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윗사람은 필연코 일에 실패한다. 분노하고 윽박질러 독려해 봐도 아랫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 그의 공허한 분노는 자신을 해칠 뿐이다. 명분 없는 분노는 타인의 다른 분노를 낳을 뿐이기에 자신을 해칠 뿐 누군가를 해칠 영향력조차 없음이 분명하다. 분노와 폭력조차 진정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선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광해군 시기 서북면을 방비하던 장수 박엽(朴燁)은 용감하고 지략이 출중한 무인이었지만 서인(西人)이 중심이 되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인조반정 이후 바로 처형되었다. 반정을 일으킨 서인 정권은 광해군 밑에서 힘깨나 썼던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해나갈 때 평안도 병권을 틀어쥐고 있던 박엽을 가장 먼저 숙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엽은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명분으로 숙청됐다. 이는 그가 그만큼 청렴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서북면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인 엄중한 군율은 동원된 관과 민 모두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강력한 전시 체제의 유지는 지도자의 청렴 없이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만약 박엽이 건재했더라면 인조반정 이후 발발한 병자호란 때 서북면 조선군이 그리 쉽게 궤멸되지는 않았으리란 추측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박엽의 인간적 풍모는 정조대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남긴 글 「이충백전(李忠伯傳)」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평양의 싸움꾼 이충백의 일화를 다룬 이 글에서 박엽은 잔인무도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과 간통한 이충백을 사살하라 명하는 평안감사 박엽은 언뜻 몹시 치졸해 보이며, 천 명을 살해해야 모진 업에서 벗어나리라는 그의 말은 섬뜩하다. 하지만 인질로 체포된 아비를 구하기 위해 이충백이 평안감사 감영에 출현했을 때 박엽이 보인 태도는 잔인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이충백의 뛰어난 무예와 호기로움을 확인하고 오히려 자신의 부하로 삼는다. 결국 박엽의 잔인함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많으며, 전쟁을 목전에 둔 장수에겐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그의 난폭한 성격이 치명적 약점이 된 순간은 반정이 일어나고 자신의 운명을 평안도 관민들의 손에 맡겨야 했을 때였다. 서북면 방어라는 차원에서는 훌륭한 장수였을 수도 있었을 박엽은 반정 상황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저 자신의 안위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국방을 위해서라도 서북면 군권을 유지해야 했지만 반정 세력의 공격을 막아줄 유일한 힘인 민심은 이미 돌아서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번역문】 벼슬을 담당하는 자는 갑자기 성내는 것을 필히 경계해야 하나니, 일에 잘못된 점이 있을 때 마땅히 자상하게 타이르다 보면 사리에 맞게 되지 않을 리 없거니와, 만약 버럭 화부터 낸다면 고작 자기만 해칠 뿐이니 어찌 남을 해칠 수나 있으랴?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