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도 학교 현장이 부산스러웠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문·이과 융합’으로 시작된 2015 개정 교육과정 논의는 ‘역량중심 교육과정’으로 안착되었고, 국가 교육과정 총론을 통해 초·중·고 전반에 걸쳐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사고 역량, 심미적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의 6개 핵심역량을 집중 육성할 것을 명시했다. 특별히 2015 개정 교육과정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떤 시기의 교육과정이든 교육과정이 개정된 후 도입되는 시기는 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기존의 틀과 다른 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의 경우 7차 교육과정이 도입됐을 때는 9등급제로 인해, 2009 개정 교육과정 시기에는 학생의 진로에 따른 ‘과정’ 설치를 두고 진통을 겪었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그냥 ‘또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금번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경우 총론에서 제시한 6대 핵심역량 이외 교과별로 다른 역량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또한 그 어느 시기보다 ‘추상성’이 높아 핵심역량이 무엇이고, 교과에 제시된 역량은 무엇이며, 핵심역량과 교과의 역량이 어떻게 관련됐으며, 어떤 수업, 활동을 통해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불만의 소리가 크다. 물론 이제 막 연구되기 시작한 분야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지금까지의 연구 또한 이론적 탐구나 담론 차원에서 논의되었을 뿐 운영 사례로부터 역량기반 교육과정의 쟁점을 탐구한 연구들은 주로 해외 사례를 다루고 있어 우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이주연, 2018).
필자는 고등학교에서 사회과에 소속돼 있으며, ‘진로와 직업’, ‘교육학’ 교과를 담당하는 교사다. 재직하고 있는 고등학교는 학생선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로 8개 교육과정, 즉 생명과학, 자연과학, 공학, IT, 국제인문, 사회과학, 경제경영, 예술체육 등의 과정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본 글은 학생선택형 교육과정의 과정별 수업을 통해 어떻게 진로역량을 강화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간단하게 학생선택형 교육과정에 대해 살펴보면, 총 이수단위 204단위 중 교과는 180단위, 창의적 체험활동은 24단위이다. 교과는 다시 공통선택(56단위), 계열선택(84단위), 과정선택(20단위), 자유선택(20단위)으로 구분되고, 학생들의 진로에 따른, 혹은 역량에 따른 선택은 주로 과정선택과 자유선택을 통해 구현된다.
공통선택은 주로 1학년 때 이뤄지고 학교의 슬로건인 ‘Beyond University’를 위한 교육으로 구성되며, 계열선택은 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과목으로 구성된다. 과정선택과 자유선택을 위한 과목은 주로 4~5단위이며, 무학년제이다. 과정선택은 ‘과정선택’ 과목 중 20단위를 선택해야 하지만, 자유선택은 계열선택, 과정선택 구분 없이 학생이 원하는 수업을 선택할 수 있다. 과정선택 과목은 과정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과정별로 6~12개씩 개설되며, 과학고, 외고, 국제고 뿐 아니라 특성화고의 과목을 재구성해 활용하고 있다.
먼저 살펴볼 과목은 필자가 담당했던 국제인문과정의 과정선택과목인 ‘교육학’이다. 학생들은 주로 2학년 2학기와 3학년 1학기에 이 과목을 수강하는데, 교대나 사대를 희망하는 학생과 ‘자유선택1’으로 선택한 학생이 50:50의 비율을 이룬다. 수업은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 체계 및 성취 기준’을 준수하되, 주로 학생활동과 프로젝트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내용 체계는 아래<표>와 같다.
