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쓸데없는 일에 연연하고 실제 생활에 도움 되지 않는 공리공담(空理空談)처럼 여겨진다. 교육계에서 교육철학에 대한 인식도 비슷할 것이다. 교육철학자들도 교육을 어떻게 개선하고 변화시킬지에 관한 직접적인 실질적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자유, 평등, 권위, 도덕, 교사, 교과에 대해 중요한 연구들을 수행해왔지만 교사들의 관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이치를 탐구하다 구덩이에 빠져 하녀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탈레스의 일화는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만물의 근본 원리(arch?)에 대한 질문으로 서구 학문의 역사를 열었지만, 그 하녀에게는 그저 발밑도 제대로 보지 못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상은 높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재능 있는 여성이라면 당연히 통치자 교육을 받고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가족을 포함해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가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 보더라도 파격적이다. 아테네는 선거와 추첨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였고, ‘돈이 사람을 만든다(Chremat’ Aner)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시장경제가 활성화된 사회였으며, 여성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치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그랬던 것처럼 플라톤의 주장 역시 아테네 시민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지혜로운 철학자가 국가 다스려야
하지만 이후 그의 혁신적인 주장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이후 플라톤의 교육론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를 세심하게 검토하고 나아가 직접 적용까지 시도해봤을 것이다. 플라톤 자신도 ‘말만 하고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며(Epistolai, 328c-d)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방문해 이상적 통치자로 여겼던 디온(Dion)과 교류하는 등 직접적인 정치활동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디온의 자질은 플라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그가 꿈꿔왔던 최선자(最善者)의 통치는 무산되었다. 디온은 내란 끝에 살해당했고 플라톤은 구사일생으로 아테네로 돌아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국가>를 통해 어디서도 실현 불가능할 법한 이상 국가의 모형을 제시했던 것은 당시 플라톤의 아테네가 모든 기준이 무너진 채 자기만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극단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선언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은 바로 나라는 인식, 그리고 자연스럽게 쾌락을 선호하고 고통을 기피하려는 경향을 합리화하는 태도로 연결되었다. ‘신(神)은 인간 세계의 정의(正義)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프로타고라스가 증명했듯 인간은 법률을 만들 수 있으며, 법률은 강자가 약자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Politeia, 338e-339a).’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최선의 이상 국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시민들의 직접적인 각성과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전통적인 가치관을 상실하고 아노미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관습과 규범을 제안하고 그것을 통해서 시민 공동체가 다시 지성(nous)을 공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시라쿠사의 실패 후 만년에 저술된 <법률>은 이러한 그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국가>에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밝히는 과정에서 말을 통해 최선 국가가 제시되었지만 <법률>에서는 훨씬 구체적이고 세세한 절차를 거쳐 차선(次善) 국가가 수립된다. 우선 <국가>의 핵심주장이었던 철학자 통치는 <법률>에서 입법가 원로들의 통치로 변경되었다. <국가>에서는 생산자 계층의 교육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던 반면 <법률>에서는 모든 시민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국가>에서 다뤄졌던 정치체제와 인간형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빠진 대신 법률과 신의 관계를 설명하며 무신론을 비판하는 지점은 <국가>와 비슷하다.
직업교육을 교육으로 간주 안 했던 플라톤
플라톤은 국가는 어떤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는지 나아가 그 원리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이 필요한지에 대해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마그네시아(Magnesia)라고 불리는 새로운 폴리스는 타국과 불필요한 교류를 막기 위해 해안가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야 하고, 5,040명의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가구가 조직된다. 도시 공간 구획, 토지 배분, 부의 재분배 기준 등을 비롯한 각종 제도들에 이어 결혼, 태교, 육아, 시민교육, 지도자 교육, 나아가 사법제도에 대한 구절이 이어진다.
