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신화, 전설, 민담, 구전 동화 등에는 인간 심리의 기저를 밝힐 수 있는 비밀과 집단 무의식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야기가 흘러올 수 있는 상당한 이유와 배경이 들어 있다.
‘김정금의 옛날 옛날이야기’에서는 그 비밀들을 한 꺼풀 벗겨볼 것이다. 왜 동화 속에는 새엄마와 친엄마의 대립구조가 들어 있는지, 여자 아이들의 성공담에는 어째서 간난신고의 고생길이 마치 하나의 ‘과업’처럼 열거되고, 남자 아이들이 영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집을 떠나는 과정이 들어 있는지 등 우리 주변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많은 이야기의 비밀들을 열어봄으로써 인간 사회가 면면히 쌓아오고 있는 집단 무의식은 무엇이고 어느 부분에서 그것들이 발견되는지,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의 사고와 심리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고민해 볼 것이다. |
재투성이 소녀, 고양이 신데렐라, 상드리용(프랑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동화 신데렐라는 전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판본이 존재할 만큼 널리 알려진 대표적 ‘이야기’다. 특히 신발 모티브로 인해 중국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뒷이야기부터 한국의 콩쥐팥쥐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구조와 서사를 가진 이야기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나라에서 구전과 가필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왜일까? 왜 세상의 사람들은 이 신데렐라 이야기를 이렇게 읽고 또 읽고, 말하고 또 말할까? 물론 대표적 판본이라 할 수 있는 그림동화의 이야기에는 이 신데렐라 말고도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림동화는 빨간 망토 이야기부터 장화신은 고양이, 백설공주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지금의 형태로 전해주고 있다. 다만 신데렐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콩쥐팥쥐만 해도 그렇다. 친엄마를 잃고 재혼을 한 아버지, 새엄마와 의붓딸, 우리의 주인공인 박해받는 신데렐라, 콩쥐가 등장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서사 구조도 매우 비슷하다. 새엄마의 구박이 시작되고 이것을 거드는 못된 언니 그리고, 마을 또는 궁궐의 잔치 또는 파티. 이 파티에 가기 위해 콩쥐나 신데렐라는 섞인 콩을 고르고 동물들의 도움을 받고 화룡점정으로 요정이나 마술 할멈의 마술 덕분에 변신을 하고.
이것뿐인가. 콩쥐나 세계의 모든 신데렐라는 파티에서 멋진 왕이나 왕자를 만나 그들의 ‘한눈에 뿅!’ 점지를 받고 순간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때 그녀들은 반드시 자신의 흔적 하나를 남긴다. 신발. 그것이 콩쥐의 꽃신이 되었든, 유리구두가 되었든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어쨌든 ‘예쁜 신발 한 짝’을 남기고 도망치듯 자리를 나오게 된다.
이어 신발의 주인공을 찾는 왕, 왕자, 고을의 원님 등 이들 남성들은 주인공 콩쥐나 신데렐라의 신발 한 짝을 들고 온 마을을 다 뒤져 지치고 포기할 무렵 드디어 신발의 주인공을 만난다. 그리고 ‘둘은 잘 먹고 잘 살았다’가 이야기의 끝이다.
물론 여기에는 각 나라, 마을, 판본의 차이에 따라 그림 같이 예쁜 동화를 벗어나는 잔혹동화의 면면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림동화의 신데렐라도 신발을 확인하는 과정이나 의붓 언니들의 결말이 좀 잔혹한 면이 있기는 하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보는 신데렐라는 프랑스의 페로가 만든 이름 하여 ‘페로본’이 전해지는 것이다. 프랑스 궁정에서 이야기나 시를 낭송하던 역할을 맡았던 페로는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모으고 정리해 자기의 입으로 구술하면서 기존의 이야기들을 상당부분 각색하고 정리했다. 특히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들을 일부러 빼고 자신의 임의대로 바꾼 이야기들이 제법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신데렐라다. 덕분에 아이들은 ‘공포스럽지 않게’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아이들 세상의 ‘만고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오랜 세월 신데렐라가 숨기고 있던 진짜 세상의 이야기, 집단의 무의식, 숨겨진 비유를 찾는 묘미를 일부 잃게 되기는 했다.
