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바라보며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아침 출근길은 언제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바쁜 아침 출근에 운전대를 잡고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면 기분 좋게 한숨 돌릴 수 있다. 세월이 부단히 흘러 벌써 내 나이 60이 되고 선생님이 된 지 37년을 넘었지만, 출근길은 여전히 설레고 상쾌하다. 학교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나를 "선생님" 하며 따른다. 그런 나 또한 수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 속에 배우고 성장했다. 서울에 사는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조그마한 시골에서 자취까지 하며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 부모님보다 더 나를 챙겨주시고 격려해주신 오석채 선생님. 선생님을 떠올리면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감사한 마음이 한가득 몰려 온다.
내 고향은 면 소재지에서도 한 시간을 걸어야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오지와도 같은 시골이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학교에 갈 때면 시냇가가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끝없이 걸었다. 그때는 시험을 쳐야 원하는 고등학교를 들어갈 수 있는 입시제도가 있었다. 내가 가고자 했던 학교는 이리시 (지금은 익산시)에 있는 이리여자고등학교였다. 내가 다니는 시골 학급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야 원서라도 쓸 수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지고도 강단 있는 모습의 수학 선생님이셨던 오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만난 것은 그 중요한 중학교 3학년 때다.
고등학교 입시는 다가오고, 집에서 학교까지는 얼마나 멀었는지 결국 나는 친구와 함께 자취하게 됐다. 친구와 한방에서 둘이 생활하고, 사촌지간인 친구 두 명이 한방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어린 시절에 자취하고 밥을 해서 먹었는지 대견하기까지 하다. 부모님들은 농사짓느라 바쁘셔서 자취방에 찾아오시지도 못하고 우리끼리 공부를 하면서 학교생활을 했다. 오석채 선생님은 그런 우리가 걱정되셨는지 가끔 들르셔서 안전하게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가시곤 했다. 또 사과나 귤을 손에 들고 찾아오셔서 열심히 공부하라며 격려해 주셨다. 꼭 자상하신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공부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살펴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안전하게 열심히 생활할 수 있었고 부모님께서도 바쁜 농사일에 전념하실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녀를 타지에 보내시고 걱정 없이 생활하신 것은 담임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였다고 언젠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말씀하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선생님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하다.
오석채 선생님은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사셨다. 어느 날은 선생님 댁에서 잔치가 있어 친구들과 같이 갔다. 선생님은 그때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우리를 초대해 챙겨주시려 했던 것 같다. 우리는 평소 잘 먹지 못했던 떡, 잡채, 고기 등 잔치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선생님 댁은 궁궐처럼 크게 느껴졌고, 환대받으며 사모님이 챙겨주시는 음식을 맛있게 먹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선생님은 이리여자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내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시고는 입시 성적에 반영되는 체력장도 허투루 넘기지 않으셨다. 어느 날 밤 선생님께서는 검은 비닐 봉투에 운동화를 사 가지고 자취방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셨다. 희고 반듯한 운동화를 받아 들던 순간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대로 된 운동화를 신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부모님께서는 학교를 열심히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차셨다. 시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내 마음 한구석엔 지긋지긋한 시골을 벗어나고픈 고집도 있었다. 그런 내게 체력장에 신을 운동화를 사 들고 오셔서 "만 점 받아야지" 하셨던 정 많은 선생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순전히 그 운동화 덕분인지 나는 체력장에서 당당히 만점을 받았다. 고등학교 입시에도 합격했다. 아쉬운 건 정든 중학교를 떠나는 것, 1년 동안 정들었던 담임선생님인 오석채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면 소재지 중학교를 떠나 고등학교가 있는 이리 시로 향했다.
그런데 신기한 인연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석채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내가 다닌 여고는 바로 옆에 여중이 붙어 있었는데 그 중학교로 선생님이 발령을 받아 오신 것이다. 자취했던 친구 중 두 명도 같은 고등학교에 온 터라 우리는 오석채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다시 뵙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땐 특별한 감사 표시도 못하고 마음으로만 좋아서 콩닥콩닥했던 기억이 난다. 가을이 되었다.
