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접한 한 장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할 때가 있다. 몇 권의 책을 읽었을 때보다도 강렬하게 삶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명옥의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는 우리가 한번쯤은 접했을 법한 희망, 가난, 떠남, 추억, 눈물, 고독, 사랑, 폭력, 죽음, 용서, 불안, 늙음’ 등 삶의 스물한가지 주제들을 90편의 그림에 빗대어 풀어놓은 인생 이야기이다.
낡고 헤진 검은 구두에 진흙이 잔뜩 묻었다. 누구 방금 신발을 벗었던가. 구두끈은 느슨하게 풀려있는 상태다. 노란색 배경에 지저분한 검정 가죽구두 한 켤레가 화변 한가운데 놓여 있을 뿐이다. 헌 구두를 표현했을 뿐인데도 신발 주인이 겪었을 삶의 쓸쓸함과 고단함의 무게에 가슴이 아려온다.
이명옥의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를 고민 없이 덥석 집어 든 건, 표지에 그려진 낡은 구두 그림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봤던 아빠의, 막 퇴근하고 돌아온 고단한 남편의, 학원일정을 소화하고 터덜터덜 귀가한 딸아이의 그리고 행복을 미래로 유예한 채, 허덕이듯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내 구두를 보는 듯했다. 아련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는 넉넉지 않는 살림에도 철마다 내 신발은 사주시면서도 당신은 사시사철 낡은 보라색 슬리퍼 하나로 버티셨다. 슬리퍼 차림으로 학교에 온 엄마를 창피해하며 ‘커서 돈 많이 벌면 엄마, 아빠 신발 좋은 거 사줄 거라고 다짐했던 일기장 구절도 생각났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켰지만, 지금껏 자식을 위해서 뭐든 양보하려는 부모님의 마음씀씀이에 늘 마음이 아련해진다. 이렇듯 한 장의 그림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사진첩에 끼워 둔 사진을 보는 듯 행복하고 즐거운 옛 추억에 젖어들게 한다.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서에 비해 회화나 사진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쉽게 접근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는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패럿의 말처럼 말이다.
90편의 그림과 나눈 스물한가지 인생 이야기 작가는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는 스물한가지 키워드인 ‘희망, 재생, 가난, 떠남, 인생, 행복, 추억, 눈물, 아름다움, 고독, 사랑, 폭력, 모델, 죽음, 용서, 침묵, 명상, 전쟁, 관음, 불안, 늙음’을 90편의 그림에 빗대 풀어나간다. 우리는 삶의 여정 속에서 이러한 주제를 피해갈 수 없다. 누구나 한번쯤은 크고 작게 겪을 수 있고 고민해봤을 법한 주제들에 대해서, 예술작품을 통해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그림 설명은 마치 큐레이터가 내 옆에서 함께 작품을 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다. 학창시절 밑줄 치며 외우던 ‘미술사적 의미와 시대적 평가’ 등 이론적이고 전문적인 접근이 아니어서 지루하지 않다. 또한 그림의 해석이나, 전달하려는 의도, 피사체의 의미 등 ‘듣고 봐도 잘 모르겠는’ 난해한 해설도 하지 않는다. 다만, 화가가 왜 이 그림을 그렸고, 그릴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왜 이런 표현을 했는지를 옛날이야기처럼 편안하게 들려준다. 때로는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함께 곁들여 설명해주기도 하고, 그림의 세밀한 부분까지 짚어주면서 명화 보는 눈을 높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전문적인 지식을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나처럼 미술에 약간의 관심과 흥미가 있거나, 미술과 관련된 뒷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인 책이다. 각 주제에 대한 인용문 역시 한편의 시를 읽는 듯, 가슴에 와 닿는다. 각 주제에 맞게 선정한 3~4편의 그림은 고흐, 렘브란트, 르누아르, 고갱, 샤갈 등 유명한 작가뿐만 아니라 황혜선, 이영희, 안창홍 등 국내 화가의 작품도 배치해놓아 마치 인사동 갤러리에 들른 듯하다.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스캔하고, 인간의 본성을 발굴하며, 세상만물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우리 스스로가 소외시킨 진정한 자신과 만나게 해주는 메신저라고 생각한다.
예술작품에는 예술가의 눈과 마음과 머리를 통해 통찰한 인생의 진면목이 담겨 있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 보고도 스쳐 지나가는 것에서 인생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는 ‘다른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부분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보인만큼 나의 삶과 추억이 풍성해진다. 나 역시 이 책 덕분에 몇몇 유명한 그림에 대해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다. ‘척’의 즐거움에 빠져, 큐레이터가 된 듯 미술관을 누비며 그림의 ‘뒷이야기’를 들려주고 다녔다. 딸내미들의 ‘오~’하는 눈빛을 받으며…. 이러한 기억들이 먼 훗날 나와 딸들이 함께 공유하며 소통할 수 있는 한 컷의 행복한 추억으로 남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