반면에 19세기 그림형제는 동화 ‘신데렐라’의 잔혹함을 그대로 드러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발에 발을 구겨 넣는 장면이다. 언니들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버려진 한 짝 신발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가락과 발꿈치를 자르게 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엄마의 요구였다는 것이다. 첫째 딸의 발이 신발에 맞지 않자 엄마는 딸의 다섯 발가락을 자르게 한다. 그렇게 신발을 신고 떠났던 큰언니는 그러나 신발 밖으로 흐르는 피로 인해 발각이 되고 곧 내침을 당한다. 둘째 딸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엄마는 발뒤꿈치를 잘라 신발 속에 발을 넣게 하고 궁으로 떠나게 하지만 역시 중간에 이르러 새들의 노래 소리로 왕자(왕)는 곧 이 가짜를 알아챈다. 당시 새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 아가씨가 신고 있는 신발을 봐요. 피투성이네요. 아가씨의 발에 그 신발은 너무 작아요. 그 아가씨는 무도회에서 만난 아가씨가 아니랍니다.”
이후 버려진 신데렐라의 언니들은 모두 새에 의해 두 눈이 쪼이고 결국 눈이 먼다. 물론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는 얘기다.
콩쥐팥쥐 이야기에도 이런 잔인한 장면들이 제법 있다. 특히 이야기의 끝에 왕비가 돼 궁에 들어간 콩쥐를 찾은 팥쥐가 동생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후, 연꽃으로 변한 콩쥐가 다시 팥쥐를 죽이게 되는 과정이 거의 괴기스러울 만큼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어찌 어찌 꽃과 수정으로 모습을 바꾼 콩쥐는 결국 복수에 성공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에 언니를 젓갈로 담아 새엄마에게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여러 판본에 따라 젓갈 속 시신을 그대로 보게 했다는 이야기부터 담근 젓갈을 심지어 새엄마가 먹게 된다는 이야기까지 결코 신데렐라에 ‘뒤지지 않는’ 잔혹함을 선사한다. 물론 이 무섭고 끔찍한 부분들은 이후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서는 상당부분 윤색되고 ‘정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 신데렐라‘류’의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짚어볼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른 데 있다. 그 첫 번째가 새엄마와 새언니들이다. 아이들의 동화에는 유독 이런 새엄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들 신데렐라 이야기에도 마찬가지다.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친엄마 그리고 등장하는 새엄마. 이때 새엄마들은 꼭 새언니나 다른 의붓딸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리고 시작되는 간난신고의 고생길과 구박, 눈물.
아이들은 이 동화책들을 읽으며 새엄마의 구박을 ‘마음껏’ 성토하고 미워하며 자신의 감정이 옳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결국 새엄마는 마지막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새엄마가 친엄마라면?
동화나 민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주장도 여기에 닿아 있다. 실제로 이 새엄마는 친엄마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없던 아가였던 시절, 울기만 하면 엄마의 따뜻한 젖과 품을 마음껏 취할 수 있었던 아이들은 곧 유아를 벗어나 어린이로 성장한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낯선 엄마를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엄마, 자신이 원하면 무엇이든 제공해주던 엄마, 한결같이 자애로웠던 엄마가 갑자기 화를 내고, 야단을 치고, 혼자 힘으로 하라고 ‘과업’을 제시하고 때로는 버린다고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때 아이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엄마가 낯설다. 그리고 이내 생각한다.
