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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드니프로에서 만난 인연

우크라이나 말로 11월이 ‘낙엽(Листопад ; 리스토빠드)’이란 걸 알았을 때, 너무 예쁜 말이라고 연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다 11월, ‘잎 떨어지는 달’에 우크라이나를 여행하고 있었고, 실제로 가는 곳마다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언어를 만든 사람은 시인이거나 감성을 지닌 국문학자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른 아침 커튼 사이로 우중충한 날씨가 들어왔다. 더 자고 싶기도 했지만, 저녁에 떠나게 될 도시를 둘러봐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숙소 건너편에 보이는 노란빛 공원으로 들어섰다. 공원 이름은 우크라이나 위인 ‘쉐브첸코’의 이름을 붙였다. 노랗게 물든 쉐브첸코 공원을 거닐었다.

 

평일 오전이라 공원은 아주 한적했다. 이른 아침 공원에는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과 온종일 시간이 남아도는 어르신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주 빠른 걸음을 걸으며 공원을 촬영하기 바빴다. ‘이런 공원에도 유튜버가 존재하는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원 끄트머리를 향했다. 절벽 아래로 널찍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유럽에서 4번째로 긴 강으로 도시 이름과 같은 드니프로 강이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청년을 다시 만났다. 그는 백수거나 근처 대학교에서 수업을 땡땡이치고 나와 공원을 담고 있는 유튜버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전화기는 매우 허술해 보이고, 가을 색이 바랜 공원은 조금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유튜브에 올려도 조회 수가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걷다가 다시 청년을 만난 곳은 서커스 단원들이 연습 중인 곳이었다. 사람도 별로 없는 공원이다 보니 뭔가 눈요깃거리가 있으면 발길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세 번째 그를 만난 자리에서 말문을 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찍어요?”

“처음 이 도시를 왔는데 다 신기하네요. 다 담아서 어머니 보여드리려고요. 제가 사는 곳은 좀 삭막하거든요.”

“어디에서 왔어요?”

“크리보이 록(Krivoy Rog)이라고 산업 도시예요”

“삐뚤어진 뿔? 도시 이름이 참 희한하네요.”

“왜 이름이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드니프로에 일하러 왔나요?”

“아니요. 저는 어제 하리코프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에 여행 왔어요.”

 

여행이라는 말에 어이없어하는 청년의 표정을 보니 어제 새벽 기차를 타고 드니프로에 온 나 스스로가 좀 안쓰럽기도 했다.

 

“음, 이 도시에 볼거리가 전혀 없지는 않아요. 당신도 나도 드니프로가 초면인데 나를 따라서 드니프로 탐험을 다녀볼래요?”

“마침 잘됐네요. 내일까지 이 도시에서 뭘 할지 고민했거든요.”

“내 이름은 콴(Quan)이라고 해요.”

“저는 보그단입니다. 콴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보그단은 어쩌다 이 도시를 처음 왔어요?”

“크리보이 록에서 공부하다가 취업과 군대 중 선택을 해야 했는데 운 좋게 취업이 됐어요. 군대 면제받을 길이 있어서 정밀 진단받으러 드니프로 국립병원에 왔어요.”

 

그가 한국에 대해 아는 거라곤 현대, 기아, 쌍용뿐이었다. 보그단은 자동차 정비를 공부했고 첫 직업 또한 자동차 정비와 관련된 회사에 다니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진로를 잘 잡은 듯했다. 보행 중에 지나치는 자동차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자동차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마구 쏟아냈다.

 

보그단을 위해 준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오전 목적지가 드니프로 자동차 박물관이었다. 평소에 교통시설에 관심이 많은 나는 그의 지식에 맞장구치며 꽤 먼 거리를 걸어갔다. 그에게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점점 박물관이 가까워지고 바깥에 주차된 오래된 자동차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자 그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콴, 내가 자동차를 정말 좋아해요. 아주 고마워요!”

심심할 거라 생각했는데, 보그단이란 젊은 친구가 나타나서 나 또한 즐거웠고 그 시간에 대한 보답이었다. 내가 다 뿌듯해서 한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요즘 보기 드문 6형제 집안에서 보그단은 차남이다. 쉬고 있는 부모님을 대신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이 있음에도 부모님을 생각하고 어린 동생들을 챙기는 스무 살 답지 않은 청년이었다. 길에서 어르신을 돕고 엄마와 동갑인 나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참 바른 청년이란 것을 느꼈다.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점심은 한식당으로 정했다. 젓가락을 처음 잡아 본다는 그에게 어떤 음식을 먹을지 고르라는 건 큰 숙제 같아서 외국인이 잘 먹는 김밥과 잡채 그리고 비빔밥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연신 누군가와 메신저를 주고받길래 ‘혹시 엄마?’하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엄마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여섯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고 스무 살인 아들을 아직도 어린애처럼 대하신다고 한다. 집에서 드니프로까지 3시간 걸리는데 그의 엄마는 그 거리를 아들과 함께 와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된다. 보그단은 군 면제를 받게 되면 직장생활을 열심히 해서 그동안 뒷바라지해준 엄마와 누나에게 보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에게도 그런 누나가 있는데 첫 월급을 받아서 무슨 선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나는 누나에게 선물을 하지 않았나 보다.

 

 

일상 같았던 드니프로를 떠나야 할 시간. 보그단이 기차역까지 배웅해줬다. 기차에 오르기 전, 두 가지 바람을 이야기했다. 첫째는 군 면제를 받게 되길 바란다는 인사. 하지만 내심 현재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에는 1명의 군인이라도 절실한 게 아닐까 싶은 안타까움도 들었다. 두 번째는 다음 여행에서 그가 사는 크리보이 록을 여행하고 싶다는 바람. 비록 공장 가득한 도시지만 분명 그 도시만이 가진 매력이 있을 것이다. 하루 여정이었지만 다분히 심심할 것 같았던 도시에서 인연을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여행을 또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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