그 시절 여고의 가을 축제는 아주 멋지고 화려했다. 우리 반 핸드볼 선수였던 나는 예선전을 거쳐 준결승, 결승까지 오르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응원의 함성 가운데 골키퍼인 난 바짝 긴장해 집중했다. 그런데 오석채 선생님께서 언제 오셨는지 관람석에서 나를 응원해주고 계셨다. 선생님 앞이라 어린 마음에 괜히 부끄럽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보신다고 생각하니 더 잘하고 싶어졌다. 결과는 우리 반의 우승! 선생님과의 인연이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연결되어 옆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는 퍼레이드였다. 각 나라의 의상을 입고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우리 반은 스페인이었다. 단짝 친구와 나는 한 팀으로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퍼레이드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오는데 오석채 선생님이 중학교 교실에서 창문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미시더니 "미희야, 의상 멋지다." 하셨다. 수줍은 많은 여고생이던 나는 면사포까지 쓰고 드레스를 만들어 입은 어리숙한 모습이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고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교실로 뛰어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다시 선생님을 찾아뵌 건 고3에 올라가서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께서는 "미희야, 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잘 맞을 것 같구나." 하셨다. 나 역시 오석채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나는 전주에 있는 교육대학에 들어갔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오석채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과 따뜻한 마음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중학생 때 오석채 선생님께 느꼈던 선생님의 모습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오석채 선생님을 다시 뵌 건 그 후로 30여 년이 흐른 뒤였다. 친구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직을 하고 익산시에서 사모님과 함께 생활하고 계셨다. 방학 때 친구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선생님께 드릴 홍삼 세트와 사모님께 드릴 화장품을 사고 꽃다발을 준비했다. 어느덧 우리가 선생님이 되어 선생님 댁을 다시 찾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는 자녀들이 다 자라 독립하고 선생님과 사모님 두 분이 생활하고 계신 아담한 주택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세월의 흔적만큼 주름이 파인 얼굴이지만 여전히 인자하신 모습 그대로셨다. 사모님도 전과 다름없는 환한 미소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선생님께선 교직 생활에 대해 물으셨다. 선생님 덕분에 선택한 교사의 길을 잘 견뎌내며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댁에서 준비해 주신 다과를 먹고 있자니 중학생 시절의 어린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은사님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 모습을 보니 참 다행이었다. 또 세월이 흘러, 내 생활이 바쁘다고 고향에 갈 일도 없이 잊고 살던 요즘. 선생님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니 오석채 선생님이 가슴 밑바닥에서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어린 시절 그 따뜻했던 보살핌, 부모님처럼 챙겨주셨던 마음. 지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오석채 선생님이 주셨던 그 마음만큼의 마음을 주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선생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고향에 있는 친구와 함께 오랜만에 연락을 드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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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감] 바래지 않는 기억
선생님과의 추억을 담은 글에 생각지도 못한 수상의 영광을 안겨 주셔서 감사하다. 옛 은사에 대한 감사, 추억 등이 담긴 사연을 기다린다는 교단 수기 공모를 본 순간, 내가 간직했던 오석채 선생님과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글을 쓰기 전부터도 마음이 들떴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에서의 중학교 시절. 하염없이 걸으며 친구들과 수다로 채웠던 등굣길도, 3학년이 되자 자취방을 얻어 생활한 아담한 양옥집도 내겐 여전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다시 고향을 찾아 중학교를 둘러보았을 때다. 학교 가는 길은 차로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그 옛날의 길이 이렇게나 가까웠던가?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피어 있던 시골길은 이제 반듯하게 넓어져 있었다. 순간 아쉬움이 밀려왔다. 더는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당연했다.
반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고향 풍경은 앞으로도 계속 변해가겠지만, 그 시절 오석채 선생님이 내게 주신 따뜻한 마음은 그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가슴 깊이 남았다. 소중한 것들은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 변하지 않나 보다.
이제 교직을 마감하는 시기, 오랜 시간 혼자 간직하고 있던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한국교육신문 지면을 빌어 표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글을 쓰는 동안, 바래지 않은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