‘아, 저 사람은 우리 친엄마가 아닐 거야. 우리 엄마는 어디 갔지? 나쁜 요정이 엄마를 데려가고 얼굴만 똑같은 모습으로 데려다 놓은 거야. 아…, 엄마 (훌쩍)’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이들은 ‘음험하고 때로는 잔혹한’ 상상을 이어간다.
‘저 새엄마는 죽어야 돼. 누군가 몰래 입을 꿰매거나 불에 태워 죽이면 좋겠어. 그러면 아무 말도 못하게 될 것이고 우리 친엄마도 다시 살아올 수 있어. 아…, 저 새엄마를 누가 죽여주면 좋겠다. 친엄마는 어디 있지? 아…, 엄마 (훌쩍)’
아이들의 마음속에선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 간다. 그리고 이내 옆에 있던 동화책을 잡아드니 세상에! 정말로 새엄마들은 이렇게 나쁜 사람이란 것을 확인시켜주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뿐인가. 새엄마와 새언니들은 모두 불행해지고 결국 주인공은 멋진 사람으로 변해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때 아이들은 안도한다. ‘아, 내가 옳았어. 거봐, 새엄마들은 모두 나빠. 모두 죽게 될 거야.’
실제로 이 시기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두 명의 엄마가 살고 있다. 나에게 전적으로 ‘착한’ 친엄마와 온전히 ‘나쁜 새엄마’. 이렇게 두 명의 엄마로 분리하지 않고는 아이들이 해당 시기 엄마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에 그렇다. 만약 나를 좋아해주는 ‘착한’ 엄마와 저렇게 무섭게 야단을 치고 때로 매도 드는 저 엄마가 같은 사람이라면? (물론 같은 사람이지만, 아이들 무의식 깊은 곳에서) 엄마의 그 정체감을 하나로 통합해 내기가 ‘아직은’ 버거운 것이 이 시기의 아이들이다. 때문에 아이들은 매우 무의식적으로 엄마를 ‘분리’한다. 착한 친엄마와 나쁜 새엄마로. 실제로 누구나 자라는 과정에서 한번쯤은 자기의 엄마를 ‘진짜 우리 엄마일까? 새엄마가 아닐까?’ 하고 궁금해 하거나 의심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만약 아이들이 이 같은 ‘엄마 분리’를 제때 해내지 못한다면 아마도 아이들은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엄마 죽어버려’ 라고 속으로 말한 사실이 현실로 이루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때로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새엄마가 등장하는 책을 좋아하고 자주 읽게 되는 것이다. ‘아, 내가 미워하는 것은 새엄마지 친엄마가 아니야. 그리고 저 새엄마는 저렇게 나쁜 사람이니까 나는 더 맘껏 미워해도 돼.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야. 봐봐! 신데렐라에도 그렇게 나오잖아’
그렇게 성장하며 아이들은 엄마의 결핍, 엄마의 소외, 다시 말해, ‘엄마도 역시 한 사람의 약한 인간이구나…’를 부지불식간 느끼고 알게 되며 드디어 성인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또 하나 짚어 볼 부분은 ‘새언니들’이다. 콩쥐에게도 팥쥐라는 새언니가 있었듯이 신데렐라에도 새언니는 여지없이 등장한다. 만약 새엄마가 친엄마의 또 하나의 얼굴이라면 이 새언니들은 누구일까? 맞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나 오빠, 형, 누나가 될 것이다.
엄마에게 느끼는 분리적 감정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자신의 동기들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특히 이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기간 갈등과 혼란을 다룬 이야기로 더 유명할 만큼 동기간의 문제가 극명히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예쁜 옷을 혼자만 차지하는 언니,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언니, 나는 이렇게 힘든데 혼자만 웃고 있는 언니 등등. 아이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손위 동기에 대한 미움과 반감 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사실 신데렐라이기도 하다.
그 외도 신데렐라나 콩쥐 이야기에는 생각해 볼 매우 중요한 모티프 하나가 등장한다. ‘신발’. 이 신발은 무엇을 의미할까? 요것은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