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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회복을 위하여

01
나로 하여금 ‘침묵’이란 말을 내 상상력 속에서 매우 장엄한 의미로 길어 올리게 한 독서가 있었다. 그것은 작가 이문열의 중편소설 <들소>를 읽으면서이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어느 페이지에도 주인공의 침묵을 직접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독서를 하는 동안 내 상상 안에서 그 ‘침묵’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작품 <들소>의 주제가 드러나게 되는 소설의 뒷부분에서 주인공 ‘착한마루’의 깊고 길고 짙은 침묵을 나는 또렷한 상상으로 대면하였던 것이다.


먼저 소개 겸, 소설 <들소>의 이야기를 조금만 해 보기로 하자. 알타미라 동굴 벽에 새겨진 벽화 ‘들소’가 이 소설의 소재이다. 동굴 벽화 ‘들소’가 만들어진 사연을 작가가 추리하고 상상하여 한 편의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 사연에는 석기시대 부족사회에서 빚어지는 권력과 사회의 사연은 물론이려니와, 인물들의 심리적·정서적 아픔에 맞물려 있는 사연과 자기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고뇌들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놀라운 것은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그 까마득한 석기시대에 새겨졌을 동굴 벽화 ‘들소’의 내력을 비상한 상상의 리얼리즘으로 재현해 놓은 점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위대한 예술(또는 예술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설명을 석기시대 인류의 모습을 배경으로 삼아 작품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수성 맑은 주인공 ‘착한마루’는 섬세한 예술적 재능이 있지만, 근육질의 남성은 아니다. 그는 원시 부족사회가 일상으로 영위하는 사냥과 전투에서 자주 패배한다. 그 사회에서는 사냥이 일상화되어 있고, 사냥에서 야생의 들소를 잡는 데 성공하는 남자가 영웅이다. 반대로 잡은 소를 놓치는 자는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소를 잡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성취, 가장 훌륭한 가치에 해당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부족(部族)의 힘센 권력자는 힘의 상징인 소를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 즉, 권력의 상징으로 삼는다. 그 원시 부족사회에서 소는 그런 문화적 상징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부족사회에서 한 남성이 보여 주는 전투적 무능은 딱하고 안쓰럽다. ‘착한마루’는 사냥에서 몰락하고 ‘소에게 밟힌 자’라는 모욕적인 이름을 얻는다. 그래서 한때 감옥과도 같은 동굴에 격리되기도 한다. ‘착한마루’는 오로지 육신의 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부족사회에서 그야말로 힘의 약자이다. 그는 마침내 부족들 간 권력투쟁의 온갖 음모에 휘둘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권력에서 차갑게 소외되고, 평생 모멸과 결핍 속에서 혹독한 운명을 감내하게 된다. 연모를 품었던 여인 ‘초원의 꽃’은 그를 떠나 힘센 권력자에게 가버린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소도 권력이라고, 권력이 내게 베푸는 ‘편하고 풍족한 삶’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그녀가 ‘착한마루’에게 말한다. 네가 추구하는 소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너에게도 그 소가 반드시 있을 거라며, 그를 떠나간다.


주인공 ‘착한마루’는 모든 것을 잃고 참담하게 무너진다. 자식들에게 권력도 물질도 물려 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사랑하던 여인도 현실의 권력자에게 가 버렸다. ‘아, 나는 나의 존재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소는 어디에 있는가.’ 좌절과 상실의 극단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가 구원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는 자신의 소를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를 자신만이 영원히 잡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현실을 떠나기로 한다. 그리고 그가 한때 사냥의 실패자로서 비난과 조롱을 피해서 머물렀던 동굴로 들어간다.


수만 년의 세월이 흘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동굴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소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동굴 벽에 그려진 벽화 ‘들소’이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들소’인 것이다.


02
상상해 보자. 주인공 ‘착한마루’는 이 동굴에서 소를 그려 갔을 것이다. 그에게 소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가 동굴 벽에 그리려고 한 소는 그에게는 ‘의지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소는 자기 존재의 분신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 소는 자기 존재의 영원한 연장(extension)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소는 화가 자신의 생애에 바치는 보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에게 그 소는 고매한 권력(power)이었을 것이다. 추악한 음모의 세속적 권력이 아니라, 내면에서 스스로 거룩함을 확보하는 그런 고상한 권력을 표상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아마도 그에게서 소는 신앙이 되었을 것이다.


