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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강마을편지-조선 선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

박지원의 '양반전'

정체성(正體性)의 사전적 의미는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이다. 18세기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난 연암 박지원은 권력의 핵심에 가까울 수 있는 위치였으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뼈아픈 통찰을 통해 스스로 권력의 변방으로 나아간 몹시 독특한 인물이다. 그가 쓴 <양반전>을 읽어보면 그의 청년기 조선 선비로서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성찰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양반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정선군에 어질고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 양반이 살았다. 그 고을에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반드시 그의 집에 찾아가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양반은 몹시 가난하여 해마다 관청의 환곡을 빌려 먹은 것이 천석(千石)이나 되었다. 관찰사가 그 고을을 순시하다가 환곡의 출납을 살펴보고는 그 양반을 가두게 했다. 한편 양반은 밤낮 울기만 할 뿐 무슨 뾰족한 방책을 내지 못하였다. 이때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그 고을의 서민부자(庶民富者)가 양반을 찾아가서 환곡을 대신 갚아 주기로 하고 양반을 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군수 자신이 매매 증서를 작성했다. 첫 번째 문서는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수많은 행동지침을 열거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양반은 이 증서를 관청에 가지고 와서 양반권을 회복할 수 있음을 밝혀 놓았다. 이에 서민부자는 증서의 내용을 좀더 이롭게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다. 군수는 두 번째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포악무도한 양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내용이었다.

문서 작성 도중에 서민부자는 하도 기가 막혀 혀를 내밀고는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맹랑하구료. 나를 도적으로 만들 작정이오.” 하고는 머리를 내저으면서 가버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양반의 일에 대해서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려는 서민계층과 경제적 빈곤으로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몰락 양반 사이에서 야기되었던 양반매매사건을 그려냄으로써 18세기 역사적 전환기에 격화되고 있던 신분변동 양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연암이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는 봉건질서가 서서히 해체되면서 근대적 시민사회로 이행되고 있었다. 도시 상업의 대두와 농경법의 개선 등 경제 여건의 변화와 더불어 신흥 부상과 부농이 출현했고, 경제력에 따라 봉건적 신분질서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배 이념이던 주자학은 현실 대응력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점점 시대의 흐름에서 낙오되어 경제력을 상실한 채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다. 이런 현실은 생계를 위해 신분을 사고파는 현상으로 빚어지게 되며, 이는 선비의 자기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소수 양반의 장기적 권력 독점과 세도 정치로 인해 지배 이념이 그 정당성을 상실하고, 권력을 잡은 양반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권 챙기기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측면에서 선비의 정체성을 손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양반전>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연암의 선비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담고 있다. 관습적인 학문에 갇혀 자기 삶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무능하고 궁핍한 선비들의 처지와 선비로서 자존심도 버린 채 재물과 권세에 아첨하는 선비들의 모습, 선비를 도둑놈 취급하는 상민들의 경멸적 시각 등이 그것이다.

 

『양반전· 허생전 외』, 박지원 지음, 2013, 푸른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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