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강마을은 가을이 가기 전 겨울이 먼저 온 듯합니다. 하얀 서리가 추수한 들판과 말리고 있는 볏짚과 아직 베지 않은 벼 포기에 온통 흩뿌려져 있습니다. 노랗고 붉은 소국과 키 큰 대국이 학교 현관을 장식하고 가을 햇살 사이로 빛나고 있습니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꽃 사이로 언뜻 보입니다. 꽃인지 나비인지 분간되지 않습니다. 나비가 꽃잎인 듯 그렇게 보였습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나비는 자신이 잠시 꽃이라 생각하고 앉았을까요? 아니면 가분 좋은 가을 햇살에 잠시 날개를 말리고 꽃향기에 취하고 싶어서일까요? 그저 잠시 가을 꽃잎에 자기 한 발을 들여 놓고 작은 부탁을 하기 위해서일까요?
‘문간에 발 들여놓기(foot-in-the-door technique)’란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큰 부탁을 하고자 할 때, 먼저 작은 부탁을 해서 상대방이 그 부탁을 들어주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학자들이 연속 근사(successive approximation)라고 일컫는 인간의 성향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이 작은 부탁이나 약속을 들어주고 나면 그 사람은 그 방향으로 태도나 행동을 계속 수정하게 되고, 더 큰 부탁들을 들어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프리드만과 프레이저(Freedman & Fraser, 1966)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가정 주부들에게 전화를 해서 가정에서 사용하는 제품들에 대한 질문 몇 가지에 답을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사흘 뒤에 심리학자들은 다시 전화를 해서, 이번에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제품의 개수를 두 시간 정도 세어 보기 위해 집에 대여섯 명의 남자가 방문해서 찬장과 창고를 뒤져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처음에 전화로 질문을 받은 주부들이 질문을 받지 않은 주부들에 비해 두 번째 부탁을 들어 줄 가능성이 두 배 이상 높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시식코너가 ‘문간에 발 들여놓기의 기법’을 이용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마트에 갈 때는 생각지 않은 먹거리들을 많이 사오게 됩니다. 시식코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죠! 판매하시는 분이 웃으며 사지 않아도 좋으니 맛이라 보라고 아이에게 권합니다. 이 때 일단 받아서 먹고 나면, 한 개만 구입하라는 부탁을 미안해서라도 쇼핑 카트에 담게 됩니다. 상대가 쉽게 들어 줄 쉬운 부탁을 먼저하고 큰 부탁을 하는 대표적인 마케팅 형태입니다.
시절이 하 수상합니다. 이 어지러운 이야기의 중심에 우리나라 최고위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기업들이 엄청난 금액을 출자하여 권력 비호 세력이 필요한 단체를 만드는데 협조하였습니다. 최고 권력자와 기업들은 왜 이렇게 쉽게 부탁을 들어주었을까요? 저는 처음에 어렵지 않은 부탁을 들어준 것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그녀의 부정적 요구가 처음에는 작은 것이었겠지요. 차나 한 잔 마시거나 어려운 시절 함께 위로하는 그 정도에서 시작하여 점점 큰 영향력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도자의 뼈아픈 반성이 필요합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내 집의 문간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김상근 교수는 한국의 절망적 상황을 ‘아포리아(Aporia)’ 즉 ‘길 없음’, ‘막다른 지경에 도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항해술이 발달했던 그리스에서는 배가 좌초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를 ‘아포리아’라 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배가 세월의 파도에 의해 좌초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희망 상실의 시대’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가을 들판의 곡식들은 여름철 땅 속의 양분을 자신 속에 갈무리하여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벌레들도 열심히 날개 짓하여 짝짓기를 하고 나뭇잎 뒤에다 봄을 기다리는 작은 알들을 남겨놓고 된서리에 주검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동란으로 부서진 이 땅을 풍요롭고 복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고 내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노력하면 아름다운 미래가 온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지도자란 어떤 인물인지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적인 모델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입니다. 위대한 그리스 역사가이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은 ‘키루스 교육’라는 책에서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그리스가 아닌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인 키루스대왕에게서 찾았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자신의 철학만이 옳다고 생각한 독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전환하여 깊이 성찰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지도자의 지혜와 도덕성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자신의 나라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복한 나라에서 조차 인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한 리더였습니다. 지도자의 삶은 멋지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왕관의 무게를 견디며 끊임없이 숙고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라 말한 그가 생각납니다.
강마을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입니다. 꽃인 양 국화화분에 앉아 있던 나비는 팔랑팔랑 날아서 붉은 화살나무 사이로 날아가 버립니다. 꽃과 나비의 경계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비인 것을 안 순간 나비는 꽃이 아닌 한 생명체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공의 경계 위에 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는 늦가을 오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