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버의 ‘만남’ 철학의 사상적 뿌리인 유대교 하시디즘(Hasidism)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독특성, 개별성 그리고 평등성이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남과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독특성은 개별화의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인간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는 각 개인이 지닌 독특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동등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빈부·귀천·성별 등의 차이에 전혀 관계없이 누구나 똑같이 자신의 일을 신성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교육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부버는 인간세계의 두 가지 근본적인 질서를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로 파악했다. 즉, ‘나-너’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참대화가 이루어지는 인격공동체와 ‘나-그것’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독백만이 이루어지는 집단적 사회가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는 점점 더 ‘나-그것’의 세계로 치닫고 있다. 이런 현대사회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나-너’의 관계회복을 통해서 전체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함이 부버 사상의 요점이다. 이처럼 부버는 관계의 개념으로 인간의 위치 및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참다운 인간존재는 고립된 실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형성을 통해서 나타나며, 사회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결국 부버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관계를 통해 그의 실존을 형성해 나가는 창조자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부버의 교육적 중심은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정신적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학생들의 인격을 계발하고 실현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부버의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전체성(the wholeness of man)’에 관한 탐구이기 때문에 그의 교육론의 주조음(主調音)도 ‘학생의 전체성’에 관한 탐구 즉, 전인교육론이라고 볼 수 있다.
부버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즉, 우리가 마음의 문을 개방하면 세계가 그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삶과 정신 형성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 근본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프로파간다(propaganda)와 교육(education)이라고 했다. 전자의 경우 자신의 정신적 행위가 정말로 독특하다는 식으로 타자에게 자기의 의견과 태도를 강요한다. 후자의 경우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정당하다고 인식한 것을 타자의 영혼 속에서 발견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개방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잠재력으로서 그리고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타자 속에 살아 움직여야 한다. 이 때의 개방은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만남’을 통해서 이뤄져야 하며, 방향을 발견한 자와 방향을 찾고 있는 자 간의 실존적 교통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 전인교육이란 감춰진 다양한 능력을 개발하는 것
부버의 교육론은 한 마디로 전인을 지향하는 인간교육론이다. 이를 몇 가지만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동을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지닌 하나의 현실(reality)로 본다. 고결하고도 무한한 가치를 지닌, 역사창조에 이바지하는 존재가 아동이다. 아무리 퍼내도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가능성이 바로 아동이라는 현실성이다. 이같이 아동이 ‘현실성’이기 때문에, 교육도 ‘현실성’이 돼야만 한다. 전인교육이란 아동 속에 감춰져 있는 다양한 능력들을 개발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교육이 아동의 ‘현실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성’인 아동은 누구나 창작자 본능(originator instinct)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자율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창작하려고 하며, 그 과정 속에 자기 자신을 참여시키기를 갈망하고 또한 그 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따라서 아동의 이같은 창작자 본능은 활짝 피기를 기다리는 꽃봉오리와 같은 것으로서 환경의 여건 조성에 따라 활짝 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획일화된 오늘날의 교육을 지양하고, 교육은 아동의 창작자 본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이란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버는 진정한 교육이란 이런 창작자 본능이 자율적으로 개발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능을 해방시키는 것이 교육력(educative forces)이 아니고, 해방된 본능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교육력이라는 것이다(Buber, 1954a: 86). 이러한 힘은 인간의 자발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에서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육의 주요 목적은 아동의 창조력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부버는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교육은 끝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세계 자체가 우리의 교사이다
둘째, 세계 자체를 하나의 교육장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개인에게 인격을 형성시키는 것은 세계이다. 다시 말해 세계 즉, 자연과 사회라고 하는 환경 전체가 인간을 교육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자체가 우리의 교사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때때로 자연으로서 혹은 사회로서 아동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며, 아동은 이러한 여러 요소에 의해 교육을 받게 된다. 즉, 한 폭의 그림·동식물의 생태·웅장한 산 등 여러 요소들에 의해 아동은 교육을 받게 된다. 따라서 학교 교사는 이런 여러 교사 중 단지 조그마한 한 요소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교사는 겸손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학교 교육에서 지적 교육에 치중하고 있는 교사의 비중이 절대적인 것임을 생각하면 현대교육의 위기가 그대로 눈에 드러나고, 인간교육의 상실을 생각하게 한다. 지적(知的) 교사들로 가득 찬 오늘날의 학교에서 인간교육이 상실되어 갈 것이라는 메시지다.
