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평가가 진행된 국어과 수업을 참관했을 때의 일이다. 칠판에 적힌 학습목표는 ‘담화에 나타난 설득전략을 평가할 수 있다’였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개별 평가지를 나눠줬다. 이번 수행평가에서 발표자의 말하기가 중요한 만큼 평가자는 잘 경청하고 평가의 근거를 개별 평가지에 기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평가 내용은 5가지로 △담화의 내용이 적절한지 △설득전략이 효과적인지 △타당한 근거가 마련됐는지 △허위나 과장이 있는지를 OX로 표시하고, 마지막 항목에는 평가에 방해가 될 만큼 태도가 안 좋은 친구 이름을 체크하도록 했다. 또 비고란에는 발표자의 설득전략은 무엇인지, 어떤 점에서 효과적이었는지를 꼼꼼히 쓰도록 했다.
평소 토론수업에 관심이 많으셨던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즐겁게 토론활동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끝에 생활 속에서 흔히 접하는 ‘홈쇼핑’을 생각해냈다고 했다. 발표자는 반 친구들에게 상품이나 가치를 판매하기 위해 자기만의 설득전략을 동원하고, 청중들은 모둠토론을 통해 구매 의견과 비구매 의견을 포스트잇에 작성하는 방식으로 수업 속 수행평가가 진행됐다. (말하기 평가에서 개별평가지는 발표자를 평가하기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잘 경청했는지 듣기 평가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첫 번째 발표자는 특이하게도 친한 친구 한명을 지목해 그 친구에게 필요한 ‘성격’을 상품으로 내걸었다. 공부는 잘하지만 허둥거림과 건망증이 심한 친구에게 자신이 준비한 ‘차분함’과 ‘주의력’을 판매한다면 그 친구가 단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설득했다. 가격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 친구가 원하는 가격에 팔겠다고 했다. 발표를 들은 친구의 표정이 나빠 보이지 않은 걸로 봐서 두 사람의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부지런히 모둠을 돌며 포스트잇에 적은 구매‧비구매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고, 잠시 후 수업 속 쇼호스트 역할을 자청한 두 학생이 나와 TV 홈쇼핑 광고에서 봤음직한 언변과 연기로 시청자 댓글에 해당하는 모둠의 의견들을 소개했다. 그 친구한테 딱 맞는 상품이라는 구매 의견이 있는가 하면, 철들면 자연스럽게 고쳐질 것이므로 구매하지 않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쇼호스트의 감칠 맛 나는 멘트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고 선생님은 발표자에게 친구들의 피드백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첫 번째 발표자는 자신의 설득이 어느 정도 통한 것 같다며 상품 가치를 알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두 번째 발표자는 ‘다리가 긴 친구에게 필요한 맞춤 의자’를 판매했고, 같은 방식으로 발표가 이어졌다. 모둠의 구매‧비구매 의견이 포스트잇에 붙여지고, 쇼호스트들이 “놀랍습니다. 매진입니다”를 외치는 동안 나는 이 시간이 수행평가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빠져들었다. 어떤 발표자는 매진돼 기쁘다는 소감을 말했고, 또다른 발표자는 상품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비구매 의견에 억울하다고 말했다.
마지막 발표자는 목소리가 작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수업이 끝날 때까지 6인1조 모둠에서는 구매 여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고, 발표자가 발표하는 동안 개별 평가지에 경청의 흔적을 남겨갔다.
수업 후, 선생님과의 수업나눔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이 충돌할 때 타당한 근거를 들어 상대방을 설득하며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소통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쇼호스트 역할을 교사가 할 수도 있었지만 재치와 끼가 넘치는 학생들에게 공을 넘겨주니 훨씬 더 풍성한 수업이 됐다고 평가했다.
나는 이날 마지막 발표자가 전달력이 약해 호응이 떨어지고 한창 달아오르던 분위기를 침체시켰을 때, 선생님이 “지금 치아교정 중이지?”라고 물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선생님은 발표자 순서를 학생들이 정하게 했고, 4차시로 계획된 수행평가에서 1차시 발표자로 나왔다면 잘 하고 싶은 의욕이 많은 학생일 거라 했다. 그런데 결과가 자기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무척 속상했을 거라 말했다. 실망한 발표자를 대놓고 위로해줄 수는 없지만 그 학생이 상처받지 않도록 토닥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토론수업에서 ‘말하기’만큼 중요한 건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위한 ‘경청’의 자세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리고 자칫 참관자의 섣부른 판단으로 간과할 뻔 했던 장면을 수업자의 시선으로 되짚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