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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강마을에서 책읽기- 노년 소설을 읽으며

황석영의 '해질 무렵'

한국의 현대문학은 청춘의 문학이었다. 그것은 본받아야 할 전통의 미약함에도 기인하지만, 안정감과 거리가 먼 한국 현대문학의 기본 동력이었다. 청춘의 감각에 이끌려 오고 있었다. 그런데 젊었던 작가들이 세월과 함께 황혼에 접어들고, 그들의 최근 작품들에 치매, 죽음 등의 노년의 테마가 다루어지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노년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노년이 가까운 나의 글도 청춘의 뜨거운 이야기가 아닌 원숙한 정신세계, 중후한 감수성 그리고 따뜻하고 포근한 지혜를 지닌 작품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노년을 인생에 대한 원숙한 통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말년성’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제시한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나타나는 형식을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내며 ‘화해 불가능성’ 즉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내적 대립의 특성을 발견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성에 관한 논문을 읽으며 여기에 맞닿아 있는 노년 소설들을 읽었다. 그중 황석영(1943~) 작가의 『해질 무렵』은 60대 중반에 접어든 주인공 박민우는 내적 균열과 모순, 그리고 통렬한 자기반성을 보여주며, 출세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살았으며 수많은 인간 삶과 공동체를 외면하였던 지난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노년에 이르러 이루어지고 있다.

 

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진 않았다.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이들을 이해하면서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하던 자제력을 통하여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일종의 습관적인 체념이 되었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차갑게 자신과 주위를 바라보는 습성이 생겨났다. 그것을 성숙한 태도라고 여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가쁜 가난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던 때인 팔십년대를 거치면서 이 좌절과 체념은 일상이 되었고, 작은 상처에는 굳은살이 박여버렸다. 발가락의 티눈이 계속 불편하다면 어떻게든 뽑아내야 했는데, 이제는 몸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약간의 이질감이 양말 속에서 간신히 자각될 뿐. p.112

 

『해질 무렵』은 가난한 달골과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던 박민우가 노년에 이르러 달골과 과거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암시를 하며 끝난다. 한국의 중산층을 대표하는 인물인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심과 도덕은 거추장스러운 짐이었으며, 타인의 눈물과 고통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삶의 말년에서야 자기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되돌아보고 그토록 힘차게 달려온 인생이 거대한 파국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노년 소설을 읽는 강마을은 청춘의 향기로 가득하다. 푸른 마늘밭과 보리밭을 지나면 논둑마다 하얀 냉이꽃, 노란 꽃다지, 주홍의 광대나물꽃이 지천이다. 봄은 이미 우리 곁에서 꽃단장을 시작한다.

『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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