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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22 교단수기 은상] 죠스바 선생님

 

"오늘 참 덥다. 그자?"

 

1985년 ㅊㄱ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정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해 여름을 생각하면 낭랑한 목소리의 예쁜 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당시 경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독하게 말 안 듣는 친구들을 아주 능숙하게 지도하셨다. 


"너그들 오늘 말 잘 들으면 선생님이 아이스크림 사줄게."

 

선생님의 말씀에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선생님은 날씨가 더울 때면 간혹 아이스크림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사로잡곤 하셨다.

 

"반장, 선생님은 죠스바로 꼭 사온나. 알겠제?"

 

죠스바라는 아이스크림은 상어 주둥이 모양에 빛깔은 남색, 속은 빨간 딸기잼으로 채워진 막대 아이스크림이다. 당시에 처음으로 출시된 것 같은데 꽤 인기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사주시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안 되던 공부도 집중이 잘되고 교실은 선풍기 없이도 시원했다.

 

"내일은 곱셈 평가를 칠 때니깐 집에 가서 놀지만 말고 공부들 좀 해라. 알겠제?"
 

곱셈 평가를 앞둔 밤이 불현듯 떠오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 나는 4학년 때까지도 구구단을 완벽하게 외우지 못했다. ‘5학년씩이나 된 녀석이 구구단도 하나 못 외우나’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에 잠이 오지를 않았다. 
 

구구단의 블랙홀에 빠지기 시작한 건 2학년 때부터였다. 남자 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 아직도 무서운 인상이 눈에 선하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체격에 머리숱은 많지 않았고 거의 자신의 키만 한 교편을 들고 다니셨다. 어린 시절 나의 눈에는 마치 산신령이 내려와 지팡이를 들고 호령하는 모습이었다.
 

"구구단은 잘 외워 왔제? 오늘은 6단까지 외워 보도록 하겠다."
물론 나도 집에서 열심히 구구단을 반복해서 잘 외웠다. 나름 완벽하게 외웠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니가 외워 보거라."
친구들의 차례가 끝이 나고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이오 십…."
"그만, 아직도 다 못 외웠구만, 손바닥 내거라."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분명 틀린 것 없이 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손바닥을 내라니? 당시 선생님에게 변명한다는 것은 군대에서 항명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용기가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꼼짝도 못 하고 손바닥을 내밀어야 했고 영문도 모른 채 맞았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떨어졌지만 왜 내가 틀렸는지 물을 수 없었다. 좀 더 용기 있는 아이였다면 가능했을까? 무척 내성적이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게 선생님께서는 나의 작은 손바닥에 빨간 두 줄의 상처를 남기고 옆으로 가버렸다. 손바닥에 남긴 상처보다도 마음에 생긴 생채기는 더욱 오래 갔다.
 

‘내가 왜 틀렸지? 어디에서 틀린 거지?’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때 구구단 6단에서 멈춘 이유를 모른다면 모두가 웃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모르니 모른다고 말한다. 그때 마음에 생긴 상처는 트라우마처럼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구구단을 외울 때면 6단에서 항상 막혔다. 구구단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자신감마저 떨어졌다. 이후로 3학년, 4학년이 되어서도 당연히 완벽하지 못한 구구단을 구사했고, 항상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비밀이 되어 버린 채 5학년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 수학 시간이 되면 늘 구구단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구구단도 못 외우나? 니 설마 구구단 못 외웠나?"
 

당시 레퍼토리처럼 듣던 말이었다. 당연히 수학 시간은 제일 어렵고 싫은 과목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천사 같은 선생님 앞에서 망신을 당할 생각을 하니 그것도 너무 싫었다.
 

아니나 다를까? 곱셈 평가시험 당일 적어낸 답은 거의 다 틀려 버렸고 선생님의 레이다에 ‘척’하니 포착되고 말았다. 이후로 진짜 곱셈을 잘해 보려고 밤새 구구단을 외우고 노력해봤지만, 거짓말같이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다.
 

"철호야 니 이리 좀 와 볼래?"
 

선생님은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난 다음 나를 교실에 따로 남기셨다.
 

"이 돈 들고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오거라. 물론 니 꺼도 같이."
 

무슨 영문인지 선생님은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리곤 학교 앞 가게로 뛰어가 선생님과 똑같은 죠스바 2개를 사 왔다.
 

