깊게 판다. 꽃이 지기 전에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만나러 온다면 좋겠다. 아이가 미끄럼틀에 올라가 꺾은 싱싱한 꽃가지를 엄마에게 줄 수 있다면 좋겠다.


프로필 _ 김은아
현재 밀양 상동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폐교위기에서 벗어날 정도로 작은 학교지만 순수한 아이들과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도란도란 행복한 교직생활을 하고 계시다. 부산교육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경남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이영도시조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교단일기 <내사랑, 들꽃 같은 아이들 : 함께 가는 길>과 수필집 <거미 여인의 노래 : 매직 하우스>가 있으며 34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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