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노란 동백꽃’이 나오는 것이다.
거지반 집에 다 내려와서 나는 호드기 소리를 듣고 발이 딱 멈추었다. 산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하니 깔리었다. 그 틈에 끼어 앉아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시리 호드기를 불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고 앞에서 또 푸드득 푸드득 하고 들리는 닭의 횃소리다. 필연코 요년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닭을 집어내다가 내가 내려올 길목에다 쌈을 시켜 놓고….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 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첫 번째는 남자 주인공이 산에서 나무를 해 내려오는데 점순이가 호드기(버들피리) 를 불면서 닭쌈을 붙이는 것을 목격하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 부분으로 점순 이가 남자 주인공을 떠밀어 동백꽃 속으로 쓰러지는 장면이다. 동백꽃은 붉은색이 대 부분이고 어쩌다 흰색이 있는 정도다. 그런데 김유정은 왜 노란 동백꽃이라고 했을까. 김유정이 잘못 묘사한 것일까. 아니면 김유정 고향인 강원도에는 노란색 동백꽃이 있는 것일까.
노란 동백꽃? 정체는 생강나무꽃
답은 둘 다 아니고, 김유정이 말한 ‘동백’은 일반적인 상록수 ‘동백나무’가 아니다.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나무는 강원도에서 ‘생강나무’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 다. 김유정은 강원도 춘천 사람이다. 강원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생강나무를 ‘동백나무’ 또는 ‘동박나무’로 불렀다고 한다. 대중가요 ‘소양강 처녀’의 2절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로 시작한다. 여기서 나오는 동백꽃 도 생강나무꽃을 가리키는 것이다. 붉은 꽃이 피는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는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동백기름 대신 머릿기름으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에야 알려졌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도 김유정의 소설집 표지를 붉은색 동백꽃으로 그린 출판사가 있었다. 김유정 고향마을에 조성해 놓은 김유정문 학촌 전시관에도 표지에 붉은 동백꽃을 그려놓은 김유정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
생강나무는 잎을 비비거나 가지를 자르면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생강나무 꽃이 필 때면 특유의 향기가 퍼지기 때문에 근처에 생강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는 바로 생강 냄새 를 가리키는 것이다. 생강이 아주 귀하던 시절에는 이 나뭇잎을 가루로 만들어 생강 대신 쓰기도 했다.
생강나무는 가을에는 동물 발바닥 모양으로 생긴 잎이 샛노란 빛깔로 물들어 붉게 물든 가을 산에 포인트를 준다. 열매는 처음에는 초록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늦가을엔 다시 검은색으로 변하는 등 색깔이 세 번 변한다. 까맣게 익은 열매와 노랗게 물든 잎이 어울려 보기 좋다.
김유정문학촌 근처 능선길은 온통 노란 물결
‘동백꽃’은 김유정이 죽기 1년 전인 1936년 발표한 작품이다. 마름과 소작인으로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춘기 남녀가 ‘노란 동백꽃’ 피는 농촌을 배경으로 사랑에 눈뜨는 과정을 그렸다. 눈치 없는 남자 주인공이 점순이의 애정 표시를 알아차리지 못해 당하는 갖가지 곤욕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 둘째 딸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동백꽃’을 읽고 점순이의 애정 표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점순이가 자꾸 수탉을 데려와 남자 주인공네 닭과 싸움을 붙이며 못살게 구는지, 왜 자꾸 감자 같은 것을 주면서 거절하면 화를 내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에게 묻기까지 해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으며 “좀 크면 알 거다”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더니 어느 날 빙긋이 웃으며 “왜 점순이가 ‘나’를 못살게 굴었는지 이제 알겠어요”라고 했다. 소설 마지 막 부분에 둘이 동백꽃 속으로 넘어지는 장면도 “처음에는 그냥 손을 잘못 짚어 넘어 지는 줄 알았어요”고 해서 한바탕 웃은 일이 있다.
김유정의 고향이자 소설 ‘동백꽃’의 배경 마을인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에는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고증을 거쳐 김유정 생가를 복원해 놓았고, 마당에는 ‘동백 꽃’에서 점순이가 닭싸움을 붙이는 장면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둘째 딸은 이 에 많이 심어놓은 생강나무를 보더니 “여기로 넘어졌으면 아팠겠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개나리라면 몰라도 생강나무는 나뭇가지에 꽃이 피기 때문에 꽃 속에 ‘폭 파묻혀 버렸다’는 표현을 쓰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실레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병산(652m)은 곳곳이 김유정 작품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를 기리기 위해 금병산에는 ‘봄봄길’, ‘만무방길’ 같이 김유정의 작품 이름을 따서 만든 등산로가 있다. 산 정상에서 춘천 시내를 내려다보며 내려가는 길이 ‘동백꽃길’ 이다. 능선길에서는 생강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생강나무와 비슷한 꽃, 산수유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초봄, 비슷한 시기에 생강나무와 비슷한 꽃이 피는 나무 가 있다. 산수유도 생강나무처럼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래서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초보자들은 멀리서 보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 나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다.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이고 산수유는 층층 나무과로 과도 다르다. 가까이 가보면 생강나무는 줄기에 딱 붙어 짧은 꽃들이 뭉쳐 피지만, 산수유는 긴 꽃자루 끝에 노란 꽃이 하나씩 핀 것이 모여있는 형태인 것을 볼 수 있다. 색깔도 산수유가 샛노란 색인 반면 생강나무는 연두색이 약간 들어간 노란색으로 좀 달라 고수들은 멀리서도 구분할 수 있다. 또 생강나무는 줄기가 비교적 매끈 하지만 산수유 줄기는 껍질이 벗겨져 지저분해 보인다.
꽃 필 때가 지나면 두 나무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나중에 잎이 나는 것을 보면, 산수유 잎은 긴 타원형이지만, 생강나무 잎은 동물 발바닥 모양이다. 가을에 생강나 무는 동그란 까만 열매가 열리고 산수유는 타원형인 빨간 열매가 열리는 점도 다르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자생하고, 산수유는 대부분 사람이 심는 것이기 때문에 산에서 만나는 것은 생강나무, 공원 등 사람이 가꾼 곳에 있는 나무는 산수유라고 봐도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