● 학생과 교사가 ‘서로 만남’을 했을 때 참다운 교육 작용이 일어난다
셋째, 교육은 비(非)에로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버에 의하면 에로스는 선택을 의미하며, 기호(嗜好)에 의해 취해진 선택인데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로스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려는 사람 즉, 대상을 취사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교육의 본래적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현대의 교육자들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다양한 학생들을 접하게 되는데 바로 이같은 비에로스적 상황 속에서 부버는 현대 교육자의 위대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즉, 교사가 교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가 선택한 학생들을 향해 들어간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교사의 선택권 밖에 있는 존재들로서 천차만별의 학생들이 그 학급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창조된 세계의 현재 모습 그대로이며, 인간세계의 축소인것이다. 그렇지만 교육자는 그들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부버는 교사를 신의 대변자라고 평가한다. 또한 기호에 의한 선택을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교육에는 금욕주의(asceticism)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맡겨진 학생들의 삶에 대해 철저한 인격적 책임을 가지고 감수해야 할 금욕인 것이다. 오늘날의 교육은 에로스적인 교육을 비에로스적인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이 그 과제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인격적 존재이며, 서로가 동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가 학생을 취사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며, 단지 동등한 인격자로서 ‘서로 만남(sichbegegnung)’을 했을 때 참다운 교육 작용이 일어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교사의 편애라든가 학교의 퇴학제도 등은 학생을 취사선택 한다는 점에서 에로스적인 교육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쉽게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점들은 인간교육적 차원에서 재고돼야 할 것이다.
● 교육의 과업은 결국 학생들에게 인격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것
넷째, 성격교육(education of character)을 가치 있는 교육으로 강조한다. 부버는 인격(personality)과 성격(character)을 구분하고 있다. 즉, 인격은 본질적으로 교사의 영향력 밖에서 성장하는 것이며, 성격은 인격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교사의 최대 과제는 바로 이 성격교육에 있는 것으로, 이것이 교육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성격의 소유자란 그의 행위와 태도로써 전 존재를 건 반응을 하기 위해 깊은 준비성을 가지고 상황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의 행위와 태도의 총체성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그의 존재의 통일성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격률(格率)이나 관습체계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전존재로 행동하는 자이며, 주어진 상황의 독특성에 조화롭게 반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우리가 바라는 인간상인 것이다.
위대한 성격의 소유자는 틀에 박힌 반응 즉, 획일적 반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의 획일화된 시대에서는 틀에 박힌 반응들이 일상적인 규칙이 돼 있다. 현대인들은 틀에 박힌 반응을 함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인격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런데 인격적 책임을 벗어난 삶은 무의미하다고 부버는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교육의 과업은 결국 학생들에게 인격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인격의 통일에 대한 갈망은 인류의 통일에 대한 갈망으로 확장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대하고도 풍부한 관계는 부를 수 있는 성격과 응답할 수 있는 성격 즉, 대화적 성격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참다운 성격교육은 곧 공동체를 위한 참된 교육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관계회복을 통한 비인간화 현상의 극복
이상에서처럼 부버는 교육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교육작용이 점차 비인격적 관계인 ‘나-그것’의 관계로 타락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인간의 내재적 능력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전반적이고도 조화롭게 계발시켜야 한다는 ‘전인교육론’을 피력했다. 또한 교육은 인격적 삶 그 자체를 통해 이뤄져야 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교사의 인격적 모범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그러나 학생이 교사의 인격적 모범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사나 학생 모두가 독특한 개성적 주체이므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삶의 방식 즉, 삶의 길(way of life)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시디즘의 한 일화는 이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시드(Hasid)회(會)의 지도자(tzaddik)이 “왜 당신은 당신의 스승이 행한 모범(example)을 따르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하기를 “그와 반대로 나는 스승의 모범을 따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스승이 그의 스승을 떠난 것처럼 나도 나의 스승을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시디즘에서는 정형화・ 체계화를 거부한다. 부버도 삶의 흐름(stream of life)을 강조하면서 그 자신의 사상이 체계화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인간의 삶(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의 삶)을 하나의 틀로써 묶어둘 수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요컨대 인간의 전체성을 강조하는 부버가 중시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관계회복을 통한 비인간화 현상의 극복이었다. 오늘날의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러한 비인간화 현상이라고 한다면, 비인간화 현상의 극복을 위한 사상적 노력들이 교육 속에서 재음미되고, 구체화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