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핏대를 올리고 흥분하곤 한다. 하지만 크게 보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좀 더 강해지고, 더욱 친절하고 유연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크고 길게 보자. 그러면 사건과 더불어 사람을 보게 되고, 타인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포함하여 볼 수 있게 되며, 현재를 넘어 과거와 미래도 동시에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첫째 휴일 오후 아파트 동네에 있는 상가 가게에 들렀다. 건전지 몇 개를 사려고 기웃거리는데, 학용품 코너 쪽에서 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오십 대 주인아저씨가 2학년짜리 꼬마 아이 하나를 붙들고서 아이의 집 전화번호를 묻고 있고, 아이는 불안한 기색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상황을 살펴보니 이 녀석이 장난감 모형 자동차 하나를 훔치려다가 지금 막 주인아저씨에게 딱 걸린 것이다. 나는 주인아저씨라는 분을 주목하였다. 주인아저씨는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야단을 치거나 하지도 않는다. 물론 여기 도둑질 하는 아이 잡았다고 큰 소리로 광고를 하지도 않는다. 경찰서에 넘기겠다고 겁을 주거나 하지도 않는다. 흔히 그러하듯이 그 아이의 부모를 아이 앞에서 비난하지도 않는다. 아이가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염려해 가면서, 그저 조용조용 아이에게 집 전화번호를 확인한다. 주인아저씨는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영철이네 엄마이시지요? 여기 아파트 입구 상가 학용품 가게인데요. 영철이가 우리 가게에서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는 모양인데요, 엄마께서 지금 잠깐 가게로 와주시겠어요? 와 보시면 알게 됩니다. 곧 오세요.” 엄마가 바로 왔다. 주인아저씨는 그제야 영철이가 한 일을 자초지종 차분히 설명한다. 엄마는 한편으로는 아이를 노려보며 한편으로는 주인아저씨에게 무어라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 주인아저씨는 아이에게 이제 엄마 따라서 집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당부한다. “아이 너무 심하게 야단치지 마세요. 이런 경험도 나중 인생에 약이 될 수도 있어요.” 엄마가 거듭 허리를 굽혀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감정을 담아 인사를 한다. 주인아저씨는 ‘큰사람[대인, 大人]’이었다. 논어(論語) 방식으로 말하면 그는 군자(君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주인아저씨는 오늘 자기네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물건 도난 사건’으로만 보지 않았다. 도난을 당한 주인으로서는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일진대, 그는 굳이 그렇게만 보지 않은 것이다. 주인아저씨는 오늘 이 일을 ‘물건 훔친 아이의 인생’ 또는 ‘아이의 생애 발달’과 결부하여 일을 처리한 것이다. 아이의 긴 인생에 결부하여 아이의 바람직한 인생 발달에 연관하여 ‘크게 보기’로 하고 접근한 것이었다. 만약 이 일을 도난 사건으로만 보게 되면, 아이를 야단치고, 망신주고, 낙인찍고, 아이 부모에게 항의하고, 변상 요구하고 등등 뭐 이렇게 일은 흘러갔을 것이다. 이후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크게 보기 시작하면 평상시에 보지 못하던 것을 포함시켜서 보게 된다. 그래서 지혜가 생기는 법이다. 크게 본다는 것은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일 자체만 보지 않고 일의 연결된 여러 맥락을 함께 살피는 것이다. 크게 보기로 하면 사건과 더불어 사람을 보게 된다. 크게 보기로 하면 타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와 상호작용하는 ‘나’까지도 함께 포함하여 보는 것이다. 크게 보기로 하면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까지도 함께 연결하여 보는 것이다. 크게 보기로 하면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것이다. 아이는 오늘의 경험에서 무엇을 얻게 될까. 기대하기로는 ‘관용’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들의 발달을 보는 데에도 ‘크게 보기’의 눈이 필요하다.
둘째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이다. 한 아버지가 여섯 살짜리 아이를 옆자리에 태우고 가다가 신호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운전면허증과 그 밑에 만 원짜리 몇 장을 살짝 감추어 건네주었다. 말하자면 은밀하게 뇌물을 준 것이다. 이런 식의 뇌물에 익숙해 있는 경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벌금을 물리지 않고 그를 그냥 보내 주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왜 경찰 아저씨이게 돈을 주는 거에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괜찮다, 얘야. 다들 그렇게 한단다.”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다. 과일가게에서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주인은 싱싱한 과일은 상자 윗부분에 잘 보이게 놓고 오래된 과일은 싱싱한 과일 아래에 숨겨 두었다가 손님에게 팔 때는 모두 싱싱한 과일인 것처럼 끼워 파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대학생은 이렇게 팔아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주인이 대답했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해서 과일을 판단다.” 마침내 아이도 어른이 되었다. 회사원이 되었다. 회사 경리 장부를 고쳐서 회사 공금을 꺼내어 썼다. 횡령한 돈으로 상관들에게 뇌물을 건네기도 하였다. 곧 들통이 나서 그는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아버지가 면회를 와서 아들을 나무랐다. “아이고 이놈아! 넌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 아들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들 그렇게 해요. 전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뿐인 걸요.”
‘크게 본다’는 것은, 세상사든 개인사든 원인과 결과의 큰 흐름을 보는 것을 말한다. 크게 보지 못하면서 치밀하게 본들 무엇 하겠는가. 원인은 제쳐두고 결과에만 눈을 바짝 들이대고 나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소인배를 면할 수 없다. 크게 보는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반성의 자리에 설 수 있다. 큰 흐름으로 원인과 결과를 볼 수 있을 때, 문제를 제대로 보고 우리 사회의 적폐를 제대로 본다. 크게 보는 사람은 원인을 거슬러 보고 마침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는 사람이다. 크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과에만 매달려 자신의 과오를 보지 못하고, 그것을 괜찮다고 강변하는 사람이다. 나쁜 인과(因果) 속에 있는 나를 볼 수 있으면 자신을 스스로 나무랄 수 있다. 크게 보지 못하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건다. 교통경찰에게 뇌물을 주는 일, 과일의 품질을 속여 파는 일, 그리고 회사 공금을 횡령하는 일이 곧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이것이 이해되지 않으면 아직도 나는 크게 보기의 마인드에 들지 못한 사람이다.
셋째 크게 보기로 작정하고 보면, 세상의 이치가 큰 모순 없이 보이기도 한다. 크게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공평하지 못하고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이던 것도, 그것을 보는 프레임을 더 확장하여 본다든지, 더 길고 큰 인과의 법칙을 적용해 본다든지 하면 균형과 공평함 같은 것이 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러니 작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크게 보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세상의 섭리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크게 보기로 해서 마침내 세상 섭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는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웃음[獨笑]’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경지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시 ‘홀로 웃다 [獨笑]’에서 보여준다.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有粟無人食(유속무인식) 아들 많은 집은 굶주림을 걱정한다.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높은 벼슬아치는 꼭 어리석고 達官必?愚(달관필창우) 재주 있는 사람은 재주를 펼칠 길이 없다.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지극한 도는 늘 쇠퇴하기 마련이네, 至道常陵遲(지도상릉지)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다. 婦慧郞必癡(부혜랑필치) 보름달 뜨면 구름이 자주 끼고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세상 일 모든 이치 다 이와 같으니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어라.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 홀로 웃다 [獨笑],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