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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육> 70년, 한국 교육 70년 발자취



인간의 나이 70세를 고희(古稀)라고 표현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예로부터 드물다’는 말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사람이 70까지 사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은 데서 유래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 로부터 사람이 살아남기 어려운 나이가 70이었다. 70년을 존속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정기간행물도 그렇다. 해방 직후 이 땅에 다양한 정기간행물이 등장했지만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은 몇 개 신문 이외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948년 7월 탄생, 지난 70년 세월을 대한민국 교육의 변화와 함께 해온 <새 교육>은 대한민국 교육 70년을 대표하는 상징물임에 틀림없다.


<새교육>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이고,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는 <새교육> 70년의 경험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모두가 이야기 하는 문명사적 전환의 시기인 지금, <새교육> 70년의 성과를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미래 교육의 방향과 과제를 탐색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임에 틀림 없다. <새교육> 70년은 우리 교육이 걸어온 제1의 길, 제2의 길, 제3의 길과 앞으로 걸어갈 제4의 길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먼저 <새교육>에 발표된 글들을 통해 우리 교육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자.


대한민국 교육이념 제시, 커리큘럼 개조운동 전파 앞장

우리 교육이 첫 발을 내디뎠던 제1의 길은 1948년 7월 정부 수립 전야에 이루어진 <새교육> 창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새교육> 창간호는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는 데 우리의 새교육이 바탕으로 삼아야 할 교육 이념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창간호 ‘머리말’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의 이념은 이러하다.


농삿군은 농삿군의 위인이 되어라. 고기잽이는 고기잽이의 위인이 되어라. 신길이는 신길이의 위인이 되어라. 땜쟁이는 땜쟁이의 위인이 되어라. 자기임무 를 충실히 실천한 자, 사람 중에 가장 큰 위인이다. 인개위인(人皆偉人)됨을 가르치는 지침이 우리 모임의 ‘새교육’이로다.


<새교육>이 추구하였던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임무에 충실하면 위인이 될 수 있는 사회였다. <새교육>이 추구하는 교육은 그런 인간을 만드는 데 봉사하는 것이었다. <새교육> 창간호가 선언한 대한민국 의 교육이념은 인개위인(人皆偉人, 자기 임무에 충실할 때 위인이 될 수 있다)의 정신이었다.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재능을 찾고, 이에 기초하여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임무를 설정하고, 이 임무에 충실하면 누구나 위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에 충실한 교육이었다. <새교육>이 선언하였던 교육이념 실현을 통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당시 교육자들의 열정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1950년대 중반 커리큘럼 개 조운동이었고 이를 이끈 것은 <새교육>이었다.


미국 군인들이 지배하던 군정 3년, 민족주의적 열정이 민주주의를 압도했던 정부 수립 초기 2년, 그리고 공포와 가난이 지배했던 전쟁 3년의 시간에도 우리 민족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커리큘럼 개조를 통해 경험 중심, 생활 중심 교육을 실천하려는 교사들의 열정은 전쟁의 공포를 이겨냈다. 전주 풍남국민학교, 부산 동광국민학교, 서울 남산국민학교와 남대문국민학교 등 전국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커리큘럼 개조운동을 전국 교사들에게 전파하는 데 있어서 <새교육>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새교육>은 일찍이 1949년 2월호(제2권 1호)에서 ‘커리큘럼(curriculum)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게재하여 커리큘럼의 개념과 조직 원리를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교육과정에 대한 대한민국 최초의 학술적 논의였다. 195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교육과정 개조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를 상징하는 개념은 ‘경험 중심 교육과정’과 ‘중핵교육과정’이었다. 교육학 분야 학회 활동이 활성화되지 않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 두 가지 교육과정 이론을 소개하고, 두 가지 핵심 개념을 따라 교육과정 개조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바로 교사단체 대한교련과 잡지 <새교육>이었다.


1952년 8월 간행된 속간 제2호는 정범모의 ‘교육사조의 새로운 경향’과 이수남의 ‘현대교육학과 쨘 듀이’를 통해 지식을 넘어 경험과 생활을 강조하는 존 듀이의 교육철학을 소개한 후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국내외 커리큘럼 연구 상황을 소개하고, ‘커리큘럼을 말하는 좌담회’ 등 특집 논문 세 편을 게재했다. 1952년 12월에 나온 <새교육> 제4권 제3호에는 다시 ‘한국 교육을 말하는 좌담회-커리큘럼을 중심으로 한’이란 긴 글이 실렸다.