"말 안 해도 잘 아네? 선생님이 죠스바 좋아하는 줄. 일단 먹어라."
 

무슨 일인지 몰라 긴장하고 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활짝 웃으시며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선생님과 나는 열심히 죠스바를 빨아 먹었다. 한참을 먹다가 보니 선생님의 입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와 버렸다. 죠스바의 특성상 다 먹고 나면 입술과 혓바닥이 새까맣게 변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왜? 선생님 입술이 웃기나? 니는 안 웃긴 줄 아나? 하하하."
 

내가 혓바닥을 살짝 내밀자 선생님도 깔깔깔 웃으셨다. 그러고는 한동안 둘이서 웃기만 했다.
 

"철호야, 너 구구단이 좀 어렵제?"
 

선생님은 단번에 나의 제일 약한 부분을 간파하고, 조심스레 두드리고 계셨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손에는 땀이 나려고 했다.
 

"이거 진짜 비밀인데 우짜지? 말해 줄까? 선생님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구구단 다 못 외었다. 정말로. 다른 사람들한테는 진짜 비밀이데이."
 

선생님의 말씀에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똑같은 고민을 선생님도 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선생님이 구구단 잘 외우는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해보거래이. 알겠제?"
 

선생님이 알려주신 비법은 ‘6×3=18과 3×6=18의 답이 똑같다는 것’, 무작정 외우기만 하던 나에게 원리를 알려 주셨다. 너무도 뻔한 이론이었지만, 나는 그 비법을 5학년이 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작은 구구단 학습장을 나의 손에 쥐여 주시고는 단번에 외울 수 있다고 용기까지 덤으로 주셨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외우기 힘들던 구구단은 6단의 고지를 넘어 완전 정복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작은 희망의 씨앗이 살며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 그때의 씨앗은 결국 싹이 났고, 나를 교사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첫 발령으로 고향인 합천으로 자원해서 발령을 받게 되었고, 4년째가 되던 해 거짓말같이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교직 생활 두 번째로 옮긴 학교에서 그 시절의 선생님과 동료로서 다시 해후한 것이다.
 

"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세요?"
"이름이 똑같아서 설마 했는데 진짜 철호 니가 맞네?"
 

그때의 선생님은 교무부장 선생님으로 여전히 교직에 계셨고, 예전처럼 밝고 상냥한 모습으로 학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이런 인연이 없다고 부러워들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자랑스럽게 나의 이름을 말씀하시곤 어깨를 으쓱하셨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선생님이 된 것 모르셨죠?"
 

교무실에서 같은 동료로서 마주한 날, 선생님께 마음을 담아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은 무척이나 뿌듯해하셨다.
 

교육청 장학지도가 있던 날, 다 같이 모인 교무실의 회의 자리에서 한 장학사님이 사제간이 한 학교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장 선생님은 은사님을 생각할 때 뭐가 제일 기억에 남나요?"
 

순간 나의 머리에 딱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죠스바입니다. 죠스바를 선생님과 같이 빨면서 서로의 입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죠스바 선생님 사랑합니데이."
 

그러자 모두 한바탕 웃었고, 선생님께서는 윙크를 날리셨다. 그렇다. 죠스바가 이어준 인연이라고 해도 맞을 것이다. 죠스바는 선생님만의 부드러운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선생님께서는 명예퇴직하셨고 일상으로 돌아가셨다. 제자의 훌쩍 커 있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을까? 나를 기다려 준 선생님이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선생님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지금도 내 가슴에 오롯이 자리 잡아 나의 제자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죠스바 선생님, 언제 죠스바 하나 같이 하실래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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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감] 세상에 나온 수줍은 이야기

 

22년 새해 선물이 한국교육신문에서 날아왔습니다. 꼭꼭 숨겨 두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수줍은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고요. 무엇보다도 은사님의 따뜻했던 사랑을 생각하며 쓴 이야기가 수상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딱딱한 한마디의 말보다도 편한 친구처럼 다가와서 일깨움을 주신 선생님의 지혜는 지금까지 저를 성장케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칼 매닝거는 "무엇을 가르치냐보다 어떤 스승이냐가 중요하다"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을 대하는 지극한 정성과 마음이야말로 은사님께서 진정 바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선생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때처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싶어집니다. 선생님 덕분에 제 마음이 또 한 번 충만해졌습니다. 은사님과의 추억을 돌려주신 한국교육신문사 관계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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