<표> 교육학 내용 체계
영역 | 핵심 개념 | 일반화된 지식 | 기능 |
교육의 목적과 성격 |
교육의 목적과 가치 | ● 교육을 통해 ‘잘 살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교육을 받은 사람은 실제로 잘 사는가 ● 교육과 행복은 필연적 관계가 있는가 |
성찰하기 이해하기 탐구하기 비판하기 문제 해결하기 |
교육의 자아실현/교육과 사회화 | ● ‘교육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 교육의 목적은 문화 전수인가, 인간 해방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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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교육의 원리와 방법 |
● 지식교육을 왜 하는가 ● 주지적 교육과 인성교육은 하나인가, 별개인가 ● 교육은 학생이 ‘잘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학생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 지식교육을 왜 하는가 ● 주지적 교육과 인성교육은 하나인가, 별개인가 ● 교육은 학생이 ‘잘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학생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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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역사와 공교육 |
학교의 출현과 발달 | ● 학교는 왜, 어떻게 출현했는가 ● 학교 제도는 어떻게 발달해 왔는가 |
성찰하기 이해하기 탐구하기 비판하기 문제 해결하기 |
근대 공교육의 성과와 의미 |
● 근대 공교육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 공교육 제도의 발달이 오늘날 삶에 미친 영향과 의미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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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 문제와 해결 방향 | ● 한국 공교육의 형성과 전개과정의 특징은 무엇인가 ● 한국사회가 당면한 교육문제는 무엇인가 ● 교육문제 해결을 위하여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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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교수의 원리 | 학습의 원리와 방법 | ●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학습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학습을 방해하거나 촉진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 효과적인 학습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전략에는 무엇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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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의 원리와 방법 | ●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가르치는가 ● 교수(수업)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 효과적인 교수(수업)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전략에는 무엇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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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회와 평생 교육 |
미래 사회의 변화와 교육 |
● 급변하는 기술 문명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은 무엇인가 ● 미래 사회에 등장하는 위협요소는 무엇이고 교육은 이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 교육은 변화하는 미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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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학습사회 | ● 평생학습사회는 무엇인가 ● 평생학습사회에서 나는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
수업의 재구성은 몇 개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첫 번째 영역의 ‘교육의 목적과 성격’은 ‘교육받은 사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지식 및 토론활동을 했다. 사대 및 교대 희망자에게는 학교를 통해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을 구체화하도록, 자유선택 학생들은 일반적인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을 그리도록 요구했다. 두 번째 영역인 ‘교육의 역사와 공교육’에서는 학교의 출현과 역사에 대한 지식학습을 기반으로 학생들이 여러 국가별 교육제도에 대해 발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회와 문화에 따라 어떤 특징이 나타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학생들이 직접 비교하고, 사고하여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도출하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마감했다.
교육학 수업의 가장 큰 핵심 프로젝트는 ‘학습과 교수의 원리’에서 진행한 ‘수업하기’였다. 1~3인으로 조를 구성한 후 저마다 관심있는 교과를 선택하고, 학습과 교수의 원리와 방법에 대한 지식학습을 한 후 여러 가지 수업방법을 적용해 실제 50분짜리 1차시 수업을 진행하도록 했다. 2~3인이 한 조가 된 경우 교대 혹은 사대 희망자가 주로 교수자 역할을 하고, 다른 학생들은 수업 준비
를 함께하거나 보조 교사로 활동했다. 화학에 관심있는 학생으로 구성된 조의 경우 실험실에서 화학 실험을 했는데, 주로 인문계열 학생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교적 쉬운 주제를 선택하여 학습지와 수업 자료(PPT)를 만들었고, 사전에 수차례 모의실험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실험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지 궁리하였다. 직접 실험도구와 재료를 준비한 후 학생들에게 안전교육까지 실시한 후 수업을 진행했다. 실제 다양한 방법으로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학생들은 수업을 할 때 유의할 점이 무엇이며,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터득했다.
마지막 ‘미래 사회와 평생교육’ 영역은 미래 학교의 모습에 대해 토론해 보고, K-MOOK의 한 강좌를 선택해 수강하면서 온라인 교육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스스로 분석하도록 했다. 각 영역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론-활동-평가의 과정으로 진행됐으며, 교사의 개입은 최소화했다. 주로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토론 후 프로젝트를 구성했으며, 저마다 다른 주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기 때문에 학교생활기록부의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에 기록할 때도 개인별 기술이 가능할 수 있었다. 수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교대나 사대를 희망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의 관심과 역량의 차이였다. 또한 어느 정도 깊이있게 수업을 할 것인지도 고민 중 하나였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주로 2~3인의 작은 그룹으로 진행했고, 그룹에는 교대나 사대 희망자를 한 명 이상 배치하여 핵심 역할과 보조 역할로 나눠 자신의 관심이나 역량에 맞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프로젝트를 평가할 때는 이론(지식학습)을 얼마나 수용했는가를 일정 부분 반영하기 위해 학생들이 단순히 ‘재미있는 활동’에 그치지 않고, 이론 학습에 기반한 활동을 모색하도록 했다. 국내 교육에 대해 논의할 때는 반드시 국외 교육과의 비교를 통해 비판적 사고 역량을 키우도록 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과목은 경영경제과정의 과정선택 과목인 ‘마케팅과 광고 수업’이다. 학생들은 주로 3학년 1학기에 이 과목을 수강하는데, 2018년 1학기 수강생은 총 51명(남 20명, 여 31명)이었다. 이 과목 역시 교육과정의 내용 체계를 그대로 준수하되 수업 차시를 달리했고, 총 5회에 걸쳐 진행된 블록수업을 활용하여 인근 지역의 현장 조사를 나가기도 했다. 이 과목의 주요 프로젝트는 인근 지역의 상권을 분석하고, 어떤 사업을 하면 좋을지 사업 계획서를 작성한 후 마케팅 및 광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상권을 분석하고,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며, 마케팅을 위한 여러 이론을 학습하고 실제 프로젝트를 통해 구현해 볼 수 있었다.