전쟁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던 1953년에 이르자 커리큘럼 개조운동은 교사 문영한의 표현에 따르면 ‘절정’에 이르렀다. 정범모는 커리큘럼 개조운동이 이미 “新鮮潑刺한 교육적 노력을 자극해 왔다”라고 평했고, 주요섭은 “커리큘럼에 대한 탁상논리는 비록 산만적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교육계에서도 이미 충분히 논의된 줄로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한 가지씩이라도 실천에 옮겨가면서 재건하고 평가하고 개선해 나아가는 것이 적당하다고 볼 시기에 이르렀다”라고 주장했다. 1954년에 이르면 커리큘럼 개조운동은 ‘논의 단계를 지나 실천 단계’에 확실하게 접어들었다(김향, 1954). 문영한은 당시 느낌을 “마치 연구 발표 시즌 같은 감”이라고 표현했다. <새교육>은 1955년 제2호부터 4회에 걸쳐 커리큘럼 개조운동의 중심 개념인 단원학습 사례를 연재했고, 마지막 연재인 제5호에는 ‘연구수업의 참관과 평가 매뉴얼’이 제시됐다.



1951년부터 시작된 교사 중심의 커리큘럼 개조운동은 4년이 지난 뒤, 1955년에 이르러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공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의 현장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 교사들은 ‘성공적’이라고 표현할 정도 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교육 역사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었고, 이를 이끈 것은 <새교육>이었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 이루어진 활동이었다는 면에서 역사적 의미는 더욱 크다.


공권력의 교육 간섭에 교육자들의 저항 주도 문제는 이런 놀랄 만한 운동이 하루아침에 식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국가교육과정의 공포였다. 국가교육과정은 1955년 8월 1일 문교부령이라는 법률 형태로 발표됐는데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던 커리큘럼 개조운동을 냉각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법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강제력이 동반된 문서였다. 우리 교육이 내포하고 있던 민주주의 교육을 향한 현장 교사들의 열정이 식기 시작하였고, 우리 교육 속에서 움트기 시작하던 민주주의 교 육이라고 하는 맹아가 녹아버리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성내운의 표현대로 제1차 국가교육과정 공포는 마치 ‘소나무에 대나무를 접붙힌’ 꼴이었으며, 1950년대 교육의 역동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런 도전은 1950년대 중반에 진행된 교육자치제 폐지를 향한 공권력의 교육 간섭과 교육자들의 저항으로 이어졌고, 교육자들의 저항을 이끌었던 것도 역시 <새교육>이었다. 1950년대 전 기간을 통해 <새교육>이 보여주었던 정신은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믿음과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던 교사들의 열정이었다. 4.19 학생 혁명은 그런 믿음과 열정의 산물이었다. 1960년 4월 학생 혁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새교육> 1960년 5월호가 발간되었다. 학원 탄압, 데모, 부정 선거, 그리고 혁명으로 이어진 혼란과 변화 속에서도 <새교육>은 중단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혁명의 성공 이전 사회적 혼란 속에 작성된 권두언과 학생 혁명이 성공하던 날 감격 속에 작성된 편집후기가 함께 실린 역사적 작품이 바로 1960년 5월호 <새교육>이었다는 점이다. 편집후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4월 26일, 누구는 이 날을 민권 승리의 날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시민 혁명의 날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이 날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 온 날이다. 그냥 얻은 것이 아니고 고귀한 학도들이 피의 댓가 를 지불하고 스스로 민주주의를 전취한 잊을 수 없는 날이다....한국의 지성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구출한 것이다. 학원은 죽지 않았다....이 후기를 쓰는 순간은 4월 27일 하오1시다....아아 교육의 중대함이어, 학원의 존귀함이어!<L>


이 편집후기는 바로 이승만의 하야일(4월 27일)에 작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새교육> 1960년 5월호는 역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5월호의 시론 주제는 이전 호에서 예고된 대로 ‘학원의 자유’였다. 4.19 혁명의 성공은 학원의 민주화와 교원의 처우개선이라는 오래된 과제 해결을 촉구했던 많은 교사들의 참여 속에 교원노조 탄생을 가져왔다. 이는 정부 수립 이후 유일무이한 교원단체로 대우를 받아오던 대한교련에는 최초이자 최대 위기로 다가왔다. 1960년 초에 불어닥친 이 위기에 대처하는 대한교련의 자세는 굳건하지도, 바르지도 않았다. 결국 회원 이탈 현상 속에 대한교련이 흔들렸고, 이는 <새교육>의 위기로 이어졌다. <새교육>은 1960년 10월호와 11월호가 발간되지 못하였다. 12월호부터 1961년 2월호(90호)까지는 축소된 지면으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기약 없는 휴간에 들어갔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을 맞았다.


