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What we cannot speak about we must pass over in silence).” 20세기를 대표하는 유명한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의 말이다.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말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슨 정치적 압력이 있다든지, 숨겨야 하는 개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든지 하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잘 모르고 있음에서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언어와 앎의 관계를 논리 실증적으로 밝히려 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면 동의할 수 있는 명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의 언어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영역 즉, 종교·형이상학·윤리학·예술 등을 ‘신비(mystery)의 영역’으로 보았다. 이들 영역에 대해서는 언어로써 어떤 진리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 즉,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생각도,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들 안에서만 드러나는 앎의 절대성 또는 인식의 온전성을 강조한 것이리라. 그 점을 강조한 것이라면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방점이 놓인다면,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대목은 좀 유연하게 해석해도 괜찮을 듯하다. 즉, 절대적인 강요의 지침이라기보다는, 신비하고 초월적이고 탈 논리적(脫論理的)인 것을 대하는 지적 태도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 말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조금은 더 유연하고 열려 있는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예 입 자체를 다물고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https://brunch.co.kr/@philosophus/32)
그에게 있어서 논리의 언어로 이해되고 표현되지 못하는 영역은 ‘신비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 신비의 영역은 언어를 넘어서는 영역 즉, 알 수 없는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유명한 말,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바로 이 말이 ‘신비의 영역’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02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의 학문적 뜻과 깊이를 모르더라도 사람들은 이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명제이다. 이 문장은 어찌 보면 시적인 아포리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또 어찌 보면 높은 덕을 쌓은 수도자가 득도의 경지에서 하는 말 같기도 하다. 명제를 단순하게 풀면 ‘말할 수 없으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로 읽히는 동어반복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모종의 비장한 깨달음에 들어 있다는 느낌까지 전한다. 이래저래 긴장의 매력을 지닌 말이다.
그래서 이 명제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를 좀 다르게 접근해 보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이나 언어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언어생활의 지혜에 다가가는 자리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고양하는 ‘덕성의 자극(awareness of virtue)’을 이 명제로부터 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기 두 개의 명제가 있다.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듣는 말, ‘잘 알지 못하면서 말하지 말라’이다. 물론 이 두 말의 표면적 의미는 같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서, 숨어서 함의하는 맥락적 의미를 따져볼 수 있겠는가.
나는 대략 이렇게 구분해 보았다. 후자(‘잘 알지 못하면서 말하지 말라’)는 ‘망신당하기 꼭 좋다. 그러니 잠자코 있으라’ 하는 정도의 말하기 기술상의 팁이나 요령이라 할 수 있다. 전자(‘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앎에 대한 반성을 수반하는 즉, 자아 바깥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겸허함을 품고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또 후자는 말하는 행동을 막는 데서 끝난다. 그러나 전자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더 지속적인 탐구와 모색을 암시하고 있다. 또 후자는 규범을 지키라는 뜻의 약간 나무람의 분위기를 띤 것이라면, 전자는 자기성찰을 부르는 분위기를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상호작용을 들여다볼 수 있는 행위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는 걸 모르는 척하기’와 ‘모르는 걸 아는 척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아는 걸 모르는 척하기’에는 남의 흉허물을 나서서 말하지 않고, 덮어주는 너그러움의 덕성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말 많고 말 옮기기 좋아하는 사람은 갖추기 어려운 덕성이다. 그런가 하면 불의를 알고도 말하려 하지 않는 비겁함이 끼어들 수도 있다. 요컨대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있다.
그러나 ‘모르는 걸 아는 척하기’에는 좋은 점이 거의 없다. 이는 일종의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도는 가짜 뉴스의 생산자나 유통자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짜 뉴스의 중간 유통자가 되지 않았던가. ‘모르는 걸 아는 척하기’는 당장은 남을 속일 수 있다 해도, 나중에 곤욕을 치르게 되어 있다.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모르는 걸 아는 척하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침묵하는 동안에 ‘모르는 것’을 화두로 삼고, 침잠하여 모색하라는 뜻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03
‘모르는 것’에 대해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안다고 나서고 싶을 때, 이건 제대로 아는 게 아니야, 하고서 자기 검열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인지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얼핏 보면 인지적 능력 같지만, 이는 도덕적 능력에 가깝다. 초연결의 첨단정보통신사회가 될수록 나의 모름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능력은 도덕성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일찍이 2,500년 전 공자도,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함이 진정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논어, 爲政篇 17장)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관계는 오묘하다. 마치 연인들 사이의 밀고 당기며 가까워지는 관계 같기도 하다. 모름을 통해서 앎의 경지를 두드리게 되고, 앎을 통해서 모름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더 열심히 더 깊이 알려고 하면, 마침내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당도하게 된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는 순간, 천박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인터넷이나 SNS에 나도는 파편의 지식으로, 세계의 총체를 모두 아는 듯한 태도는 위험하다. 그런 불충분한 불구의 앎을, 아니 그런 무지로, 세상을 향하여 내지르는 듯이 말하는 것은 더욱 위태롭다. 이는 앎의 영역이 아니라 모름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범람하는 가짜 뉴스의 모습이 이를 입증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형식을 빌려서 이 혼돈을 패러디하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웅변으로 말하라.” 모르는 걸 아는 척하기의 극치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웅변처럼 말할 것을, 무한 부추김 받는 생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르는 것과 모르는 것들이 모여 피 터지는 진흙탕 싸움을 하는 모습을 댓글 공간에서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인간성이 몰락하는 장면이다. 이것이 위험하다.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 공동체의 몫이 될 것이다. 분열과 혐오, 위선과 허위, 대립과 학살심리로 가득 찬 사회를 반드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