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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극적인 소설같은 '박열'이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영화가 주는 감동과 느끼는 역사의식은 공교육에서 가르친 내용 못지않게 마음을 움직인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 '동주' 이후 '박열'을 내놓았다. 이 영화는 22세 독립투사의 불꽃같은 삶의 이야기다. 28일 개봉한 '박열'은 '동주'와는 사뭇 달랐다. 다른 층위의 감동이 있었고, 여러 지점에서 보는 관객에게 피를 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저항과 투쟁의 방식부터 달랐다. 시인 윤동주가 고독한 시 쓰기로 일제의 폭압에 저항했다면, 박열은 냉철한 이성과 기개로 일본 제국주의 본토인 도쿄에서 일제 지배층에 맞섰다.


그는 자신처럼 아나키스트인 일본 여자 동갑내기인 가네코 후미코와 결혼을 했고 21살이 되던 1923년, 이들 부부는 천황 아키히도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준비하던 중 계획이 발각돼 동지 14명과 함께 체포됐다.  그는 아내와 함께 제 발로 일본 대법원에 들어갔고, 법정에서 제국주의의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000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된다.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일본 내각은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박열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의 한복판에서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말 안 듣는 조선인’을 빗대어 불령선인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박열은 불령선인에서 착안해 불령사라는 단체명으로 활동할 만큼 패기가 넘쳤다.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는 이 영화의 모든 걸 압축해놓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가 시 전문을 읊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은유라 생각한다. 그의 다리에다 나도 오줌을 눈다. 너희들이 폭압하면 나도 되갚겠다는 것이다. 박열은 실제로 인생을 자기가 쓴 시대로 살았다.  또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력적이다. 일본이라고 무조건 악으로 보지 않는다. 민중을 억누르는 세력이 적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국가나 민족 단위를 초월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 같기도 하다. 헐벗은 민중에 대한 사랑, 죽음의 길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것 등, 하물며 허름한 차림새에 길게 어질러진 머리까지.


박열은 일본 내각의 음모를 눈치채고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도록 황태자 폭탄 암살 사건을 자백한다. 그는 조선 최초의 대역 죄인이 돼 사형까지 무릅쓴 공판을 시작한다. 이어서 가네코는 우리는 부부이고 모든 일은 함께 추진했으니 사형이든 무기 징역이든 형량을 꼭 같이 해주어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일본에서 보고 일본이 날조하고 폄하하지 못하도록 고증작업을 거쳤다는 것이다. 야마다쇼우지의 평전을 바탕으로 가네코의 옥중수기, 아사히 신문과 산케이 신문 자료 등을 넘겨받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봤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감독의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영화로 되살아난 박열의 일생이야말로 1900년대 전반기의 한국사를 대변하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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