국가의 교육 지배 심화, 교사 자율성 상실

5.16 군사정변으로 시작된 한국 교육 제2의 길은 절망의 길이었고, 짧지 않은 길이었다. 한국 교육 제2의 길은 교육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 과잉과 이에 대한 도전의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노태우 시대로 이어지는 30년의 시간이다. 한국 교육 제2의 길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교육에 대한 국가 관여의 극대화와 교사의 자율성 상실이다. 교사로 상징되는 학교의 자율성은 소멸하고, 국가권력의 교육 지배는 점차 공고해져 갔다. 교육주체여야 할 교사, 학생, 학부모들은 점차 교육현장에서 객체 혹은 타자화돼 갔 고, 국가권력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


군대문화에 익숙한 당시 권력층은 획일적이고, 일관성 있고, 투명한 기준을 선호했다. 이들의 지도 아래 생산해 내는 많은 교육 정책들은 현장 교사들의 자율적 판단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진 획일적 기준의 준수를 강요했다. 교원에 대한 학력시험 실시, 교육자치제 폐지, 그리고 입시의 국가관리 체제 정착이었다. 국민교육헌장 공포로 조성된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문교부 주도로 도입된 무시험중학입시제(1969년 시작), 대학입학예비고사제(1969년 시작), 고등학교 평준화제(1974년 시작)를 통해 모든 공교육 단계에서 학생 선발을 개별 학교 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책임지는 체제를 만들었다. 교육법이 규정하고 있는 각 급 학교장의 학생선발권을 무시하는 초법 률적 제도가 순차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제2의 길을 폭주하는 국가권력이라는 기관차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1980년에 나온 ‘7.30 교육정 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이었다. 일류 대학 입학을 향한 지식 중심의 암기 교육과 끝없는 사교육 경쟁을 종료시키고, 인 격교육과 전인교육을 실천하겠다는 신 군부 선언에 일부 전문가들과 교육자들은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고, <새교육>은 이런 분위기를 전했다.


<새교육>1980년 10월호에 실린 ‘교육혁신에 거는 기대’에서 차경수 교수(서울대)는 이 방안이 새로운 시기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새교육> 1980년 10월호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 안’ 전문과 함께 문교부에서 시달한 ‘학교정화운동 추진계획’과 ‘과외단속 시행지침’을 게재했다. <새교육>은 1980년 11월호에서 다시 특집 ‘교육개혁의 과제와 전 망’을 마련했다.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이 발표됨으로써 “교육정도의 길은 보다 밝아졌다”고 단언한 후 개혁 배경과 과제를 조망했다. 9월 1일에 취임 한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사 중 교육 관련 부분을 발췌, 게재하기도 했다.


국가 권력에 저항했지만 교직사회는 분열

국가 주도의 억압적 교육에 대한 저항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6월 항쟁을 전후로 두 개의 교사 선언이 발표됐다. 첫 번째 선언은 1986년 5월 10일 YMCA중등교육자협회 소속 교사들이 발표한 ‘교육민주화선언’이었고, 다른 하나 는 1987년 10월 23일에 발표된 대한교련 중심의 ‘교육의 자율화를 위한 교육선언’ 이었다. 1960년 4.19 학생 혁명 직후 벌어졌던 교직사회 분열에 이은 두 번째 교직사회 분열을 알리는 두 개의 선언이었다. 교육민주화선언을 지지하였던 교사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힘을 모았고, 교육자율화 선언을 주도하였던 대한 교련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체 내지는 무력화에 앞장서 왔다. 이후 우리나라의 교육은 하나의 교육이 아니라 두 개의 이질적 교육이 동거하는 안타까운 양상으로 변해 왔다.


1991년 1월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예체능 분야 대학입시 부정사건과 같은 공통 관심사 앞에서는 진보적 언론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뿐 아니라 <새교육> 또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예컨대 <새교육> 1991년 4월호에는 ‘돈 놓고 합격 먹기, 예체능 입시 비리 백태’라는 글이 실렸고 <새교육>은 당시 입시전쟁을 ‘스파이전’이라고 표현했다. 1991년 같은 해에 도입된 교원임용고 시와 관련해서도 진보적 교원단체와 <새교육>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진보적 교원단체는 교육정책 실패의 상징으로 여겼고, <새교육>은 교원임용 정책의 표류(1991년 9월호)로 해석했다.