교육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것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교육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Nomoi, 643b). 교육이란 다름 아닌 올바른 양육이며 올바른 양육이란, 놀이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이 잘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최대한 훌륭해질 수 있도록 마음먹도록 하는 것(Nomoi, 643d)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교육은 직업교육을 포함하지 않는다.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직업교육에 대해서는 교육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수한 직무역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상식과 교양이 결여된 못 배운 사람들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대신 덕 있는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심신을 잘 함양해온 사람들의 활동을 교육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마그네시아는 어린아이부터 좋은 교육을 위해 공동체 전체가 매진하는 일종의 교육공동체라 평가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공동체의 교육내용 중에는 마그네시아의 법률, 구체적으로는 전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클래식 음악에서 서곡 또는 전주곡(序曲, 또는 前奏曲, overture or prelude)은 전체 교향곡이나 악극의 내용을 요약해서 가장 대표적으로 기억에 잘 날 멜로디를 먼저 들려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베르디의 오페라, 바그너의 악극 등에 등장하는 서곡이나 전주곡은 음악을 청중들에게 곡 전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고 기억을 증진시키며 감동을 고양시키게 된다. 플라톤 역시 <법률>에서 단순히 법조문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시민들의 직접적 변화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고 전문을 통해 시민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동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도덕률과 관습에 따라 생활하지만, 때로는 법률과 충돌하게 된다. 공동체 내에서 법률과 규칙은 서로 간에 갈등을 예방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어에서 법률과 관습이 모두 노모스(nomos)를 사용하는 것은 그 두 가지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개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습관이라고 한다면 관습은 집단이 사회 내에서 오랫동안 운영되어왔던 사회 운영의 기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가 무규범(anomie) 상태에 빠졌을 때 사회는 내 것만을 주장하는 혼돈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관습의 약화 속에서 공동체는 명문화된 법률을 제정하고 때로는 강제성과 물리력을 동원하여 구성원의 기본권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개인에게 내재된 불만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플라톤은 법률을 잘 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동의라고 판단했다. 시민들에게 법조문이 어떤 취지에서 제정되었으며, 그것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는 어떤 이익과 의의를 얻을 수 있는지를 상세히 서술해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치 의사들 중에서도 시민을 상대하는 의사들은 설득으로 환자가 온순해져 의사의 말을 잘 따르게 하고서야 환자를 치료하는 것처럼(Nomoi, 720c-d), 전문은 시민들이 법률을 기꺼운 마음으로 따르도록 설득하는 하는 일종의 서곡(序曲)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마그네시아에서 철학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입법가는 전체 법률과 개별 법률 앞에 언제나 전문을 덧붙여야 하며 시민들은 그 전문을 통해 법률의 역할에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준수해야 한다. 법이 지배당하고 권위를 잃은 나라에는 몰락이 임박해 있기 때문이다(Nomoi, 715d)
법률의 전문을 제정하고 시민들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은 오늘날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이 규칙을 제정하고 준수하는 소위 민주 시민적 경험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전문은 하나의 사회적 제도와 규칙이 어떤 취지에서 생성되었는지 그 논리적 타당성과 정당성에 대해 검토하고 그것을 내면화함으로써 아직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학생들이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성을 가늠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규칙은 단순히 나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임의적으로 제정되고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척도에 따라 공평무사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서만 정의가 완성될 수 있음을 플라톤은 강조한다. 전문을 확인하고 그것을 숙지해가는 과정은 공동체 최고의 지성들이 제정한 법률을 시민 개개인이 내면화하는 지성의 배분(Nomoi, 714a)을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원용될 수 있다.
사유는 사라지고 실천만 남았다
삶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오딧세우스, 테세우스, 오이디푸스와 같은 지혜로운 영웅들도 자신들의 실수(hamartia)로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을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내 무지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일 것이다. 하녀의 힐난에 대해 탈레스가 ‘나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왔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덩이에 빠진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것은 나 자신과 주변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카오스(chaos), 즉 불확실하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 플라톤의 모색은 코스모스(cosmos), 즉 조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었다. 플라톤은 언제나 강조되어야 할 기본적인 원칙을 제안하고 그것이 개인과 공동체 운영의 기본 원리이자 교육 목적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AI와 4차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현대사회가 과거와 엄청나게 달라 보이지만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심신으로 이뤄진 존재의 본질은 여전하다. 고전은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본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삶과 교육에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철학은 탈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유용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대부분 세속적 욕구에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가지만, 새로운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무엇이 가장 진리에 가까운지 적극적으로 고민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사유는 사라진 채 실천만 남아버린 오늘날의 교육계에서 교육철학의 분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