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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22 교단수기 대상] 자전거를 탄 풍경

 

선생님, 제 삶의 든든한 바퀴가 되어주신 저의 첫 선생님! 
 

송골송골 땀으로 범벅된 얼굴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며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보시던 선생님의 그 눈빛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도, 어쩌면 밤하늘 아름답게 빛나는 큰 별이 되셨겠지요. 어느덧 40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 옛날 이미 선생님은 반백 년을 넘은 지금의 제 나이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셨으니까요. 희미한 어릴 적 기억 저편에서 세월을 돌고 돌아도 빛바래지 않고 또렷이 천연색으로 남은 자전거를 탄 풍경 하나! 작은 체구의 선생님과 부서질 듯 여렸던 한 꼬맹이가 흐드러진 벚꽃길 신작로를 내달리던 그 날의 자전거 페달은 이 순간에도 제 가슴속에서 힘차게 돌고 있습니다. 숨소리, 바람 소리, 오가던 눈빛, 손으로 전해지던 감촉까지 고스란히 그대로!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제가 갑자기 찾아온 복통 때문에 아버지가 다급히 저를 자전거 뒷좌석에 앉혀 한참을 가야 하는 동네 약방으로 달려가던 중에 힘겨운 오르막길에서 자전거가 잘 나가지 않자 앞만 보고 더 세게 페달을 밟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더 힘만 들고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질 않아 그제야 고개를 숙여 살펴봤더니 제 오른발이 자전거 뒷바퀴에 끼여 이미 떨어져 나온 살점과 삐져나온 뼈 사이로 흥건히 피가 고일 만큼 아찔한 사고였답니다. 그 이후 저는 자전거만 보면 기겁을 했고 한동안 걷지를 못해서 또래 친구보다 1년 늦은 나이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남들 다 입는 반바지, 치마도 다리 흉터 때문에 못 입고 2학년이 된 친구들을 볼 때면 속이 상해서인지 저는 학교 가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고 합니다. 노상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 가기 싫어하는 제가 처음엔 엄마도 안쓰러웠는지 결석이 잦아졌고 그 맛이 든 저는 아침마다 엄마랑 승강이를 벌였던 기억이 가물가물 피어납니다. 결국엔 꾀병도 안 통하게 되며 엄마가 힘센 언니 손에 저를 맡기면서 종종걸음으로도 족히 왕복 3시간이 넘는 등하굣길을 끌려다니다시피 하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내일은 또 무슨 핑계로 학교 가지 않는다고 할까?’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날이 밝으면 읍내로 시장 보러 가자는 엄마와 아빠의 대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습니다. 다음 날 학교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힘없이 누워 진짜 아파서 학교 못 가겠다고 하는 저를 한동안 내려다보시던 엄마는 언니에게 우리 선생님께 동생이 아파서 학교에 못 간다는 말을 전해 달라며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고 언니 혼자 학교로 갔습니다. 저는 ‘야호, 드디어 학교 안 간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엄마는 언제 시장을 가시려는지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시기 시작하셨고 이미 들뜬 저는 슬그머니 일어나 엄마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들이 갈 생각으로 신나 있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자전거 한 대가 우리 집으로 난 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손님이 오는 것 같아 누군가 궁금해서 달려가던 저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렸습니다. 학교에 계셔야 할 담임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제 어깨를 한 번 쓰다듬고 저쪽에서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시더니 두 분이 함께 낮고 넓은 고무통 하나를 자전거 뒤쪽 사람 앉는 곳에 이리저리 엮어가며 꽁꽁 동여맸습니다. 그런 다음 선생님이 저를 번쩍 안아 통속에 앉혔고 몸집이 작았던 저는 통속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엄마랑 인사를 나누신 선생님은 제 책 보따리를 어깨에 두르시고 자전거에 걸터앉으시더니 제 양팔을 선생님 허리에 단단히 붙들게 하신 후 천천히 출발하셨습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무서워서 집 쪽만 바라보던 제 눈엔 잘 갔다 오라는 듯 손을 흔드는 엄마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과 선생님의 페달 밟는 소리가 고막을 후빌 때쯤 비로소 저는 정신이 번쩍 들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선생님 허리를 점점 세게 부여잡았습니다. 그렇게 우리 선생님 자전거 차에 실려 저는 때늦은 등굣길에 올랐습니다.

 

삐거덕거리며 울퉁불퉁 좁은 길을 달리던 자전거 차는 한참 만에 드디어 넓은 신작로로 접어들었고 오가는 사람 아무도 없는 그 길을 롤러코스터 타듯 나아갔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선생님께서도 힘에 부치셨는지 자전거를 끌고 가기도 하셨고 가파른 내리막길에선 속도를 천천히 낮추며 아주 조심조심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자전거 뒤 고무통에 앉아 두려움에 떨면서도 선생님의 굽은 등보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 조금 달려가다 뒤돌아보고 또 조금 달려가다가 뒤돌아보고 잠시 멈춰 고무통을 묶은 줄을 살피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껴 사자 머리 같았습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선생님 허리춤을 붙잡던 저의 양손도 땀이 배어 끈적거렸습니다. 
 

