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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조선 왕릉의 시작 건원릉 이야기

동구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이름 그대로 아홉 기가 있다. 또 의미가 있다면 동구릉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건원릉이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지 않았다면 조선 왕릉 자체가 존재하지 않다. 동구릉은 조선 왕릉이 시작된 곳이다.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이다. 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회의에서 결정됐다. 한반도에 왕릉은 총 42기가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2대 정종의 후릉은 북한에 있다. 이 두 기를 제외하고 남쪽에 40기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 왕조가 500년이 넘도록 유지되고 그 왕들의 무덤이 이토록 온전하게 보전되기는 세계에도 유래가 없다. 능에 담긴 고유의 철학과 왕가의 예술과 조화를 잃지 않은 자연주의가 극찬을 받았다.

조선 왕릉은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학에 근거해서 자리를 잡는다.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읽고,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철학이 왕가의 무덤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합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 공간이다. 조상의 문화유산이자 천혜의 녹지 공간이다. 그야말로 축복으로 남아 있다.

여름에 찾은 동구릉은 벌레가 먼저 반긴다. 습한 날씨에 무더위까지 겹쳐서 벌레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을까. 짙은 풀냄새, 도심에서 안 나는 나무 향기가 가득하다. 숲에 들어서니 걸음이 느려진다. 늘씬하게 뻗은 나무들이 키 자랑을 하고 있다. 작은 숲에 들어서니 더위는 바람에 날아간다. 부드러운 흙길 위로 한발 한발 걷는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따라온다. 숲 그늘에 우리보다 먼저 온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득한 조상의 무덤에 온 것을 알까. 더위에 지친 얼굴을 들고, 저마다 재잘거리고 있다. 이 공간에서 아이들은 자연을 느끼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질 것이다.

숲길을 옆에 두고 흙길을 걷다보면 수릉을 먼저 지난다. 그리고 현릉을 지나면 눈앞에 건원릉이 자리하고 있다. 건원릉은 동구릉 맨 안쪽에 있다. 보통 왕릉은 모두 이름이 외자다. 건원릉만 두 자다. 능의 참배는 홍살문부터 시작한다. 이 문은 붉은 색으로 되어 있는데, 신성한 지역임을 알린다. 정자각(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까지 이어지는 길로 판석이 깔려있다. 높은 쪽은 신도로 왕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며, 낮은 쪽은 참배하러 온 왕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어도라고 한다.

정자각에 오르면 건원릉이 보인다. 모든 왕릉의 봉분은 잔디로 치장했다. 이 능은 봉분에 잔디 대신 억새풀을 심었다. 고향을 그리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경도 영흥의 흙과 억새를 옮겨왔다. 해서 왕릉 사진을 보다가 봉분에 억새풀이 무성한 것을 보면 바로 건원릉임을 알 수 있다.

이성계는 함경도에서 무관으로 성장했다.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 변방을 지키는데 공을 새웠다. 이로 인해 고려 중앙에 이름을 알리고, 쓰러져 가는 고려의 왕권을 지켰다. 패전을 모르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하겠다는 우왕과의 대립하다가 조선을 건국한다. 하지만 왕권을 차지하고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아들 이방원이 형제끼리 피를 보며 싸우는 광경을 봐야 했다. 1392년 조선 건국으로 왕에 오르고, 1398년까지로 햇수로는 6년 남짓 통치를 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지만, 자식들의 다툼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죽었다. 

키 작은 억새들이 바람 흔들린다. 아버지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의 역사의 길에서 갈등을 애잔하게 전하는 것 같다. 원래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리고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경복궁 서남방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했다. 그러나 아들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랑했던 신덕왕후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현재 자리에 조성했다. 아들 태종이 아버지 태조의 유언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봉분에 고향 억새풀을 심었을 것이다.

조선 왕릉에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인물상과 동물상을 비롯하여 봉분의 둘레와 전면에 의식용 석물들을 배치하였다. 석물은 왕릉의 장엄함을 강조하고 주변 경관과 조형적으로도 조화를 이루어 격조 높은 예술품이다. 건원릉은 조선 왕릉의 시작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양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것을 하나도 볼 수 없다. 봉분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정자각에서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다. 능에 오르지 못하니 곡장(봉분의 동, 서, 북에 들러 놓은 담장)은 물론 문인석 무인석 등을 하나도 볼 수 없다.

조선 왕릉의 석물 조각은 한국미술사에서는 불교 조각 이외의 조각풍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와 조각사를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훼손을 방지해서 길이 보전해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문화유산이다. 여주 세종대왕의 영릉은 관람객이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턱대로 능의 출입을 막을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가까이 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품을 가까이 볼 수 있는 문화 시설 관리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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