우리나라 교육 제2의 길 후반에 출현한 두 개의 교직단체는 비록 일부 교육적 이슈에서는 공감대를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교육 정책에 대해서는 극단 적인 대립 입장을 드러내왔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이 제2의 길 30년을 지내오며 더욱 선명하게 획득하게 된 부정적 특징인 ‘교육의 국가 주도성’을 해소하지 못하게 만든 교육 내적 배경임에 틀림없다. 국가권력으로부터 되찾아야 할 교육에 대한 교사 주도성은 교직사회 분열로 인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한국 교육 제2의 길이 남긴 부정적 유산, 교육의 국가 주도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분열된 교직단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었다. 교직단체의 통합은 민족의 통일만큼이나 어려워 보이지만, 교직단체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새교육> 70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교사의 자율성 회복이 교육 민주화의 기본 조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될 일이다.



5.31교육개혁 추진, 신자유주의 정책에 매몰

한국 교육 제3의 길은 사회주의의 붕괴라고 하는 세계 질서의 재편, 그와 함께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의 인간과 함께 열리기 시작하였다. 신세대, X세대, 혹은 신인류라고 불리는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을 기성세대의 시각 으로 보려는 안이한 태도였다. 즉 이들을 기존 체제나 질서로부터 일탈이나, 상식으로부터 벗어난 비정상으로 보려는 태도였다. <새교육>의 시각 또한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을 보는 시선이 따뜻하지는 않았다. 청소년의 달을 맞아 1992년 5월호의 특집은 ‘신세대: 그들은 누구인가’로 구성되었다. 이 특집에서는 당시 청소년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스컴을 통해서 보도되는 청소년 범죄, 입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살 행위, 시내 버스나 전철 안 에 빈 자리가 있으면 먼저 뛰어가서 앉는 행위, 만원 버스 안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치고받고 장난치고, 대화의 절반 이상은 욕 으로 엮어 나가는 행위,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다.(<새교육> 1992년 5월호, 78쪽)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런 모습은 건강하지 않다고 규정하였고, 이런 건강하지 않은 모습은 잘못된 사고와 잘못된 의식구조의 결과라고 해석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 새로운 문명, 신인류 출현으로 도래할 수도 있는 사회적·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요구됐다. 그 응답이 1993년에 출범한 김영 삼 정부가 2년 준비 끝에 발표한 5.31교육개혁이었다. 이 개혁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진단한 문명사적 전환의 핵심 내용은 세계화, 정보화, 그리고 지식사회화였 다. 1995년 5월 31일부터 시작, 총 4회에 걸쳐 발표된 김영삼 정부의 교육개혁안을 합하여 우리는 5.31교육개혁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학점은행제, 대학설립 준칙 주의 전환, 학교운영위원회 설치와 교장초빙제 도입, 교육과정 개편과 외국어 교육 강화, 학생종합생활기록부 대입전형 반영 확대, 고등학교 유형 다양화, 교육과정평가원 설치, 교사 연구환경 개선, 공교육에 대한 투자 확대 등이 순차적으로 추진됐다.


5·31교육개혁안이 발표될 당시 총론적인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새교육>의 1995년 송년 특집에서 “21세기 신문명시대에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박한 과제의 반영”이라고 개혁안을 평가한 것이 잘 보여준다. 1996년 OECD에서 이 교육개혁을 검토한 후 이것이 “매우 혁신적”이었다는 평가를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우리 교육의 모습은 참담하다. 학교 붕괴라는 말이 언론과 학술 세계를 뒤덮었고, 영어 공용화 주장 속에 어린아이들은 조기유학을 떠났으며, 기러기 아빠들은 절망감 속에 경제 위기를 맞아 싸워야 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새교육>은 고교평준화정책 폐지와 고교 다양화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결과는 우월적 지위를 지닌 소수의 특수목적고등학교와 자율형사립고등학교의 성장, 열등 학생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일반고등학교의 황폐화였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는 5·31교육개혁

에 대해서 긍정적 평가보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 비판 대상 이 되고 있는 것은 당시 세계화를 추동했던 기본 이념인 신자유주의 영향이 명료해 보이는 정책들이다. 공교육에 대한 투자 확대 이외 대부분의 ‘수요자 중심’ ‘경쟁 중심’ 교육 정책들은 현재 우리 교육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들을 만들 어 내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교사를 개혁의 주체나 동반자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한 개혁안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교직단체의 큰 문제 제기가 없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 교육 제3의 길,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이념인 신자유 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마이클 애플의 표현대로 선택, 경쟁, 시장이다. 이는 특권 계층에게 부와 자원을 배분하는 장치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이 상과 가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임에 틀림없다(헨리 지루, 2009).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제3의 길을 통과하며 한국 교육은 철저하게 사유화되었다. 교육은 경쟁 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제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이르렀다.