그렇게 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생님 자전거 차를 타고 저는 학교에 도착하였습니다. 손에 이끌려 교실에 들어가서 제 자리에 앉았지만 긴장되어 눈도 못 마주치던 그때 이 제자를 선생님은 기억하실까요?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시면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저를 향해 씽긋 미소를 지으시며 살포시 안아 내려주었던 선생님의 눈빛과 감촉이 지금도 너무 또렷합니다. 족히 50여 명이 넘던 교실에서 그냥 한 명 안 오면 더 편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왕복 1시간을 넘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챙겨주셨던 그 마음을 그때는 오히려 혼날까 봐 무서워했고 엄마랑 집에서 놀고 시장 구경도 가야 하는데 억지로 끌려 온 것 같아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날 선생님의 자전거 차가 단방약이 되었는지 신기하게도 두 번 다시 학교 가기 싫다는 투정도 부리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그때 연약했던 그 제자는 평생 가슴속에 그 자전거 차를 떠올리며 날이 갈수록 더 짙어지는 선생님의 우직한 사랑을 지금 품속의 아이들에게 나누려 노력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무서워서 근처도 못 갔던 자전거는 제 건강을 지키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수단이 되고 깊은 트라우마만큼 긴 시간이 걸렸으나 발목을 드러내며 옷을 입을 수 있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그날 선생님의 자전거 차는 요즘 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제 삶의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냥 하루 학교 가기 싫은 아이 한 명을 교실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슴에 행복한 자전거 차를 품고 쉬지 않고 페달을 밟을 에너지를 샘솟게 해준 참 가르침이고 무엇으로도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껏 제가 탄 차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포근하며 사랑이 듬뿍 담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 자동차였습니다.
 

그리워하다 보면 서로 닮아가나 봅니다.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한만큼 그때와 지금의 현실은 확연히 달라 지나친 관심과 배려는 오히려 경계와 의심의 불씨가 되기도 하며 서류상 확실하면 결석을 하더라도 아이를 챙기러 집까지 갈 필요도 또 그럴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날까지도 별다른 점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이유로 결석하거나 아픈 아이가 입원이라도 하면 전화로 목소리를 듣던지 직접 찾아가서 안전을 확인해야 하고 먼 거리라도 퇴근길이나 주말에 병문안 가서 토닥거려 주고 와야 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이들과의 일상은 늘 티격태격 돌발 상황의 연속인지라 교단에 서면서 좌충우돌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변할 수 없었던 것은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온전히 소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사는 반 아이들에게 두루 고루 사랑을 나눠주되 아이들에겐 자신이 선생님의 특별한 존재이길 원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보듬으며 제가 선생님께 느꼈던 것처럼 그 언제라도 우리 아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빛나는 그런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몇 해 전 학부모가 예쁜 손 글씨로 직접 만들어 준 액자 속 ‘황경희 선생님을 만난 것은 축복이고 사랑입니다.’ 글귀를 볼 때마다 늘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가물가물 스쳐 가는 수많은 선생님 중에서 분명하게 기억나는 그 얼굴 그 존함. 선생님! 언제 어디서든 지켜봐 주세요. 철딱서니 없었던 꼬맹이들을 혼내시기는커녕 두 팔 크게 벌려 품어주셨던 때론 친구 같고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았던 그 인자하신 선생님 모습이 지금껏 세상에서 제가 만난 가장 자상하고 따뜻하며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생채기로 세상 밖에 나가기 두려웠던 꼬맹이를 쓴소리 하나 없이 몸소 실천으로 치유해주셨던 그 가르침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이 세상 단 하나뿐인 그 자전거 차를 끌며 선생님을 닮은 듬직하고 따뜻한 교사가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너무도 뵙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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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감] 걸음걸음, 선생님과 닮았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몫이다’라는 그 말처럼 교단수기를 쓰던 순간 설렘부터 3차 백신 접종 대기 순간 긴장을 한 번에 내려놓게 해 주었던 당선소식, 그 뒤 며칠 동안 수소문 끝에 찾은 은사님의 행복한 노후생활 확인까지 감사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었는데 어쩌면 그 속에 스며있는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을 고마운 은사님들을 향한 그리움과 감사, 향수를 공감할 수 있었기에 뽑혔을 뿐, 이 상은 모든 분이 함께 받는 상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1학년 담임을 맡아 느꼈던 나름대로의 고충과 보람 속에서 문득 문득 꺼내 보았던 선생님과의 아련한 추억을 우연히 ‘선생님의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아 응모했는데 이렇게 큰 기쁨을 누리게 되어 감사합니다. 
 

학기 초 우리 반 꼬맹이가 학교버스에서 내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가 온 학교를 울리며 모두가 당황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혼자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서 그런 것임을 인지한 후 제가 실천했던 건 그 아이가 화장실 가고 싶을 때 둘만의 신호로 함께 나가서 저는 화장실 출입구 앞에서 규칙적인 발소리를 내며 아이에게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며 안정시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두려움을 걷어낸 그 아이는 이제 학교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쾌활하게 생활하며 1년 동안 끊임없이 저에게 색종이로 접은 반지, 팔찌 같은 보석을 넘치게 선물했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도 지금 제 나이쯤 되었을 때 제 가슴속 우리 선생님처럼 제가 남아 있을까요? 사랑은 관심이고 소소한 실천이며 그 작은 것이 누군가에겐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실감하며 노력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또 희망이 샘솟습니다. 돌이켜보면 45년을 돌고 돌아 만난 은사님과 저의 밟아온 걸음걸음이 닮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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