강력한 ‘보편의 힘’으로 인류를 공감시키는 예술은 그 탄생의 내적 프로세스를 이렇게 보유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프로세스 안에서 예술가는 어떻게 정신적 긴장을 집중해 나갔을까. 이 동굴에서 작업하는 동안 주인공은 어떤 의지와 정신세계를 유지했을까. 그 부분을 생각하면 예술가를 향한 일종의 경외감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나로 하여금 ‘침묵’이란 말을 매우 장엄한 의미로 길어 올리게 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주인공 ‘착한마루’가 동굴에 들어와서 들소 벽화를 그려나가는 그의 마음 내부와 그것을 실천하는 행위에서 나는 그의 견고한 침묵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이 침묵은 내 독서의 상상력 공간에서 내가 떠올린 것이다. 의지가 결집되면 될수록, 예술 행위의 가치가 명료하면 할수록, 그의 침묵은 그의 내면에서 더욱 빛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침묵이 안으로 품어내는 어떤 거룩한 힘을 보았다고나 할까.


침묵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탈리아 화가 살바토르 로사(Salvator Rosa, 1615~1673)의 전언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그림 ‘자화상’ 속 인물은 깊은 우울과 회의와 수심의 표정으로 선언문 같은 글이 적힌 베이지색 서판을 손에 움켜쥐고 있다. 이 서판에는 ‘AUT TACE, AUT LOQUERE MELIORA, SILENTIO’라고 적혀 있다. 번역하면 ‘침묵하라, 아니면 침묵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자화상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 서판에 쓰여 있는 ‘침묵에 관한 전언’으로 더 유명하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세속사제로 활동했던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Joseph Antoine Toussaint Dinouart) 신부가 쓴 <침묵의 기술>이란 책이 있다. 국내에도 번역되어 많은 사람이 읽고 있다. 디누아르 신부는 14가지 침묵의 원칙을 말하는데, 그 중 첫 번째 원칙은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만 입을 연다’이다. 이는 살바토르 로사의 자화상에 그려진 문구와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유럽에서는 일찍이 침묵에 대한 통찰로써 이런 잠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비평가인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말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말도 이런 통찰의 계보에 속한다. 침묵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그렇듯 비장한 실천의 침묵이 무겁고 엄숙한 것이라면, 이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결코 이보다 가볍지 아니한 정신의 경지를 보여 주는 침묵으로 ‘소이부답(笑而不答)’이 있다. 이태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 ‘소이부답’이 나온다.


問余何事棲碧山(날더러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웃기만 하고 대답 않으니 마음은 절로 한가롭네)


글자 뜻 그대로 ‘슬며시 엷은 웃음을 띠면서 아무런 말이 없는’ 모습이다. 신선의 경지에 이른 침묵의 모습이 이와 같을까? 


03
“사람이 말하는 것을 온전하게 배우는 데는 5년 정도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50년도 더 걸린다.” 침묵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인격 내공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동시에 의미 깊은 사회적 실천의 일종인지를 보여주는 묵시록 같은 진술이다. 쓰레기 언어들이 소통의 골목마다 가득 쌓여 있다. 치우고 치워도 금방 더 쌓인다. 침묵은 서 있을 자리조차 없다. 침묵은 사전에만 있는 말이 되어 버렸다. 침묵은 ‘죽은 말’이 되어가고 있다.


혜민 스님의 선언이 돋보인다. “여러 가지 부족한 제가 트위터를 하게 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묵언수행(?言修行) 하면서 부족한 스스로를 성찰하고 마음을 밝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말 많은 정치인들이 좀 따라 했으면 좋겠다. ‘묵언수행’을 하겠다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자신이 묵언수행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말한다. 묵언수행도 홍보용으로 전락한다. 나의 글쓰기에도 반성이 닿는다. 침묵을 이렇게 번다히 말하는 것조차도 침묵은 허용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말하기 교육의 최종 마당에 ‘침묵 배우기’ 마당을 꼭 넣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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