수업의 구성 방향에 대해 담당교사는 “직전 학기 수업인 ‘경영일반’ 수업 시 모의 창업 형태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이론이 부족하여 학생들이 작성한 과제의 결과물의 퀄리티가 많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마케팅과 광고’ 수업은 다양한 이론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지나치게 활동 중심의 수업이 될 경우 학생들의 관심을 높일 수는 있으나 지적 역량이 감소될 수 있음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학과 마찬가지로 이 과목 역시 경제, 경영학 분야를 희망하는 학생도 있으나 자신의 진로와 ‘마케팅’이 어느 정도 관련돼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미리 경험’해 보기 위해 수강한 경우가 많았다. 2학년 때 IT 과정을 선택했으나 2학기 때 경제경영과정으로 변경한 한 학생의 경우 수업과 진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1학년 때 분위기가 공학이나 IT 과정으로 가야할 것 같았고, IT가 재밌다고 생각해서 선택했는데, 두 학기 동안 수업을 하면서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특히 프로젝트가 굉장히 많았는데, 나는 늘 코딩을 하기보다 글을 쓰고, PPT 자료를 만들고, 발표를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내가 잘하는 건 인문적 소양임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2학년 2학기 중반에 과정을 변경하게 되었고, 늦게 변경했기 때문에 진짜 듣고 싶었던 ‘경영일반’ 수업을 못 들었지만, 3학년 1학기에 들었던 마케팅과 광고 수업을 하면서 제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경영학과나 기술경영학과에 지원했는데, 경영학과를 가더라도 IT를 공부했던 경험을 발판으로 기술경영을 전공할 거에요. 수업을 하면서 IT과정 학생들과 다른 인문과정 학생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다리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저 스스로는 융합인재라 생각하거든요.”
특히 진로와 관련된 과목 수업을 고등학교에서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지금 경험하지 않았다면 저는 대학 가서 분명히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었을 거에요. 그때 하게 될 것을 미리 한 것이고, 오히려 수업을 들으며 제 적성을 잘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분명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하였다.
‘역량’이 무엇인가에 대해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총론이나 각론에서 자세히 규정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물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사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분명히 모두가 동의하는 점은 천편일률적인 지식학습의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식학습의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지식학습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 않는가? 줄어든 지식학습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역량이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수업에서 이뤄지는 A부터 Z까지 모두 국가에서 규정해왔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도 적고, 결과(성취도)도 분명해 보였지만, 상대적으로 교사의 역할은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로 역량중심의 교육은 눈에 보이지 않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교사의 역할이나 전문성을 키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라 생각된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도 그렇고, 행복도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고, 측정하기 어렵지만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 본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업을 모두 기술할 수는 없지만 주요 특징을 살펴보면, 국가 교육과정의 교육체계와 성취수준을 준수하는 범위에서 프로젝트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흔히 ‘핵심역량’이라 부르는 여러 역량들이 개발될 수 있도록 정교하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있다. 지식학습을 늘렸다가 다시 줄여보기도 하면서 지식학습과 활동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을 것이다. 또한 역량 기반 수업의 결과물을 도출하고 표현하는 방법 또한 정교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사의 전문성과 역량 또한 비약적으로 성장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