과거 교육의 장애물 없애고 교육의 본질 회복해야

이제 우리나라 교육은 제3의 길 20년의 경험을 뒤로하고 제4의 길을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70년 동안 우리가 걸어온 세 가지 길에서 얻은 우리만의 교육적 지혜를 모아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 <새교육>을 통해 살펴본 우리 교육 70년의 경험이 가르치는 교훈은 명료하다. 교육은 더 이상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협력적이고 배려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장이 돼야 하고, 학생의 생활과 무관한 지식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학생의 경험과 관심이 존중받는 교육이 돼야 하며, 교사가 더 이상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주체로 거듭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특권적 지위는 해소돼야 하고, 입시 지옥을 만들고 강화하는 제도는 철폐돼야 하며, 교사의 자율성과 현장의 자율성을 억누르는 국가권력의 교육 지배욕은 내려놓아야 마땅하다.


한국 교육 제4의 길을 열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다. 지식교육이 아닌 인성교육, 이기적 인간이 아닌 협력적 인간의 양성을 내세우고 있으며 공교육 회복을 위한 교사의 선도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2015년 ‘인성교육진흥법’이 제정됨으로써 인성교육을 학교교육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어왔다. 인성교육은 학생의 인성 함양을 강조하고, 지식 중심 교육이 지닌 한계와 폐단을 지적하며, 이기심이나 경쟁보다는 배려, 소통, 협력 등의 가치가 교육의 영역에서 강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교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 교육 제4의 길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의 길이어야 한다. 교육의 중심인 학교는 사람들의 존재 그 자체를 풍성하게 하는 곳이 되어야 마땅하다 (마이클 애플, 2014).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본질이 살아나야 한다. 교육의 본질은 아이들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아서 기르는 것이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며, 아이들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국가나 시장이 아니라 교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 개의 험한 길을 걸으면서 우리 교육은 교육의 본질에서 점차 멀어져 왔다. 그 결과 국가는 몸집이 커지고 강해졌으나, 교육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괴롭고 피곤한 상태로 내몰렸다. 우리 교육이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나온 세 개의 길에서 만들어져 우리 교육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장애물들이 치워지고, 교육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채워져야 한다.


예컨대, 장애물은 국가권력의 교육 지배 욕망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교육의 수단화, 혹은 교육에 대한 국가권력의 권한 강화는 그것의 결과로 교육 현장에서 교사 주도성 상실, 교직 전문성 약화를 가져왔다. 교직이 전문직이 되지 못한 책임을 교사들에게 묻는 것은 희생자를 비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교육을 오염시키는 시장주의다. 우리 교육 제4의 길은 시장주의 보호 아래 불공정 경쟁을 토대로 자라나는 괴물들이 사라진 길이어야 한다. 이런 괴물을 기르는 무책임한 시장주의와 교육에서 특권이 필요하다는 교육 특권주 의를 없애는 것이 바로 공권력이 할 일이다. 교육을 통해 키워야 할 인간은 경쟁하는 인간이 아니라 ‘협력하는 인간 Homo cooperativus’(김용옥, 2017)이 되어야 한다. 제4의 길 마지막 장애물은 교육을 이용해 사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학부모들의 심리다.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장애물이기는 하지만 이는 다른 장애물로 인해 만들어진 2차 장애물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장애물이 해소되면 함께 해소될 장애물인 것이다.


우리가 걸어온 거친 세월이 교육을 병들게 했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은 “사회 병리를 치료하는 데 교육만큼 유효한 약은 없다”(앤디 하그리브스·데니스 셜리, 2017)는 것, “학교를 송두리째 변혁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마이클 애플, 2014)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부분적 변화가 아니라 “공교육 체제 전반의 새판 짜기” (한국교육네트워크, 2018)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한국 교육 제4의 길, 그 뿌리는 우리의 가까운 역사 속에 있었고 거기에서 싹튼 나무는 이제 우리 모두의 혁신 의지로 키워야 할 것이다. <새교육> 70년의 경험이 말하는 교훈이다. 한국 교육 70년은 <새교육> 창간호가 선언하였던 ‘인개위인’의 이념에 충실하고자 하는 다수 국민과 이 이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권력자들의 지배 욕망, 그리고 이 이념에 충실하였음에도 위인이 되지 못하여 실망한 교육수요자들의 분노가 뒤얽혀 만들어 낸 혼돈의 세월이었다. 함께 극복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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